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인

가야인

伽倻人

김해 김씨와 훌륭한 철기 문화

목차

접기
  1. ‘삼국시대’와 ‘열국시대’
  2. 가야의 불가사의한 시조, 김수로왕
  3. 가야로 시집 온 인도 왕족 허황옥?
  4. 철갑 기병을 탄생시킨 가야의 뛰어난 철기 문화
  5. 신라보다 강했던 가야
  6. 가야가 남긴 유물

보통 우리는 한국 고대사를 삼국시대, 즉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활동한 시기라고 배운다. 하지만 삼국시대라고 해서 이 땅에 세 나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로 신라와 백제 사이 경상남도에 엄연히 다른 나라인 ‘가야(伽倻)’가 무려 500년 넘게 존속하고 있었다.

‘삼국시대’와 ‘열국시대’

사실 삼국시대라는 말도 엄밀히 따지면 틀린 말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말고도 수많은 나라들이 한반도와 만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동해의 외딴 섬인 울릉도에도 우산국이라 불리던 작은 나라가 있었고, 백제, 가야, 신라가 등장하기 전에는 그들의 영토에 마한, 변한, 진한이라는 다른 나라들이 활동했다. 또한 강원도와 함경도에는 동예와 옥저가 있었고, 고구려의 북쪽에는 그들보다 더 오래된 나라인 부여가 600년 가까이 존속했다. 제주도도 조선 초기까지 ‘탐라’라는 왕국이었다.

그렇다면 고구려나 백제, 신라만 부각시키는 삼국시대라는 말보다는 차라리 많은 나라들이 활동한 시기라는 뜻인 ‘열국시대(列國時代)’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아쉽게도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중국의 《삼국지》에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라는 명칭을 고집한 듯한데, 그 때문에 우리 역사를 보는 관점이 이상하게 꼬이고 말았다.

가야의 불가사의한 시조, 김수로왕

가야의 역사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나오기 전인 11세기 말, 고려에서 나온 《가락국기(駕洛國記)》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락국기》는 그 내용 중 일부만 《삼국유사》에 실렸을 뿐, 대부분은 사라지고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가야의 역사를 알기 위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봐야 한다.

가야사, 특히 가야의 시조 전설은 《삼국유사》에 더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는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 철저한 유교식 합리주의자였기 때문에 자기가 봐서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했던 신화나 전설들은 가급적 책에 넣지 않고 몽땅 빼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그나마 조금 낫다. 물론 일연도 우리 옛 신화나 전설을 전부 불교식으로 윤색해 버려, 우리가 읽을 때 내용을 잘 가려서 봐야 하지만, 그래도 남겨 준 것이 아예 빼 버린 것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겠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래 가야인들은 왕 없이 아홉 명의 추장인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이 각자 백성들을 다스렸다고 한다. 여기서 추장들의 이름 뒤에 붙는 ‘간(干)’이라는 단어가 어쩐지 눈에 띈다. 나중에 가야를 흡수한 신라도 ‘각간(角干)’이라는 관직명을 사용했다. 그런데 간은 몽골-투르크 계통 유목민들의 군주인 ‘칸’의 발음과 흡사하다.

혹시 가야의 백성들은 멀리 북방에서 내려온 유목민들의 후손이었고, 그래서 추장들의 이름 뒤에 모두 칸이라는 말을 달았으며, 그것을 한자로 옮긴 발음이 ‘간’이 아닐까?

