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

심영

다른 표기 언어 Sim Yeong , 沈影 동의어 심재설, 沈載卨
요약 테이블
출생 1910년 철원
사망 1971년
데뷔 1931년 〈수일(守一)과 순애(順愛)〉

요약 일제 강점기 조선과 해방 이후 북한의 배우 겸 극단 운영자인 심영(沈影)은 1911년 철원에서 태어났으나 심영의 주거지는 서울이었다. 심영이 영화에 데뷔한 것은 1931년이다. 심영은 〈수일(守一)과 순애(順愛)〉에 출연했다. 심영이 다음에 출연한 영화는 1931년 11월 개봉작 〈방아타령〉이었다. 심영의 본격적인 데뷔작인 〈방아타령〉은 김소영‧이경선‧박제행‧심영‧김선영 등이 출연하였고 엑스트라 3백 명이 동원된 작품이었다. 1930년대 중반 심영은 동양극장 청춘좌에서 핵심 배우로 활약하다가, 중앙무대와 고협의 창단 멤버로 가담하였다. 고협은 고려영화협회의 자매단체로, 원활한 영화 촬영과 인력 공급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처음에 심영은 〈복지만리〉 촬영 팀에 속했다가, 고협의 실질적인 창단 주체가 되었으며, 한동안 고협을 운영하는 책임자의 위치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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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생애와 이력
  2. 작품 세계
  3. 영화사적 평가
  4. 작품 목록

생애와 이력

심영 Sim Yeong 沈影(1910~1971)

일제 강점기 조선과 해방 이후 북한의 배우 겸 극단 운영자. 심영(沈影)은 1910년 철원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심영의 주거지는 서울이었다. 심영의 집은 서울 재동(구 창덕여고)에 있었고, 심영은 제2고보(경복고)를 다녔다. 심영의 본명은 심재설(沈載卨)이었다. 팬들에게 상당한 팬레터를 받을 정도로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심영이 처음 무대에 선 것은 의정부공립보통학교 졸업하던 해였다. 심영은 제2고보(경복고) 시절에도 연극에 취미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YMCA의 조선무용, 서양 무용 등의 강좌에도 참여했다. 당시 학칙으로는 허가받지 않은 사회활동은 퇴학 사유에 해당했기 때문에, 이것이 빌미가 되어 심영은 일인 교사에 의해 퇴학을 당하게 되었다.

퇴학당한 후 심영은 도일하여, 몇 해 동안 연극, 무용에 전념했고, 귀국 후에 몇 번의 연극발표회에 참여했다. 그가 배우가 된 것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심영은 한 설문(『조광』)에서 자신이 배우가 된 이유를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다툼 끝에 배우가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또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도일하기 직전부터 박제행으로부터 “배우만 되면 크게 출세한다”는 자극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심영의 무대 데뷔작에 대해서는 증언이 다소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연극 작품 〈즐거운 인생〉과 〈초생달〉 출연이다. 두 작품은 1929년 11월 1일부터 6일까지 조선극장에서 영화 상연 사이에 공연되었다. 〈초생달〉에서 심영은 ‘노예 역’을 맡았는데, 눈 위에서 한 시간씩 떠는 역할이었다. 심영은 연극 무대에서 주로 토월회 계열의 배우로 활동하였다.

작품 세계

심영이 영화에 데뷔한 것은 1931년이다. 심영은 〈수일(守一)과 순애(順愛)〉에 출연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한 관련 기록에서 심영의 이름을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아마 심영의 배역이 미미했기 때문일 것이다. 심영의 증언대로(『삼천리』) 이 작품에 출연했다면, 〈수일과 순애〉는 심영의 영화 데뷔작인 셈이다.
심영이 다음에 출연한 영화는 1931년 11월 개봉작 〈방아타령〉이었다. 심영의 본격적인 데뷔작인 〈방아타령〉은 김소영‧이경선‧박제행‧심영‧김선영 등이 출연하였고 엑스트라 3백 명이 동원된 작품이었다. 이경선(방국 역)과 김소영(항아 역)이 헤어지는 연인 역할을 맡았고, 심영은 도망치는 방국을 도와주는 ‘어부’ 역으로 출연했다. 관군에게 쫓기던 방국은 헌신적인 어부를 만나 목숨을 구하게 되는데, 이 어부는 일면식도 없는 방국을 돕고 장렬하게 죽음을 맞는 역할로, 극적 필연성을 갖춘 배역으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심영은 이 역할로 본격적인 영화배우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방아타령
방아타령

1933년 5월 개봉된 〈아름다운 희생〉을 평하면서 김유영은 심영의 연기에 대해 언급했다(『조선일보』, 1933년 6월 9일). 심영은 “조흔 얼굴이다만은 영화배우로서는 부자연한 점이 만헛다. 언제나 무대에서 하든 행습(行習)이 보히는 데외 ‘따그라쓰’나 나웅 군 간의 독특한 동작(動作)을 더러 흉내내는 데서는 불쾌함을 느겻다 그러나 조흔 감독을 만나면 성공하리라고 밋는다.” 이러한 평가를 참조하면, 당시 시점에서 심영은 독창적인 연기 비결이나 노하우를 완성하지는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1935년 이규환이 감독하고 심훈과 현순영이 출연한 〈바다여 말하라〉가 개봉되었다. 이 작품은 해금강까지 로케이션을 단행한 대작으로, 젊은 남녀의 애정편력을 그린 청춘물이었다. 각본은 안석영이 맡았고, 출연진은 현무영, 심영, 박제행, 서월영 등이었으며, 김영식(金永植) 제작으로 2500원이 출자되었다. 심영은 이 작품을 자신이 출연한 영화 중 ‘잘된’ 작품으로 꼽은 바 있다. 이후 그는 안종화 감독의 〈은하에 흐르는 정열〉에 출연했다.

