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국인

우산국인

于山國人

신비한 울릉도의 선주민들

목차

접기
  1. 신라는 왜 울릉도를 정복했을까?
  2.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신비의 섬, 혹시 우산국?
  3. 다큐멘터리 〈우산국〉, 우산국의 신비를 파헤치다
  4. 울릉도 현지 전설, 우해왕과 풍미녀
  5. 무인도에서 삶의 터전으로

우리에게 울릉도는 어떤 곳일까? 호박엿, 오징어, 그리고 독도 옆에 있는 섬. 이것들이 울릉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울릉도에는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고 그로 인해 풍부한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울릉도는 삼국시대에 우산국(于山國)이라고 불리었는데 서기 512년, 신라 장군 이사부에 의해 정복당했다고 한다.

신라는 왜 울릉도를 정복했을까?

《삼국사기》의 우산국 관련 내용은 너무나 간략하여 그 전말을 알기 어렵다. 우선 《삼국사기》를 보면, 대체 무엇 때문에 신라가 굳이 뱃길도 험하고 풍랑이 거세어 항해하기도 힘든 우산국에 군대를 보내 정복하게 했는지, 그 이유가 나와 있지 않다.

오늘날도 울릉도는 작은 섬인 데다 물산이 그리 풍부하지도 않다. 하물며 옛날에는 어떻겠는가. 사람들이 살기에 지금보다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작고 가난한 섬을 신라는 왜 애써 군대를 파견해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켜야 했던 것일까? 무슨 이유가 있었을까? 이 질문에 《삼국사기》는 침묵하고 있다.

이렇듯 《삼국사기》만 보면 대체 왜 우산국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졌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우산국에 대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삼국사기》 말고도 다른 여러 자료들을 같이 보아야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신비의 섬, 혹시 우산국?

서기 3세기, 중국 진나라 학자인 진수가 쓴 역사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실려 있다. 246년, 중국 위나라 장수인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하면서 지금의 동해와 인접하고 있던 동옥저(함경북도 지역)까지 쳐들어갔는데, 바닷가에 사는 노인들에게 “저 바다 건너에도 사람들이 사는가?”라고 묻자 노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어부들이 바다에서 일하다가 풍랑에 휩쓸려 동쪽에 있는 어느 섬에 표류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의 원주민들은 우리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섬의 원주민들은 칠석날이 되면 소녀를 바다에 빠뜨렸다.”

그리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이와 관련하여 다른 기사도 실려 있다.

옥저 동쪽의 바다에 여자들만 사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 사람들이 입는 옷소매는 길이가 3길(약 9m)에 이르며, 목에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해안가에 표류해 왔는데, 음식을 먹이려 했으나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굶어 죽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소개하고 있는 곳은 동해에 있는 섬나라이다. 두 가지 단락을 요약해 본다면, 그 섬나라는 여자들만 살고 있고 옥저 주민들과는 전혀 말이 통하지 않으며 옷소매가 길었고 목에 사람 얼굴 모습의 문신을 새겼으며 칠석날에 소녀를 바다에 빠뜨리는 풍습을 지녔다. 이 신비한 섬나라는 대체 어디일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이 동해의 섬나라가 정확히 어느 곳에 있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시기나 위치 등의 정황을 볼 때, 여기서 말하는 섬나라가 지금의 울릉도에 위치했던 우산국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동해에 있는 아름다운 섬 울릉도
동해에 있는 아름다운 섬 울릉도

다큐멘터리 〈우산국〉, 우산국의 신비를 파헤치다

2000년 8월 25일, 포항 MBC에서는 특집 다큐멘터리로 〈우산국〉을 방영했다. 다큐멘터리에서 밝혀진 우산국에 관한 정보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고분에서 마구가 발굴되었고, 그로 인해 우산국에 말을 타고 다니는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 신라 양식의 황금 왕관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우산국이 512년 신라 장군 이사부에게 멸망당한 이후에도 신라에서 통치자를 보내 다스리게 했다.

3. 울릉도에서 1998년 고인돌이 발견됨에 따라 최소한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그리고 이 밖에도 더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신라에 정복되기 이전 우산국은 ‘우해(于海)’라 불리던 왕과 그 왕비인 풍미녀란 여인이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말하는 여자들만 산다는 섬나라가 우해왕의 우산국이라면 어째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우해왕은 풍미녀라는 여성을 왕비로 삼았으니 엄연히 남자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혹시 우해왕으로 대표되는 우산국 주민들은 원래 울릉도의 토착민이 아니라, 외부에서 배를 타고 울릉도에 쳐들어와, ‘여자들만 산다던’ 원주민들을 죽이거나 몰아내고 섬을 차지한 침략자들이 아니었을까?

우해왕에 얽힌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으며 울릉도 현지에만 전해 내려온다.

