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코베인

커트 코베인

커트 도널드 코베인(Kurt Donald Cobain), Kurt Cobain

그는 록의 시대를 다시 열었고, 다시 닫았다

요약 테이블
출생 1967년
사망 1994년
국적 미국
대표작 「Nevermind」(1991)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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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록의 순수성과 진정성에 대한 거침없는 질문
  2. 바보들아,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니야
커트 코베인
커트 코베인

1990년대를 대표하는 록 송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 1991년 너바나는 영원한 청춘의 송가가 될 이 노래로 지축을 뒤흔들었고 바로 그 순간 그런지 록(=얼터너티브 록)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그런지 신화의 중심에 서서 그 짧고도 장렬했던 대서사시를 써내려갔던 사나이 그 이름 커트 코베인. 1994년, 앞서 간 3J각주1) 의 뒤를 따라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록의 재단에 바쳐진 그는 너바나의 리더로서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였으며 다른 두 명의 멤버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사실상 너바나 그 자체였다.

록의 순수성과 진정성에 대한 거침없는 질문

커트 코베인은 1967년 미국 워싱턴주 애버딘에서 태어났다. 그가 여덟 살 때 부모님이 이혼을 했는데 이것은 어린 커트 코베인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그는 침울하다가도 가끔씩 난폭해지는 성격의 소년으로 변해갔다. 그는 미술에도 재능을 보였지만 정작 자신이 되고 싶어 했던 것은 위대한 록 뮤지션이었다. 학교밴드에 들어가 처음에는 드럼을 쳤지만 이내 기타로 악기를 바꿔 잡았다. 열네 살 생일 때 친구에게 부탁해 구한 125달러 짜리 중고 린넬 기타는 그의 인생을 결정해 버렸다. 기타는 그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으며 그럴수록 그는 기타 연주에 매달렸다.

1985년 크리스 노보셀릭(Krist Novoselic)과 함께 밴드 너바나를 결성한 그는 몇 번의 드러머 교체를 거친 끝에 채드 채닝(Chad Channing)을 받아들여 1989년 인디 레이블인 서브 팝 레이블을 통해 데뷔 앨범 「Bleach」를 발표했다. 하지만 얼마 후 드러머는 다시 데이브 그롤로 교체되었다.

1991년 메이저 음반사인 게펜 레코드로 소속사를 옮기고 발표한 2집 「Nevermind」는 두 말할 것도 없이 1990년대 그런지의 시대를 정의하는 단 한 장의 역작이며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앨범이다. 여기에 너바나의 대표곡인 〈Smells Like Teen Spirit〉 〈Come As You Are〉 〈In Bloom〉 〈Lithium〉 등이 대거 수록되어 있다. 특히 〈Smells Like Teen Spirit〉의 기타 리프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기타 리프 가운데 하나인데, 기본적인 코드 구성에 오버 드라이브와 디스토션이 잔뜩 걸린 사운드, 솔로를 최소화한 진행은 그런지 록의 전형을 보여준다. 1970년대 후반 맹위를 떨쳤던 펑크(Punk)의 정신과 기교적 단순성에 헤비메탈의 무겁고 거친 사운드를 결합시킨 그런지 록의 교과서라 할 만한 곡이다. 「Nevermind」는 순식간에 천만 장이 넘게 팔려나가며 빌보드 앨범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Nevermind」가 마이클 잭슨의 「Dangerous」를 누르고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올랐던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Nevermind」는 헤비메탈의 시대가 가고 그런지 록의 시대가 왔음을 알린 선언문이었으며 상업성에 물들어 타락해 가는 록에 새로운 길을 묻고자 했던 그런지 록이 마이클 잭슨으로 대표되는 주류 팝계에 내민 호방한 도전장이었다. 안타깝게도 여기에서 역설적인 비극이 싹텄지만 말이다.

1992년 여름 너바나가 레딩 페스티벌에서 유명 헤비메탈 밴드들을 모두 제치고 헤드라이너로 나섰던 것도 록의 역사가 기록한 의미 있는 한 장면으로 꼽힌다. 당시의 공연은 훗날 「Live At Reading」이라는 실황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너바나
너바나