1930년대 중반 심영은 동양극장 청춘좌에서 핵심 배우로 활약하다가, 중앙무대와 고협의 창단 멤버로 가담하였다. 고협은 고려영화협회의 자매단체로, 원활한 영화 촬영과 인력 공급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처음에 심영은 〈복지만리〉 촬영 팀에 속했다가, 고협의 실질적인 창단 주체가 되었으며, 한동안 고협을 운영하는 책임자의 위치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복지만리〉는 전창근 감독 귀국하여 만든 첫 번째 작품으로 만주 벌판을 배경으로 하여 유랑걸식하는 한민족의 비참한 상황을 그려낸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에는 네 명의 주요 인물이 노동자로 등장하는데, 이 인물들은 출연 배우의 성을 따서 강(姜)․주(朱)․심(沈)․박(朴)으로 명명되었다. ‘강’은 강홍식을, ‘주’는 주인규를, ‘심’은 심영을, ‘박’은 박창환을 가리킨다. 심영은 일터를 찾아 일본에서 무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무산에서 만주로 이주하는 ‘자유노동자’ 역할을 맡았고, 무산에서 만주로 이주할 무렵 ‘심’은 술집 작부 ‘옥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복지만리〉에서 그려내고 있는 만주 이주 현상은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입장과 유사하기 때문에, 친일극적 성향을 전면 배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고려영화협회의 만주 진출작으로 기획된 영화였고, 본격적인 친일 색채를 거론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작품이었다.

망루의 결사대
망루의 결사대

하지만 심영은 1943년에 친일영화 〈망루의 결사대(원제:望樓の決死隊)〉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인 친일협력자 명단에 오르게 된다. 해방 이후 심영은 박창환, 김양춘, 박영호, 박춘명, 박제행 등과 함께 ‘혁명극장’을 창립하여 운영하였으며, 권총 피습을 당한 후에는 민중극장을 창설하여 자신의 연기 이론과 철학을 펼쳐보이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남한에서 활동을 중단하고, 월북하여 북한의 연극영화 예술의 창건에 이바지하는 행보를 선택했다.

영화사적 평가

심영은 당대 대중극 배우와 차별화되는 장점을 지닌 배우였다. 일단 그는 대단히 지적인 배우였으며, 연기에 대한 배움과 자각을 통해 ‘내면 연기’의 중요성을 이해한 배우였다. 다양한 연기 경험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배우의 역할을 찾고자 애쓰는 배우이기도 했다. 황철과 함께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전반 조선의 연극계를 대표했던 배우였으며, 중앙무대/고협/혁명극장/민중극장의 실질적인 운영자로서 식민지 말기와 해방 공간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 대중 연극인이기도 했다.

호소력 있는 음색이 연기의 장점이었지만, 의외로 성대가 약하여 목이 자주 쉬었다는 이면적인 약점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발성과 선이 굵은 연기와 개인 스타일 그리고 강렬한 열정 등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은 배우였다. 그의 연기 스타일은 남성적인 스타일과 거시적 연기로 요약될 수 있다. 반면 그의 연기는 세부적이고 세심한 디테일에서는 약점을 보였다. 심영은 이러한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인정했고, 이를 보완 극복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궁극적으로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기론을 수용하려는 시도를 펼치기도 했다. 실제로 심영이 이 연기론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지만, 1940년대 후반 그의 연기 스타일이 정신적인 변모(프롤레타리아 연극 이념에의 동조)와 함께 변모하려는 징후를 보인 점만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작품 목록

〈방아타령〉(A Folk Song of the Mill(Bang-a-talyeong), 조선, 1931, 출연)
〈수일과 순애〉(Su-il and Sun-ae (Suilgwa sunae), 조선, 1931, 출연)
〈아름다운 희생〉(Beautiful Devotion (Aleumda-un huisaeng), 조선, 1933, 출연)
〈바다여 말하라〉(Sea, Talk to Me (Bada-yeo malhara), 조선, 1935, 출연)
〈은하에 흐르는 정열(비상)〉(Passion in the Universe (Eunha-e heuleuneun jeong-yeol), 조선, 1935, 출연)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Fooled by Love, Hurt by Money (Salang-e Soggo don-e ulgo), 조선, 1939, 출연)
〈복지만리〉( Miles Away from Happiness (Bok-ji-man-li), 조선, 1941, 출연)
〈망루의 결사대(원제:望樓の決死隊)〉(Suicide Squad of the Watchtower (Manglu-ui gyeolsadae), 조선, 1943,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