울릉도 현지 전설, 우해왕과 풍미녀

울릉도에는 옛날 우산국의 마지막 왕이라는 우해왕에 얽힌 전설이 여러 유적에 관련되어 전해 내려온다. 그 전설은 주민들의 구전을 통해 이어졌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대마도의 왜구들이 우산국에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자 분노한 우해왕은 군사들을 가득 태운 배를 이끌고 직접 대마도로 가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집을 불태웠다. 그러자 겁을 먹은 대마도 영주는 ‘풍미녀’라는 자기의 딸을 우해왕에게 주는 대가로 화해를 요청했다. 풍미녀는 매우 아름다웠고, 그녀를 본 우해왕은 사랑에 빠져 대마도 영주의 제안에 응했다.

풍미녀를 데리고 우산국으로 돌아온 우해왕은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백성들을 동원해 호화로운 궁궐을 짓게 했다. 하지만 풍미녀는 궁궐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아 우해왕을 계속 독촉했다. 그래서 우해왕은 신라의 해안가에 상륙하여 많은 보물들을 약탈해왔다.

우산국의 침입에 분노한 신라 왕은 이사부 장군을 보내 우산국을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바다에서 살아 뛰어난 수전 실력을 가지고 있던 우산국 병사들은 나약한 신라 수군을 손쉽게 물리쳤다. 이사부도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신라로 돌아온 이사부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이사부는 왕에게 앞으로 한 번만 기회를 더 달라고 애원하여 겨우 살아남았다.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모면한 이사부는 배를 만들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면서 우산국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한편 승리한 우해왕은 기고만장하여 연일 잔치를 벌이며 즐거워했다. 그러던 중 풍미녀가 아이를 낳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우해왕은 크게 슬퍼하며 그녀의 영혼을 위해 비파를 타게 하고 제사를 지내며 나랏일을 돌보지 않아 백성들이 걱정을 했다.

이윽고 이사부는 지난번보다 더 많은 배와 병사들을 거느리고 우산국으로 쳐들어왔다. 우해왕은 직접 나서서 병사들과 함께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신라군이 워낙 많아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승세를 차지한 이사부는 우산국 사람들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배 안에 싣고 온 무서운 짐승인 사자들을 풀어서 모조리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지쳐 있던 우산국 사람들은 이사부의 거짓 협박에 속아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우해왕은 우산국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이사부에게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협상을 했다. 우산국 백성들은 살아남았지만 우해왕은 바다로 몸을 던져 자결했다. 그 이후부터 우산국은 신라의 땅이 되었다.

이것이 울릉도의 우해왕 전설이다. 《삼국사기》에는 전혀 찾을 수 없으나, 이 전설을 이사부 기사와 비교하면 확실히 수수께끼가 풀린다.

신라가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우산국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우산국이 먼저 신라를 침입해 노략질을 일삼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원정을 단행한 것이라고 설명한 전설의 내용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신라의 원정은 자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우산국을 정복함으로써 안전을 도모하려는 계획에서 비롯된 일이었던 것이다.

무인도에서 삶의 터전으로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된 이후로도 주민들은 계속 그곳에 살았다. 오늘날까지 울릉도에서 발굴되는 토기나 고분들은 6세기 중엽 이후의 것들이 많은데, 신라는 울릉도를 손에 넣고 나서도 나름대로 상당한 정성을 기울여 관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울릉도는 동해의 한복판에 있어 울릉도를 손에 쥐고 있으면, 신라의 적국인 고구려와 왜가 바다를 통해 교통하는 것을 감시하고 견제하기에 편했기 때문이다.

신라가 무너지고 고려가 한반도를 통치하자 우산국은 고려에 복속되었으며, 그때부터 우산국이 아닌 울릉도로 불리게 되었다. 서기 930년, 울릉도 사람인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는 고려 태조 왕건을 방문하여 토산물을 바쳤다. 아마 울릉도의 유지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11세기에 들어오면서 울릉도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배를 타고 쳐들어온 여진족 해적들의 노략질에 시달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거나 잡혀가 거의 폐허가 되었다. 우해왕 전설에 나왔던 용감한 우산국 해적의 기풍은 이미 다 사라지고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1346년, 울릉도 주민들이 고려의 충목왕을 찾아왔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도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14세기 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등장하자 울릉도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1416년, 조선의 태종 이방원은 울릉도가 자칫 왜구의 소굴로 악용될 것을 염려하여 울릉도 주민들을 강제로 한반도 본토로 이주시켰다. 울릉도 백성들이 왜구에 붙잡혀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될 가능성을 우려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약 200년 동안 울릉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텅 빈 땅이 되었다.

그러던 1614년, 일본과 울릉도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이 일어나면서 다시 울릉도는 조선 조정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일본과의 울릉도 영유권 다툼은 결국 1697년에 해결되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안용복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대마도주와의 오랜 담판을 통해 울릉도가 조선 땅임을 확인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울릉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다. 그러다가 1882년, 고종 임금이 울릉도를 계속 무인도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자칫 일본이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울릉도에 백성들의 이민을 허락하는 정책을 펴게 되면서, 오랜만에 울릉도는 다시 사람들이 거주하는 삶의 터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