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표기 언어

요약 성(姓)의 하나. 문헌상으로는 114개의 본관이 전하나, 현존하는 강씨는 모두 진주강씨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한다. 따라서 진주 강씨의 시조인 강이식이 강씨의 시조 격이라 할 수 있다. 강이식은 고구려의 공신으로 을지문덕과 함께 전공을 세웠다. 후손인 진이 진양에서 벼슬을 해 본관을 진주로 삼았다. 진주 강씨는 박사공파·소감공파·시중공파·은열공파·인헌공파 등 5개파로 크게 나뉜다. 중요 인물로는 세종 때의 강희안·강희맹 형제와 정묘호란 때 공을 세운 강홍립 등을 들 수 있다. 강씨는 진주를 중심한 경상남도와 부산 지방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에 따르면, 성씨 중에서 인구순위 6위이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진주 강씨
  3. 현황

개요

문헌상으로는 114개의 본관이 전하나, 시조가 분명한 것은 진주(晉州)·금천·안동(安東)·배천·해미(海美)·동복·광주 등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강씨는 모두 진주 강씨에서 갈라져나왔다고 한다. 따라서 진주 강씨의 시조인 강이식(姜以式)이 강씨의 시조(始祖)각주1) 격이라 할 수 있다.

강이식은 고구려의 도원수를 지내며 많은 전공을 올린 공신이다. 597년에 수나라 문제가 무례한 서신을 보내오자 "이같은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이 싸울 것을 명하자 5만의 병사를 인솔하여 수나라 군대 30만을 격퇴했다. 603년 수나라 양제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에는 을지문덕과 함께 굴욕스런 강화를 반대하고 싸워 크게 전공을 세웠다. 후손인 진(縉)이 진양(진주의 옛이름)에서 벼슬살이함에 따라 본관을 진주로 삼았다.

진주 강씨

진주 강씨는 박사공파(博士公派)·소감공파(少監公派)·시중공파(侍中公派)·은열공파(殷烈公派)·인헌공파(仁憲公派) 등 5개파로 크게 나뉜다.

박사공파는 박사공의 손자 사첨(師瞻)이 어사를 지냈다 하여 어사공파(御史公派)로, 시중공파는 시중공의 손자 원로(元老)가 관서대장군을 지냈다 하여 관서대장군공파(關西大將軍公派)로 부르기도 한다. 은열공파는 강민첨의 시호인 은열공을 따서 붙인 것이며, 인헌공파는 강감찬의 시호인 인헌공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인헌공파를 제외한 4개파는 본관을 진주로 하고 있으며 각 파조(派祖)를 1세조로 하고 있다.

박사공파는 계용(啓庸)을 1세조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 때 국자박사를 지냈고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을 다녀와 진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손자 사첨(師瞻)은 감찰어사를 지냈다. 그리고 사첨의 후손 중 첫째인 회백(淮伯)의 후손을 통정공파(通亭公派), 둘째인 회중(淮仲)의 후손을 통계공파(通溪公派)로 구분하기도 한다. 중요 인물로는 세종 때의 강희안·강희맹 형제와 정묘호란 때 공을 세운 강홍립 등을 들 수 있다.

소감공파와 시중공파는 각각 위용(渭庸)과 원용(遠庸)을 1세조로 하고 있다. 은열공파와 인헌공파는 각각 민첨(民瞻)과 감찬(邯贊)을 파조로 하고 있다. 강민첨과 강감찬은 거란의 3차 침입시에 상원수와 부원수로서 큰 무훈을 세운 명장이다. 인헌공파는 파조인 강감찬의 출생지가 금천(衿川, 지금의 시흥)이라 하여 금천강씨라 부르기도 하는데 강감찬의 아버지인 강궁진(姜弓珍)을 1세조로 하고 있다.

강씨는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227명, 재상급 대신 5명, 대제학 1명, 청백리 7명을 내었다. 강씨는 진주를 중심한 경상남도와 부산 지방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하(河)씨, 정(鄭)씨와 함께 '진양(진주)의 3성'으로 일컬어진다.

현황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에 따르면, 인구수 117만 6,847명으로 성씨 중에서 인구순위 6위이다.

대한민국의 주요 성씨(KNSO, 2000)
대한민국의 주요 성씨(KNSO,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