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주의

갈리아주의

다른 표기 언어 Gallicanism

요약 교황권의 제한을 주장한 프랑스의 교회론적이며 정치적인 교리와 관례들로 복잡하게 구성된 사상.

프랑스에 나타난 로마 가톨릭 교회생활의 시대별 특징을 보여준다.

다양한 이 사상은 3가지 기본적인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세속사회에서 프랑스 왕이 자주권을 가지며, ② 교회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월하며, ③ 교황의 내정간섭을 제한하기 위해 성직자와 왕이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용어는 교황의 권위를 강조하는 교황지상주의(Ultramontanism)에 반대해서 19세기에 만들어졌으나 교리 자체는 본래 초기 프랑스 국가주의, 특히 8,9세기 샤를마뉴 대제가 지배 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고, 14세기에 그 꽃을 피웠다.

단려왕(端麗王)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 사이의 투쟁(1294~1303)은 왕권과 교황권의 본질적인 관계에 관한 갈등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그뒤 한 세기 반 동안 공의회 수위설(公議會首位說)이 발전했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전체 공의회의 권위는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에게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심지어 교황도 그 회의에 종속된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2가지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중 하나는 아비뇽과 로마에 경쟁 교황들을 세움으로써 일어난 대분열을 끝내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을 때 왕 샤를 6세가 1398년 전국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백성의 공동 이익을 위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로마의 보니파시오 9세를 승인하지 않는 동시에 아비뇽의 교황 보니파시오에게도 복종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건이다.

다른 하나는 또다른 교회회의가 열리고 있던 1438년 샤를 7세가 부르주 국본조서(Pragmatic Sanction of Bourges), 즉 교황은 전체 공의회에 종속되며 그의 사법권은 왕의 뜻에 제약을 받는다는 내용의 23개 조항으로 된 포고문을 공포한 사건이다.

그뒤로 교황들은 끊임없이 이 국본조서 철회를 주장했지만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다가, 1516년 비로소 프랑스 왕에게 주교 임명권을 양보하는 정교협약(政敎協約)으로 이를 대치할 수 있었다.

16세기말경 갈리아주의는 정치와 신학 2가지 면으로 구분될 수 있었다. 정치적인 갈리아주의는 의회 갈리아주의와 국왕 갈리아주의로 세분할 수 있었는데, 국왕 갈리아주의는 교회문제에 관한 프랑스 왕들의 정책을, 의회 갈리아주의는 교회문제를 다루는 법원들과 입법부의 요구들을 가리킨다.

의회 갈리아주의를 가장 대표적으로 옹호한 인물은 1594년 〈프랑스 교회의 자율권 Les Libertés de léglise gallicane〉을 펴낸 법률가 피에르 피투였다. 이 책은 관련 주해서들과 함께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단죄를 당했지만, 19세기까지 줄곧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학적 갈리아주의의 입장은 1682년에 열린 프랑스 성직자대회에서 통과된 갈리아 4조항(Four Gallican Articles)에 잘 나타난다.

이 선언은 다음과 같다. ① 교황은 최고의 영적인 권한만 가지며 세속적 권한은 없다. ② 교황은 가톨릭 교회회의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 ③ 교황은 프랑스 교회가 옛날부터 어김없이 지켜온 관습, 예를 들어 왕의 주교임명권이나 주교가 없는 교구의 세입사용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④ 교황무류설은 전체 교회의 승인을 전제로 한다.

자크 베니뉴 보쉬에(Jacques-Bénigne Bossuet) 주교는 이 선언문을 라틴어로 작성하였고, 중재안 전문에서 그것을 옹호했다.

이 조항들은 1690년에 로마 교황 알렉산데르 8세에게서 비난을 받았으며 1693년에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에 의해 폐지되었지만, 갈리아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프랑스 성직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다 갈리아주의자는 아니었다. 특히 프랑스 예수회의 수사들은 열렬한 교황지상주의자들이었다. 18세기에 이르러 프랑스 합리주의자들이 바로 가톨릭 교리의 기반을 공격하면서부터 프랑스 사람들의 갈리아주의에 대한 관심은 약화되었고, 마침내 이 사조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무력해졌다.

나폴레옹은 성직자들로 구성된 갈리아당에 지지를 보냈지만, 큰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이 사상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70)가 교황지상주의 입장을 공식선포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