여하튼 이렇게 촌락 단위로 살고 있던 백성들 앞에 후한의 광무제 시절인 서기 42년, 북쪽에 있는 구지산에서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 사람들이 모여들자,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황금 상자가 내려왔는데, 그 상자를 열어 보니 그 안에 6개의 황금알이 놓여 있었다. 그 상자를 아도간의 집에 놓았는데, 하루 뒤에 알을 깨고 여섯 명의 아이들이 나왔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은 그 아이들을 하늘이 보낸 성스러운 사람으로 여겨 높이 대접했다. 아이들이 자라자 그중 가장 맏이가 수로라는 이름을 받았고 나머지 다섯 아이들도 각각 마을의 촌장이 되었다. 그래서 수로를 포함한 여섯 형제들은 모두 6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6년 후인 서기 48년에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이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와 혼인하고 왕후에 오르는 일도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깨어져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옛날 멀리 인도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 남부인 경상남도로 와서 현지인과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 모두 신화나 전설에 가까워 믿기 힘들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을 잘 살펴보면 역사적 진실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그가 가야의 현지인이 아닌, 멀리 외부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것을 신화적인 기법을 빌려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사회에서는 외부에서 이주한 지배자를 하늘에서 온 사람이라고 신격화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또, 수로왕과 함께 온 다섯 명의 아이들은 가야 땅에 김수로와 함께 온 이방인 지배자들이 모두 6명이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즉, 가야는 처음부터 부족 연맹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가야의 6국은 지금의 고령에 있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진주의 고령가야, 고성의 소가야, 김해의 금관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등이다.

그중 수로왕은 금관가야를 다스렸는데, 금관가야가 위치한 김해(金海)의 ‘김’을 따서 김수로라 불리게 되었다. 수로왕이 통치한 금관가야는 서기 5세기 초 고구려의 침입으로 약화되기 전까지 가야 연맹체들의 맹주 역할을 했다. 금관가야가 약화되자 가야 연맹체의 맹주는 대가야로 바뀌었다.

가야로 시집 온 인도 왕족 허황옥?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이 가야로 배를 타고 이주하여 수로왕과 결혼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얼핏 믿기 힘들다. 그래서 허황옥의 이야기를 가리켜 허황된 전설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2009년 12월에 출간된 임정 작가의 소설 《뉴라이트》에서는 색다른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허황옥의 이야기가 사실을 반영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먼저 임정 작가는 소설의 본문 중에서 한림의대 김종일 교수와 서울의대 서정선 교수가 김해 예안리의 고대 가야인 고분에서 발굴한 DNA 채취 결과를 제시하며, 가야인과 인도인의 DNA염기 서열이 비슷하다는 주장을 했다.

또한 ‘가야’는 이름은 인도 남부의 드라비다족이 쓰는 말로 ‘물고기’라는 뜻인데, 수로왕과 허황옥의 전설이 담긴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물고기 문양은 드라비다의 영향을 반영하니, 허황옥이 가야로 왔다는 기록이 사실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책에서는 중앙대 음대 전인평 교수의 논문을 참조하여, 가야의 악성이라 불리던 음악가 우륵이 만든 곡이나 악기 가야금의 뿌리가 사실은 고대 인도 음악이라는 색다른 주장도 제시했다. 우륵이 만든 곡들은 모두 인도의 고대 문헌인 《나티야 사스트라》에 언급된 인도의 전통 음악인 ‘라가’와 구조가 같으며, 가야금과 장구 같은 악기들도 모두 인도의 전통 악기인 시타르에서 유래했고, 심지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노래인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도 인도 자장가와 음률이 똑같다고 한다.

즉, 우리가 고유한 전통문화라고 알고 있는 것들 중 상당수가 사실은 인도에서 유래했으며, 그것들의 전래 과정이 허황옥의 이주라는 하나의 전설로 압축된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이다. 달리 말하자면 허황옥으로 대표되는 인도인 집단이 한반도 남부에 들어와 정착해 살면서, 그들을 통해 인도 문화가 한반도에 전파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이와는 다른 주장도 있다. 허왕옥이 인도 아유타국 출신인 것은 맞으나, 그녀가 곧바로 인도에서 배를 타고 머나먼 한반도까지 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중국 남부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것이다. 이 증거로 허황옥이 죽고 나서 보주태후(普州太后)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보주는 중국 서남부인 사천성에 있는 지명이다. 그러니 허황옥은 인도에서 중국 서남부 보주로 이주했다가, 다시 동쪽으로 떠나 가야까지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확실한 증거가 부족하여 믿기 어렵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허황옥은 16세의 나이로 가야에 와서 곧바로 수로왕과 결혼하여 왕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으며, 서기 189년에 157세의 나이로 죽자, 이에 슬퍼한 수로왕도 10년 후에 158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부부가 모두 150세를 넘기다니 좀처럼 믿기 힘들다. 수로왕과 허황옥 부부의 사후, 그들이 다스린 금관가야의 왕위는 아들 거등공이 이어받았다.

