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저인

옥저인

沃沮人

온돌을 만들어 사용한 한반도 북쪽 사람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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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북옥저, 동옥저, 남옥저?
  2. 정직하고 순박한 사람들
  3. 온돌을 만들고 아편을 재배했던 옥저인
  4. 옥저인이 남긴 유산

함경도는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 분야에서도 변방으로 취급되어 왔다. 이 지역은 한반도의 오지라고 할 수 있는 동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데다, 지형도 험준한 산지가 많아 다른 지역 사람들이 드나들기 힘들었다. 그래서 조선시대까지 함경도는 “(나라의 끝인) 삼수갑산에 유배를 간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낯설고 이질적인 지역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함경도 지방에도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아왔고, 특히 옥저(沃沮)는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고대 부족국가로 우리 역사에 확실한 이름을 새겼다.

북옥저, 동옥저, 남옥저?

옥저는 한 군데에 있지 않았다. 중국 역사서인 《후한서》와 《삼국지》, 그리고 고려 때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을 보면 옥저는 북옥저, 동옥저, 남옥저 등 무려 세 곳에 있었다고 한다.

옥저의 위치를 그린 지도
옥저의 위치를 그린 지도

이 중 가장 처음 언급되는 북옥저는 기원전 28년,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에게 멸망당했다고 한다.(《삼국유사》) 그리고 동옥저는 서기 56년 고구려의 6번째 군주인 태조왕에게 복속당한 이후,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남옥저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아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북옥저와 동옥저만 다루기로 한다.

북옥저와 동옥저는 어떤 나라였을까?

《후한서》는 북옥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북옥저는 다른 말로 ‘치구루’라고 하며, 남옥저에서 800여 리 떨어져 있다. 그 풍습은 모두 남옥저와 같다. 남쪽 경계가 읍루와 닿아 있다. 읍루족들은 배를 타고 약탈하기를 좋아한다. 북옥저는 그들의 노략질을 두려워하여, 매년 여름마다 바위굴에 숨어 있다가 겨울이 되어 뱃길을 쓸 수 없게 되면 마을로 내려와 산다.

여기서 북옥저가 두려워한다는 집단인 ‘읍루’는 말갈족의 선조로 추정되는 이들이다. 말갈족은 훗날 여진족과 만주족으로 불리는데, 이들이 사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는 날씨가 서늘하고 척박하여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 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읍루족은 사냥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았으며, 그것으로도 식량이 부족하면 다른 부족이나 나라들을 습격해 약탈을 했다. 그런 이유로 읍루(=말갈=여진족)는 말을 타고 약탈을 하거나 배를 타고 강이나 바다로 나가 해적이 되기도 했다. 12세기 무렵에는 여진족이 동해에서 극성을 부려 울릉도 주민 대부분이 이들에게 잡혀가기도 했으며, 심지어 일본 규슈 지역까지 쳐들어가 노략질을 일삼기도 했다.

《후한서》에 따르면 읍루의 위치를 “부여의 동북쪽 1000여 리에 있으며, 동쪽으로 큰 바다에 접하고 남으로 북옥저와 접하며, 그 북쪽의 끝은 알 수 없다.”라고 설명한다. 이로 보건대, 읍루족은 만주의 동북부와 연해주 일대에 널리 퍼져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북옥저의 남쪽이 읍루족과 닿아 있고, 읍루족의 남쪽 경계가 북옥저라니 좀 이상하다. 보통 남쪽이 다른 집단과 맞닿아 있으면, 그 다른 집단은 북쪽 경계가 이웃 부족과 닿아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아마도 읍루족의 분포도가 일직선으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럼 동옥저의 위치는 어디일까?

《후한서》에는 동옥저가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으며, 동쪽은 큰 바다에 접하고, 북쪽에 읍루와 부여가 있고, 남쪽에 예맥이 있다. 그 땅은 동쪽과 서쪽이 좁으며, 남쪽과 북쪽으로 길게 뻗어 꺾으면 사방이 1000리이다.”라고 나온다.

