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술옥사

갑술옥사

다른 표기 언어 甲戌獄事 동의어 갑술환국, 甲戌換局

요약 1694년(숙종 20) 숙종의 폐비(廢妃) 민씨(閔氏) 복위운동을 둘러싸고 소론이 남인을 몰락시킨 사건.

숙종이 폐비사건을 후회하고 이에 앞장섰던 남인에 대해 반감을 지니고 있었는데, 1694년 노론계의 김춘택(金春澤)과 소론계의 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인을 대상으로 필요한 기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주로 노론이 가담하였으나 점차 소론측의 찬동자도 많아졌다. 이 소식에 접한 남인 민암(閔黯)과 이의징(李義徵) 등은 1689년 기사환국을 통해 집권한 남인의 세력을 공고히 하고 반대파의 세력을 일제히 타도하기 위하여 1694년 3월에 김춘택 등 수십 명을 체포한 후 국문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폐비 민씨를 두둔한 나머지 국문을 주도한 남인의 행동을 미워하여 국문을 주관한 민암과 판의금부사 유명현(柳命賢) 등을 귀양보냈다.

당시 민씨복위운동을 주도했던 서인들은 기사환국 이래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숙빈 최씨(淑嬪崔氏)와의 연결을 통해 궁중과의 연결을 도모하였고, 이를 매개로 왕비 장씨와 남인계의 잘못된 점을 숙종에게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숙종은 남인을 배척하고 남구만을 영의정, 박세채를 좌의정, 윤지완(尹趾完)을 우의정에 기용함으로써 소론 정권을 성립시켰다. 숙종은 기사환국 때 왕비가 되었던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복귀시키는 한편 노론계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 민씨를 6년 만에 복귀시켜 궁중으로 들어오도록 하였다.

한편 송시열(宋時烈)·김익훈(金益勳)·조사석(趙師錫)·김수항(金壽恒)·민정중 등 1689년에 화를 당하였던 노론계 인물들에게 다시 작위를 주었다.

반면 남인측은 민암·이의징 등이 사약을 받았고 권대운·목내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 등이 유배당하였다. 그뒤 남인은 다시는 정권을 잡을 수 없었다. 이후 정계에서는 서인 내부의 소론과 노론과의 쟁론(爭論)이 시작되었다.

중앙정치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인 환국 과정에서는 전 단계의 붕당정치에서 보이던 여러 정치집단 사이의 상호 비판과 그 바탕 위에서 유지되는 균형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승리한 집단이 주축이 되어 주요 행정체계와 밀접하게 연결된 관료직을 독점하며 우위를 다져갔고, 주요 병권을 장악하는 일이 많았다. 가령 1694년 당시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양대장에 신여철(申汝哲)·윤지완 등 소론계를 등용시켜 소론 정권을 공고히 뒷받침하였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