철갑 기병을 탄생시킨 가야의 뛰어난 철기 문화

가야의 역사는 초기 부분과 신라에 멸망되었던 후기 부분을 제외하면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확실한 전개 과정을 알기 힘들다. 다만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가야의 유물들을 본다면, 가야는 훌륭한 철기 문화를 지녔던 것으로 파악된다.

가야의 철 문화를 상징해 주는 증거로 김해(金海)가 있다. 김해는 초기 가야 연맹의 맹주인 금관가야의 본거지인데, 한자 뜻풀이를 해본다면 ‘쇠(金)의 바다(海)’라는 말이 된다. 김해의 왕성한 제철 사업을 상징하는 표현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중국의 사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가야의 전신인 변한인들은 철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 낙랑과 왜국(일본)에 철을 수출했다고 한다. 가야인들도 변한의 기술을 물려받았는지, 철을 잘 다루었다. 한 예로 일본은 서기 5세기 전까지 모든 철을 가야에서 수입해 사용했는데, 철의 원료인 철광석을 가공하는 기술을 몰라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일본의 고대사를 다룬 《고사기(古事記)》나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왜(일본)가 신라를 공격했다는 내용은 수없이 나오지만 가야를 공격했다는 내용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가야와의 사이가 나빠지면 가야로부터 철을 얻을 수 없으니 왜인들이 가야의 눈치를 살피느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가야인들이 마음씨 좋은 자선사업가가 아닌 이상, 공짜로 왜국에 철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철을 수출하는 대가로 왜국으로부터 뭔가를 얻어왔을 것이다. 왜국이 가야의 철을 받는 대가로 가야에 제공하는 것이 있었을 텐데,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은 그것을 사람이라고 보고 있다. 고대의 왜국은 뛰어난 과학기술이나 엄청난 부를 가진 경제 대국도 아니었고, 그저 가진 건 사람뿐이었으니, 가야의 철을 받는 대가로 가야에 사람을 보내 노동자나 병사로 쓰게 했을 수도 있다.

가야인들은 철을 가공해 갑옷을 만들었는데, 가야가 있던 경상남도 지역에서 발굴한 유물들을 보면 실로 다양하다. 그중에는 15세기 서양의 플레이트 아머와 겉모습이 비슷한 판갑도 있으며, 여러 개의 철판 조각을 가죽 끈으로 엮어 만든 찰갑도 있다. KBS TV 〈역사스폐셜〉에서 다룬 덕분에 가야 갑옷, 하면 판갑이 유명하지만 사실 가야인들은 판갑과 찰갑 모두 만들어 사용했다.

또한 가야의 갑옷 중에는 사람만 입는 것이 아닌, 말에 씌우는 마갑(馬甲)도 있다. 그것은 가야인들도 사람과 말이 모두 갑옷을 착용하는 중무장 기병을 운용했다는 것을 뜻한다.

가야의 중무장 기병들이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해서는 관련 자료가 거의 없어서 뭐라고 확실히 단정 짓기는 어렵다. 다만, 신라 토기들을 보면 갑옷을 입은 중무장 기병이 창을 던지는 자세를 취한 모습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가야의 중무장 기병들도 말 위에서 적을 향해 창을 던지며 싸웠을 것이다. 북방 유목민인 선비족이 중국에 내려와 나라를 세운 5호16국 시대 이전까지 고대 동양의 기병들은 대부분 돌격보다는 원거리 사격을 중시하는 전술을 택했다.