《후한서》에서 말한 개마대산이란, 현재 함경남도의 개마고원이다. 그리고 동쪽의 큰 바다는 말할 것도 없이 동해이다. 북쪽을 말할 때, 지리적인 위치로 보면 당연히 북옥저가 언급되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부여와 읍루가 기록되어 있다. 동옥저가 등장할 무렵에 북옥저는 이미 소멸해서 언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처음부터 옥저가 북과 동 둘로 나뉘어 있던 게 아니라, 원래는 북옥저만 있었는데 고구려에게 망하자 그 유민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세운 나라가 동옥저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해서 확실한 사실은 알 수 없다.

《후한서》에 의하면 동옥저는 동쪽과 서쪽은 좁으나,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동옥저는 함경남도와 함경북도 일대에 걸쳐 주로 해안선을 따라 널리 뻗은 나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북옥저는 그 위치가 동옥저에서 약 800리 북쪽, 두만강 이북 오늘날 중국 흑룡강성 동남쪽, 연해주와 인접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북옥저 사람들은 읍루족들이 배를 타고 약탈을 하러 오지 못하는 겨울이 되면, 마을로 내려와 산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뱃길을 꼭 바다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연해주와 인접한 만주 동쪽에는 강이나 호수도 많기 때문에 읍루족들이 배를 타고 강과 호수를 건너 북옥저를 노략질하러 온다고 보는 편이 더 적합하다.

정직하고 순박한 사람들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옥저인들의 문화와 삶에 대한 기록이 간략하게나마 언급된다.

옥저 땅에서는 맥(貊)과 베, 물고기와 해초(미역) 등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다른 세 가지는 이해가 가지만, 맥이라니 뭘 말하는 것일까? 한자 ‘맥(貊)’의 뜻을 풀이하면 사나운 짐승인데, 표범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함경남도에는 최근 100년 전까지도 아무르 표범에 속하는 표범들이 꽤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옥저는 앞으로 바다, 뒤로 산을 접하고 있으며, 땅이 비옥하고 다섯 곡식(벼, 보리, 콩, 피, 기장)을 키우는 데 좋아 농사가 잘되었다고 한다. 함경도라고 하면 산투성이의 불모지로 알려져 있으나, 그래도 옛날에는 농사짓기에 좋았던 모양이다. 다만 소나 말은 그다지 많이 키우지 않아 목축보다는 농경을 더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다.

옥저인들의 성격은 정직하고 순박하면서 용감했다고 전한다. 우리 조상들을 떠올릴 때 연상되는 익숙한 모습이다. 그들은 이웃인 동예인들과 전투 방식이 비슷했는데, 기마전이 아닌 창을 주요 무기로 사용했으며 보병 전투에 뛰어났다. 아마 동예인들이 했던 것처럼 여러 명이 약 7m에 달하는 긴 창을 함께 다루며 싸우는 전투법도 배우지 않았을까?

그 밖에 옥저인들의 집이나 옷차림, 언어와 먹는 음식, 풍습들은 대체로 고구려와 비슷했다고 한다. 아마 고구려와 서로 이웃하여 지내다가 나중에는 그들에 흡수되었으니, 닮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옥저인들에게는 어릴 때 결혼을 하는 조혼 풍습이 있었다. 일단 부모들끼리 서로 자녀들을 결혼시키기로 약속하고서, 열 살 이전에 신부가 될 여자아이를 남편이 될 남자아이의 집으로 보낸다. 그리고 여자아이는 한동안 시댁에서 시댁 식구들과 함께 살다가, 어른이 되면 다시 친정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친정집에서는 시댁 부모에게 딸을 정식으로 시집보내는 대가로 지참금을 달라고 한다. 시댁 부모가 친정집 부모에게 지참금을 보내면, 그때 비로소 새색시는 시댁으로 가서 정식으로 혼인을 하고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이다. 일종의 민며느리 제도인데, 다분히 가부장적인 성격이 강하다. 아마 옥저는 농경 사회라 조금이라도 농사일을 도울 일손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가급적 일찍 자녀들을 결혼시켜 아이들을 낳게 했을 것이다.

