광서제

광서제

다른 표기 언어 Kuanghsu , 光緖帝 동의어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 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아이신기오로 자이티얀, 청나라 제11대 황제
요약 테이블
출생 1871. 8. 14, 중국 베이징
사망 1908. 11. 14, 베이징
국적 청(淸), 중국

요약 광서제는 통치기간 동안 서태후가 조정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면서 쇠퇴해가는 제국의 체제를 근대화시키고 개혁하려는 젊은 황제의 노력을 저지했다.
1875년 바로 전대 황제인 동치제가 죽자 그 어머니 서태후는 자신의 4세 된 조카를 황제로 선정했으나 1861년부터 해오던 섭정은 계속되었다. 1887년 광서제는 친정할 나이가 되었지만, 정책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서태후로부터 정권을 이어받을 때까지 2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898년 '백일 유신'으로도 알려져 있는 무술변법을 실행하면서 그는 자신의 측근에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관료들을 등용하고 광범위한 개혁의 칙령들을 반포했다. 그러나 수도로 돌아온 서태후에 의해 황궁에 유폐되었고 실권을 빼앗겼다. 1908년 11월 15일에 서태후가 죽었고, 매우 미심쩍게도 그때까지 건강하던 광서제가 바로 전날에 죽었다고 공표되었다.

광서제(光緖帝)
광서제(光緖帝)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하면 청의 제9대 황제가 된다.

이름은대첨(戴湉). 연호는 광서. 묘호는 덕종. 시호는 경제(景帝). 그의 통치기간 동안 서태후(西太后:1835~1908)가 조정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면서 쇠퇴해가는 제국의 체제를 근대화시키고 개혁하려는 젊은 황제의 노력을 저지했다.

바로 전대 황제인 동치제(同治帝)가 죽자 그 어머니 서태후는 자신의 4세 된 조카를 황제로 선정했다. 그녀는 이 조카를 양자로 삼았고, 1861년부터 해오던 대로 섭정을 하면서 조정을 다스렸다. 이러한 행동은 황실의 신성한 계승원칙을 깨뜨린 것이었지만, 여기에 대한 반대는 모두 진압되었고 1875년 2월 25일 이 젊은 왕자는 광서라는 연호로 즉위했다.

1887년 광서제는 친정(親政)할 나이가 되었지만, 정책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서태후로부터 정권을 이어받을 때까지 2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898년 27세가 되자 마침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백일 유신'으로도 알려져 있는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실행하면서 그는 자신의 측근에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관료들을 등용하고 광범위한 개혁의 칙령들을 반포했다.

이렇게 되자 보수적인 관료들이 반발했다. 제국군대의 최고사령관이었던 영록(榮祿:1836~1903)의 도움을 받아 서태후는 다시 수도로 돌아와 황제를 황궁에 유폐하고 나서, 그가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황제의 죽음이나 폐위를 바라지 않았던 외국열강이 그의 생명을 구하기는 했지만, 그후 그는 아무런 권력도 갖지 못했다.

1908년 11월 15일에 서태후가 죽었고, 매우 미심쩍게도 그때까지 건강하던 광서제가 바로 전날에 죽었다고 공표되었다. 서태후의 마지막 포고로 광서제의 3살 난 조카에게 황위가 넘겨졌고, 새로운 황제는 선통(宣統)이라는 연호로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