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절대주의

계몽절대주의

다른 표기 언어 enlightened absolutism , 啓蒙絶對主義 동의어 개명전제주의, 開明專制主義

요약 18세기 후반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에 나타난 절대주의 군주제의 변형된 형태.

프랑스에서 전개되었던 계몽사상을, 군주 자신이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채택한 것이다. 주로 관료행정의 확충을 통해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하려고 했다. 이 주의의 대표적 군주로는 프리드리히 2세, 조제프 2세 등이 있으며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도 초기에 이 그룹에 속했다.

계몽절대주의의 사상적 원류는 프랑스의 중농주의자들이 주창한 '합법적 전제군주'에서 잘 드러난다. 이 말은 군주를 계몽시켜 '자연의 법칙'을 신봉케 하고, 독재권력보다는 입법활동을 통한 통치를 존중케 하는 것을 의미했다.

독일의 바덴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1728~1811)는 이 사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지대를 단일세로 만들었고 대규모공업 경영의 육성을 꾀했다. "군주는 국가 제일의 종복"이라는 말로 유명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종교적 관용. 교육개혁, 사법제도의 근대화 등 일련의 개혁적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조치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국가적 공리주의에 의해 산업장려와 부국강병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프리드리히 왕은 국영 매뉴팩처의 창설, 어용지 농민의 보호, 소택지의 간척을 행하는 한편, 군간부인 귀족의 영주권(領主權)에 대해서는 일체 제한을 가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조제프 2세도 예수회의 추방, 수도원의 해산, 신교도의 박해금지 등의 정책을 실시해 교회를 국가에 복속시켰다. 아울러 학교교육의 근대화와 국가통제에 온힘을 기울였다. 그는 프리드리히보다 진일보하여, 재정개혁적 견지에 서 농민해방, 귀족의 면책특권폐지 등 급격한 사회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지역 사정을 무시한 행정획일화의 시도였기 때문에 특권계층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조제프의 동생인 토스카나의 레오폴드도 내국관세의 철폐, 농민의 봉건적 부담 폐지 이외에도 지방자치의 육성과 의회제도의 근대화까지도 생각했으나 절대주의의 통치원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또 이러한 여러 가지 개혁정책이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군주·관료 정치의 강화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당초 프랑스 계몽사상의 강한 영향을 받아 신법전의 편찬 등 '철학적 입법'을 의도했으나 푸가초프의 난과 프랑스 혁명에 직면해 보수주의로 회귀했고 그 결과 귀족의 특권과 농노제가 강화되었다.

나폴레옹 시대 독일 연방의 개혁행정은 계몽절대주의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총체적으로 볼 때 계몽절대주의는 신시대의 사상을 부분적으로 채택, 군주제 통치를 합리화하고 보강하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