옥저인들은 장례식을 치를 때, 일단 사람을 땅에 얕게 묻고 나서 살이 썩고 뼈만 남으면, 유골을 꺼내 약 3m 되는 커다란 나무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한 집안 식구들의 뼈를 모두 그렇게 해서 같은 나무 상자에 넣어 장사를 치렀다고 한다. 이런 가매장 풍습은 아직도 한국의 외딴 시골 지역에 남아 있다. 가족 간의 유대를 돈독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옥저의 총 가구 수는 5000호였는데, 인구는 약 2만5000명 정도 되었던 듯하다. 옥저 전체를 지배하는 왕은 없었고, 여러 마을마다 서로 다른 촌장[거수(渠帥)]들이 주민들을 다스렸다. 옥저가 고구려의 지배를 받게 된 이유도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고 마을들끼리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옥저가 고구려 지배하에 들어간 다음부터는 고구려가 파견한 관리인 대인(大人)들이 옥저 현지의 촌장들과 같이 다스렸다. 옥저인들은 고구려에게 매년 특산물인 표범, 베, 물고기, 해초 등을 바쳐야 했으며, 아름다운 여인들은 고구려인의 첩이나 하녀가 되었다. 대체로 옥저인들은 고구려인의 종으로 여겨졌다고 하는 기록 등으로 볼 때, 그다지 대우는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온돌을 만들고 아편을 재배했던 옥저인

아쉽게도 옥저에 대한 문자 기록들은 이 정도가 전부다. 이 밖에 옥저인들의 삶에 대해 더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을까? 다행히 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에 재임 중인 고고학자 강인욱 교수는 자신이 직접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만주 지역에서 현지 학자들과 함께 발굴에 참여하여 발견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춤추는 발해인》에서 옥저인들의 문화에 대해 서술했다.

주목할 만한 내용 중 하나는 옥저인들이 온돌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내용이다. 연해주 남부의 크로우노프카 문화 지역에서는 기원전 4~1세기 무렵의 온돌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옥저인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크로우노프카의 온돌은 지금과는 달리, 한쪽 벽면에 ‘l’자와 ‘ㄱ’자 형태로 고래를 넣어 집 안에서 음식도 조리하고 방 안에 열을 보내 집을 따뜻하게 데우며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옥저로부터 멀리 떨어진 몽골 초원, 즉 고대 흉노족의 유적지에서도 온돌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1950년대, 러시아 고고학자인 다브이도바는 흉노의 유적지를 발굴하다가 온돌을 찾아냈다. 또한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몽골과 스위스 고고학자들이 함께 발굴한 버러 성지에서도 온돌이 나왔는데, 그 모양새가 옥저 유적지의 온돌과 매우 닮았다. 아마 흉노족이 사는 영토로 이주했던 옥저인들이 만든 작품인 듯하다. 흉노는 이동만 하는 유목민으로 여겨졌으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고 그중 일부는 온돌이 깔린 집에서 정착 생활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옥저인들이 아편을 재배했다는 것이다. 강 교수의 말에 의하면 온돌이 발견된 크로우노프카에서 아편의 재료인 양귀비 씨앗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 옛날에 옥저인들이 아편을 마약으로 사용했던 것 같지는 않고, 아편을 통해 얻은 기름을 식용으로 쓰거나, 배가 아플 때 조금씩 떼어다 진통제로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깊은 시골에서는 복통이나 설사가 심할 때, 양귀비 열매에서 짜낸 즙을 조금 복용하여 고통을 치유하는 약으로 쓰고 있다.

옥저인이 남긴 유산

옥저는 통일된 고대 국가로 발전하지 못했고, 부족 연맹 수준에 머물러 있다가 끝내는 고구려에 흡수되어 사라져 버렸다. 더구나 그들은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다. 때문에 옥저의 시대로부터 거의 2000년이 지난 지금, 옥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옥저인들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옥저인이 만든 온돌은 그 이후의 고구려와 발해인들도 즐겨 사용했으며, 조선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생활에 깊숙이 남아 있다. 이것만으로도 옥저인들은 우리 역사와 문화에 큰 흔적을 남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