〈Come As You Are〉 〈Rape Me〉 등을 담고 있었던 「In Utero」(1993)는 결과적으로 너바나의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이 되었다. 1994년 11월, 너바나의 MTV 언플러그드 실황을 담은 앨범 「Unplugged in New York」이 발표되었을 때 커트 코베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1994년 4월 그는 "기억해 주기 바란다. 점차 희미해져가기보다는 한 순간에 타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을……"이라는 유서를 남긴 채 머리에 엽총을 쏴 자살했다. 너바나를 필두로 소위 시애틀 4인방이라고 불리던 펄 잼, 앨리스 인 체인스, 사운드가든에다 스매싱 펌킨스까지 가세하며 얼터너티브 록이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하던 바로 그 시간, 커트 코베인은 자신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록의 순수성, 진정성과 자신이 그토록 비판하고자 했던 상업적 성공의 이율배반 사이에서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는 술과 약물 중독의 수렁으로 빠져들었고 그의 삶은 고통으로 채워졌다. 코트니 러브(Courtney Love)와의 결혼과 딸 프랜시스의 탄생이라는 짧은 행복도 끝내 그를 구원하지는 못했다. 그는 마침내 스스로 고통을 내려놓고 떠나는 길을 택했다.

유작 앨범 「Unplugged in New York」에 남겨진 1993년 11월의 공연에서 보이는 커트 코베인의 모습은(DVD로도 발매) 쓸쓸하고 처연하다. 창백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얼굴에선 결과론이지만 이미 체념의 빛이 보이는 듯하다. 당시 공연에서 너바나는 특이하게도 자신들의 히트곡과 함께 데이비드 보위의 〈The Man Who Sold the World〉를 연주했는데 그러면서도 무슨 이유에선지 밴드의 최고 히트곡인 〈Smells Like Teen Spirit〉는 연주하지 않았다. 그리고 불과 몇 달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찾고자 했던 순수와 뜻하지 않게 찾아온 성공 사이의 괴리는 마음의 평화를 허락하지 않았고 끝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바보들아,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니야

테크닉 면에서 커트 코베인을 대단히 훌륭한 기타리스트라고 보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모습의 기타 영웅과 조우하게 된다. 그는 결코 기타 영웅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겠지만. 커트 코베인은 아주 오랫동안 테크닉 지상주의에 빠져있던 기타리스트의 세계를 다시 음악적 영감과 창조의 영역으로 되돌려 놓았다. 마치 '바보들아,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니야'라고 일갈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탁월한 송라이터였다. 그리고 그의 기타 실력은 그것을 표현하는 데에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코드 진행은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지만 마냥 평범하지만도 않아서 때로는 유니크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Lithium〉에서 보여주는 강약을 조절한 다이내믹한 연주는 그의 연주력이 결코 녹록치 않은 것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다만 그에게는 과도하게 기술을 뽐낼 이유도 필요도 없었을 뿐이다.

커트 코베인은 유명 밴드들보다는 바셀린스(Vaselines)나 미트 퍼페츠(Meat Puppets)와 같은 인디 록 밴드들에게서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해왔고 그것은 사실이다. 위에서 말한 MTV 언플러그드 공연실황에서 이들의 곡이 다수 리메이크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이것은 그대로 입증된다. 하지만 그가 비틀스를 즐겨 들었으며 1970년대 팝 록 밴드들로부터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 또한 명백하다. 거칠고 야생적인 사운드에 다소곳이 숨겨져 있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그 증명서인데, 너바나가 큰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너바나의 음악을 두고 칩 트릭(Cheap Trick), 낵(Knack)의 1990년대 버전이라고 말하는 비유는 그래서 나온다.

커트 코베인은 특정 기종의 기타를 고집하지는 않았지만 주로 펜더사의 재규어와 머스탱 기타를 즐겨 사용했다. 머스탱 기타에 대해서는 "브릿지가 넓어서 음의 굴절이 잘 일어나고 그래서 노이즈를 만들기가 좋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재규어와 머스탱을 섞어서 특별 제작한 재그스탱 기타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재그스탱 기타는 지금도 커트 코베인의 시그너처 기타로 유명하다.

커트 코베인은 왼손잡이다. 그래서 그의 연주 모습은 같은 왼손잡이인 지미 헨드릭스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커트 코베인은 왼손잡이용 기타를 썼지만 때로는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거꾸로 들고 치기도 했다. 골초였던 그는 담배를 물고 기타를 연주하는 일이 잦았고 한 번의 공연에서 몇 갑씩의 담배를 피워대곤 했다. 때문에 담배를 물고 기타를 치는 그의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렸다.

커트 코베인은 이미 죽어서 전설이 되었다. 그가 태어난 애버딘으로 들어가는 이정표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Welcome To Aberdeen, Come As You Are' 이정표는 2005년에 커트 코베인을 기억하기 위해 그렇게 바뀌었다.

「Nevermind」(1991)
「Nevermind」(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