2005년 8월 5일, 〈역사스페셜〉에서 방영한 내용에 따르면 가야에도 여전사들이 있었다고 한다. 가야 고분에서 갑옷과 무기를 갖추고 매장된 여성 유골 세 구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추정한 내용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인종을 막론하고 여자들의 육체적 힘은 남자보다 약하다. 하물며 고대 전쟁은 지금과는 달리 거의 사람의 힘만으로 이루어지는데, 과연 여자들이 무장을 했다고 해서 남자들보다 더 잘 싸울 수 있었을까? 물론 여자가 쏘는 활이나 휘두르는 창칼이라고 해서 맞으면 안 죽는 것은 아니다. 또, 실제로도 거란이나 몽골 같은 북방 유목민들은 여자들이 군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자들만을 전문적인 전투병으로 배치한 사회가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아마 무장한 채로 매장된 가야 여성들은 전문 여전사라기보다는, 급박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여자들만이라도 호신을 위해 무장을 해야 했던 현실을 반영한 증거일 것이다.

신라보다 강했던 가야

수로왕이 살아 있을 당시 가야는 신라보다 강한 나라였다. 서기 102년, 신라 인근의 작은 나라인 음즙벌국과 실질곡국이 국경 분쟁을 벌이다 신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신라의 통치자인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112)은 이 문제를 가야의 수로왕에게 넘겼다. 수로왕은 음즙벌국의 편을 들었고, 그의 도움으로 골치 아픈 문제가 처리되자 파사이사금은 답례로 신라의 6부를 통해 수로왕을 위한 잔치를 열어 주었다.

자신을 찾아온 이웃 나라들의 분쟁을 해결하는 데 외국인 가야에게 도움을 청한 것을 보면, 파사이사금은 자신보다 가야가 더 국제적으로 강한 나라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서기 209년, 낙동강 하류에 있던 8개 나라들의 연맹체인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김해의 금관가야를 침략하여 6000명의 백성들을 납치해 가자, 금관가야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들에게 복수하지 못하고 신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금관가야의 요청을 받은 신라의 내해이사금은 태자인 우로와 신하 이음을 보내 포상팔국 군대를 격파하고 금관가야 백성 6000명을 모두 구출하여 본국으로 귀환시켰다.

음즙벌국과 실질곡국의 국경 분쟁 사건이 있은 지 거의 100년 만에 가야와 신라의 위상이 바뀐 것이다. 100년 전에는 신라가 가야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제는 가야의 맹주인 금관가야가 신라에 도움을 청했다. 1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나라의 국력에 차이가 생긴 것이다. 어쩌면 이는 통합된 중앙집권적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연맹체에 머물러 있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결과가 아닐까 한다.

그 후 가야의 사적은 한동안 드러나지 않다가 서기 404년 다시 역사에 등장한다. 당시 가야는 왜와 손잡고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를 큰 위기로 몰아넣었는데, 광개토대왕비에는 이때의 상황을 가리켜 “온 나라(신라)에 왜구가 가득하여 신라가 망할 정도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친히 5만의 군대를 이끌고 번개같이 남하하여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크게 섬멸했다. 왜야 다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그들의 고향으로 도망치면 그만이었으나, 도망갈 수 없었던 가야는 고구려군에게 철저하게 짓밟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그동안 가야의 맹주였던 금관가야는 고구려에게 받았던 타격이 너무나 커서 맹주 자리를 대가야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금관가야보다 비교적 세력을 온전히 보존했던 대가야는 서기 479년 하지왕(荷知王) 때 중국 남제에 사신을 파견해 외교 관계를 맺고, 481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신라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522년, 신라의 법흥왕은 신하인 이찬 비조부의 여동생을 대가야 이뇌왕(異腦王)에게 시집보냈다. 이뇌왕은 신라 여인을 왕비로 삼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인 월광태자가 태어났다.

