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소설

가문소설

다른 표기 언어 家門小說 동의어 가계소설, 家系小說, 연대기소설, 年代記小說, 세대기소설, 世代記小說, 가족사소설, 家族史小說

요약 혼인을 매개로 한 가문과 가문 사이의 이야기, 또는 한 가문 내부의 여러 세대에 걸친 사연을 다룬 장편 고전소설.

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을 많이 한 가문의 부녀자들이 심심할 때 읽었던 것으로, 정조 이후 느껴지던 지배질서의 위기를 이겨내고 가문의 번영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방대한 분량과 복잡한 구성을 보면 그전까지의 소설이 거둔 가장 중요한 성과인 것 같지만, 중세에서 근대로 옮아가던 이행기 문학을 후퇴시켰다는 부정적인 면도 있다. 가계소설(家系小說)·대하소설(大河小說)·연작소설(連作小說) 등으로도 불린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완월회맹연 玩月會盟宴〉(180책)·〈명주보월빙 明珠寶月聘〉(100책)·〈임화정연 林花鄭延〉(139책)·〈유씨삼대록 劉氏三代錄〉(20책)·〈쌍천기봉 雙釧奇逢〉(18책)·〈현씨양웅쌍린기 玄氏兩熊雙麟記〉(10책)·〈화산선계록 華山仙界錄〉(80책)·〈벽허담관제언록 碧虛談關帝言錄〉(26책)·〈명행정의록 明行正義錄〉(70책)·〈재생연전 再生緣傳〉(52책)·〈성현공숙열기 聖賢公淑烈記〉(25책) 등이 있다.

이중에는 연작소설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명주보월빙〉은 〈윤하정삼문취록 尹河鄭三門聚錄〉(105책)으로 이어지고, 방계로는 〈엄씨효문청행록 嚴氏孝門淸行錄〉(30책)으로 이어진다. 〈쌍천기봉〉은 〈이씨세대록 李氏世代錄〉으로, 다시 〈이씨후대린봉쌍계록 李氏後代麟鳳雙系錄〉으로 이어진다. 〈현씨양웅쌍린기〉는 〈명주기봉 明珠奇逢〉·〈명주옥연기합록 明珠玉緣奇合錄〉·〈현씨팔룡기 玄氏八龍記〉의 4부작으로 이어진다.

〈벽허담관제언록〉은 〈하씨선행후대록 河氏善行後代錄〉으로 이어지고, 〈명행정의록〉은 〈보은기우록 報恩奇遇錄〉의 후편이다. 〈성현공숙열기〉는 〈임씨삼대록 林氏三代錄〉으로 이어진다. 이외에도 연작소설이 많이 있다.

처음에는 속편을 지었으나 나중에는 일대기나 이대기로 끝낼 수 있는 이야기를 삼대기로 늘리고, 여러 가문을 혼인으로 얽히게 만들어 대장편(大長篇)을 이루었다.

수백 명에 이르는 등장인물이 나와 복잡한 사건을 벌이며 작품을 계속 늘렸으나 기본양상은 흔히 보았던 방식으로 되풀이되었다. 천상에서 내려온 남자 주인공은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가문의 위세를 더욱 높이고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 지배체제를 다시 확립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하늘이 정해준 배필을 만나 혼인하기까지의 어려움을 다루고, 동성간의 질투에 의한 모함, 이성을 강제로 차지하려는 데서 생기는 갈등을 문제삼았다.

가문소설은 일찍부터 국적이 문제시되어왔고 지금도 그 시비가 그치지 않고 있다.

이 부류에 드는 많은 작품들은 궁중의 낙선재(樂善齋)에 소장되어왔다. 그런데 이중에는 중국소설을 번역 또는 번안한 작품들도 섞여 있었으므로, 여기에 함께 소장된 가문소설들도 중국소설의 번역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어온 것이다. 이병기는 낙선재본 소설의 대부분이 고종(高宗) 때 이종태(李鍾泰)라는 문인이 수십 명의 문사를 동원하여 중국소설을 번역한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번역이라고 볼 수 없는 자연스러운 표현과 속담의 구사, 중국과는 다른 우리의 전통적인 풍속과 생활습관 등이 작품 속에서 흔히 보이고 있으므로 국내 창작설도 설득력이 있다(→ 한국문학).

나아가 조선 후기 문신인 안처겸(安處謙)의 어머니 이씨부인이 대표적인 가문소설인 〈완월회맹연〉을 지어 궁중에 들여보내고자 했다는 기록이 조재삼(趙在三)의 〈송남잡지 松南雜識〉에 나오고 있어 국내 창작설이 더욱 뒷받침된다.

또 가문소설로 분류되고 있는 〈옥수기 玉樹記〉는 심능숙(沈能淑)이 지었을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을 국문으로 번역한 남윤원이 〈임화정연〉과 〈명행정의록〉을 예로 들면서 자기도 〈옥수기〉의 속편을 짓고 싶다는 기록을 하고 있어, 연작소설의 창작이 당시 소설창작의 한 풍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로 본다면 가문소설은 국내 창작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가문소설은 대체로 18세기부터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전반기를 살았던 이씨부인이 〈완월회맹연〉을 지었으며, 19세기 말경 필사된 〈옥원재합기연 玉鴛再合奇緣〉에 당시 유행하던 가문소설들이 많이 적혀 있어 이것들이 18세기부터 독자들에게 읽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옥원재합기연〉에도 나오지만, 1780년 박지원이 중국 북경에서 국문으로 된 아주 낡은 〈유씨삼대록〉을 보았다는 기록을 〈열하일기 熱河日記〉에 남기고 있다. 홍희복(洪羲福:1794~1859)의 번역소설 〈제일기언 第一奇諺〉의 서문에 당시 유행하던 가문소설 목록이 많이 기록되어 있어 가문소설이 19세기에도 계속 읽혔음을 알 수 있다.

고전소설이 대개 그렇듯이 가문소설도 지은이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대장편이며 당시 문학작품이 상품화되고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전문 작가에 의해 씌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작품들이 상층 지배층의 의식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가문소설의 독자층과도 관계가 있다. 가문소설은 방대한 분량 때문에 방각본처럼 상업적 출판의 대상이 되지 못했으며 독자층 역시 궁중이나 세도가 여성 등과 같은 특정 계층에 국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가문소설은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한 영웅소설이나 판소리계 소설과는 성격이 다르다.

작품의 문체, 주인공의 품위있는 언어, 행동 등은 사대부의 생활규범에 들어맞는 것이어서 상층계급의 독자들에게는 교양을 얻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소설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문소설은 근대 지향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수적 경향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물의 성격이나 시대반영 등에 있어서 새로운 양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길고 복잡한 내용을 능란하게 구성하여 지루하지 않게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기법은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