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아파스 농민 운동이란 무엇인가?

치아파스 농민 운동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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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파스(Chiapas) 농민 운동은 1994년 1월, 멕시코 남부의 치아파스에서 마야인들이 봉기했던 사건이다. 당시 새해를 맞아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은 치아파스의 군사 본부를 공격해왔다. 이들은 20세기 멕시코 혁명을 이끌었던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정신을 부르짖으며 '농지와 자유를'이라는 구호 아래 단결했다. EZLN은 정부 건물을 부수고 농지를 태우며 수감자들을 풀어주었다. 이 반란으로 최소한 135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그리고 1월 12일, 약 11일간의 전투 끝에 포격 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다음 달에는 EZLN 대표들과 멕시코 정부가 협상에 돌입했다. 양 진영 사이의 줄다리기는 좀처럼 쉽게 끝나지 않았다. EZLN은 전 멕시코인들의 인권과 자유 그리고 정의를 부르짖으며 정부의 개혁을 요구했고, 이의 일환으로 지방 자치와 서민층을 돕기 위한 농지 재분배를 안건으로 내세웠다. 1996년 2월, 양 진영은 산안드레스에서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정부 쪽에서 합의 내용을 이행하지 않으면서, 또다시 마찰을 빚게 되었다.

그동안 정부군은 치아파스에서 군사 작전을 전개했다. 1997년 12월 23일 정부군은 악테알 마을을 공격하여 45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대부분이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정부의 이러한 행동은 치아파스 마야인들의 반정부 감정을 고조시켰다. 그러나 농민 운동의 결정적인 원인은 지역 사회의 부의 불균형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정부의 자세였다. 사실 이 지역은 커피와 옥수수, 목재와 기름 등의 원자재들이 넘쳐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의 불균형이 심각한 곳이었다. 1990년 당시 이 지역 주민들 대부분이 영양 결핍을 앓고 있었으며, 주민의 42퍼센트는 깨끗한 물을 얻을 수조차 없었다. 또 전체 33퍼센트가 전력 공급을 받지 못했고, 전체 62퍼센트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정부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합의하자, 미국의 대농장과 경쟁하게 된 소작농들이 분개하여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농민 운동이 끝나고 10년이 지나도록, 치아파스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