하지만 신라와의 혼인 동맹은 가야 연맹을 강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약화시켰다. 7년 후인 529년, 가야에 속해 있던 작은 나라인 탁기탄국이 신라에 항복해 버린 일이 발생했다. 또한 532년에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역시 신라에 항복했다.

어째서 이 나라들은 신라에 주권을 넘겼던 것일까? 자료가 적어 알기 어려우나, 아마 백성들이 나라 밖으로 도망치는 등의 일이 겹치고 갈수록 세력이 쇠약해지면서 신라의 압력을 더는 견디기 힘들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에 귀순한 구해왕의 세 번째 아들인 김무력은 신라 귀족 사회에 편입되었고, 이후 신라군을 이끌며 가야인들을 정복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그는 553년, 백제와 가야, 왜의 연합군을 관산성 전투에서 크게 무찌르고 백제 성왕을 죽이는 어마어마한 전과를 올렸다. 가야의 자손이 가야인들을 쳐부순 셈이다.

관산성 전투의 패배로 인해 가야 연맹의 세력은 큰 타격을 받고 더욱 위축되었다. 560년에는 가야 연맹에 소속된 작은 나라인 안라국이 신라에 항복했다. 그리고 2년 후인 562년에는 신라 진흥왕이 보낸 신라군이 대가야를 침공하여 멸망시켰다. 당시 대가야는 도설지왕(道設智王)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뇌왕과 신라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월광태자였다. 참으로 비정하게도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피가 섞인 대가야마저도 멸하고 만 것이다.

대가야가 망하자 다른 가야 연맹체들도 얼마 못 가 모두 신라에게 흡수되었다. 그리하여 약 500년 넘게 존속해왔던 가야의 역사도 끝나고 말았다.

가야가 남긴 유물

오랜 세월 동안 존재했으나, 안타깝게도 가야인들이 남긴 기록은 대부분 사라지고 그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던 신라나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만이 전해진다.

하지만 가야인들의 후손에 관한 기록은 다행히 역사서에 보인다. 가야가 망하자 가야인들은 크게 두 패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신라의 지배를 받아들이며 신라에 흡수되는 길을 택한 쪽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바다 건너 멀리 왜국으로 이주한 쪽이다.

신라에 귀순한 가야인들 중 일부는 신라 상류 사회에 편입되기도 했다. 그중 한 사람이 앞에서 언급한 김무력이다. 김무력의 손자가 바로 우리들도 잘 알고 있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 장군이다. 김유신은 자신이 가야 왕족의 후손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그가 젊었을 때는 가야 유민들이 찾아와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또한 가야금을 만든 음악가인 우륵도 신라에 항복한 가야인이었다. 신라 진흥왕은 우륵이 연주하는 음악을 좋아하여 그를 가까이 두었는데, 이를 시기한 신라의 신하들이 “우륵은 망한 나라 사람인데, 그를 총애함으로 인해 자칫 망국의 일을 되풀이 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언한 일은 교과서에도 나오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한편 신라를 거부하고 왜국으로 떠난 가야인들은 왜인들에게 제철 기술을 전파했다. 이를 ‘타타라’라고 부르는데, 모래를 녹여 그 속에서 철 성분을 뽑아내어 철을 만드는 사철 제조 기술이다.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칼인 일본도도 이 타타라 제조 기술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가야가 우리에게 남긴 자취는 결코 적지 않다.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성씨는 김(金)이었는데, 그는 오늘날 한국 최대의 성씨인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김해 김씨를 쓰는 인구는 400만이나 된다고 한다.

물론 김해 김씨 성을 쓰는 사람들이 전부 김수로왕의 후손이라고 하기는 어려우나, 상징적으로도 그들이 김수로왕의 자손이라고 본다면, 비록 가야는 신라에 흡수되었으나 그 자손들은 아직도 왕성히 남아 활동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