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의

사마의

진 고조 선황제 사마의, 司馬懿
요약 테이블
출생 179년
사망 251년

위나라의 정치가. 자는 중달로 흔히 사마중달이라고 불린다.
그의 손자 사마염이 훗날 삼국을 통일하고 진나라를 건국했다.
조조의 지략가로 활동을 시작하여 그의 후손인 조비, 조예, 조진, 조방을 보필했으며, 234년 오장원에서 제갈량의 군대를 물리쳤다.

삼국 시대의 진정한 승리자

후한 말 동탁이 정권을 찬탈하자 각지의 군웅 세력은 한나라 황실의 회복이라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할거하기 시작했다. 이어 조조의 위, 유비의 촉, 손권의 오가 대립하는 삼국 시대가 개막되었다. 삼국 시대는 수많은 영웅들이 명멸했던 시기로 약 60여 년간 이어졌다. 하지만 천하 통일을 위한 별들의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조조도, 유비도, 손권도 아니었다. 삼국 시대의 최고 수혜자는 바로 사마의였으니, 그는 위나라의 조조, 조비, 조예, 조방 등 4대를 보필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립했고, 그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삼국을 통일하여 진(晉) 왕조를 수립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사마의
사마의

사마의의 이름은 의(懿)이고, 중달(仲達)은 자이다. 그는 179년 하내(河內)에서 낙양령, 경조윤, 상서우승을 역임했던 사마방(司馬防)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마방은 후한 영제 때 후에 사마의의 주군이 되는 조조를 낙양 북부위로 추천했던 인물이다.

사마의는 사마방의 둘째 아들로 그를 포함한 사마 가문의 여덟 형제는 ‘사마팔달(司馬八達)’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사마의는 이들 중 가장 비범했다고 전하며,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후한의 정치가 최염(崔琰) 또한 그의 총명을 인정했다고 한다. 사마의는 명문가의 부유한 환경에서 병법과 무예를 익혔으며, 특히 유학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겼다고 한다.

사마의의 유명세는 인재 등용에 열을 올리고 있던 조조에게까지 전해졌다. 조조는 당장 그를 영입하려고 했지만 명문가 자제였던 사마의는 환관 가문 출신인 조조의 휘하에 들어가는 것을 마뜩잖게 생각해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하지만 조조는 사마의를 쉽게 포기하지 않고 그의 병이 사실인지 시험했다. 어느 날 사마의의 침소에 자객이 난입했다. 자객은 사마의의 목에 칼을 들이댔지만 사마의는 마치 중풍환자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자객은 조조가 보낸 사람으로, 이로써 사마의는 조조의 부름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208년 중국 북방을 통일하여 최강자가 된 조조는 승상에 올랐다. 조조는 천하 통일의 대업을 위해 더 많은 인재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사마의를 생각했고, 이번에는 그를 문학연으로 삼을 수 있었다. 208년 조조 정권의 문학연이 된 사마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황문시랑에 임명되었다.

208년 조조군은 적벽에서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과 대치했다. 사마의는 하급 관리인 주부로 참전했다. 적벽대전에서 사마의는 주목할 만한 공을 세우지 못했으며, 조조군은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에 패했다. 이로써 삼국 정립의 국면이 형성되었다. 북방으로 돌아온 조조는 213년 위공(魏公)에 책봉되었다. 215년 조조가 한중을 평정했을 때 사마의는 여세를 몰아 익주의 유비를 공격할 것을 건의했으나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처럼 사마의는 강압으로 조조에게 등용되었지만 중용되지는 못했다. 조조는 사마의가 마음속에 다른 큰 뜻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신임하지 않았다고 한다.

216년 조조는 위왕(魏王)에 올랐고, 사마의는 태자중서자가 되어 조비를 보좌했다. 사마의는 조조에게 둔전제를 실시하여 백성들이 농업에 전념할 수 있게 하고, 군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여 경제적 안정을 이룩하고, 군비를 확충할 것을 진언했다. 또한 219년 형주의 관우가 번성을 공격하여 우금(于禁)을 생포하고 방덕을 참수하는 등 조조가 수세에 몰렸을 때 정확한 정세 파악으로 조조를 위기에서 구해 냈다. 조조는 관우의 위세가 두려워 도읍을 옮기려 했으나 사마의는 손권의 군사를 이용하자는 계책을 내놓았다. 사마의는 손권에게 강남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관우의 후방을 공격하도록 해 번성의 포위를 풀 것을 조언했다. 이는 적중하여 조조는 천도를 하지 않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조의 위패
조조의 위패

220년 조조가 죽자 그의 아들 조비가 위왕의 자리를 이어받았고, 같은 해에 후한 헌제에게 선양받아 위나라의 황제로 즉위했다. 사마의는 조비에게 황위를 선양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헌제에게 올려 조비가 황제가 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224년 사마의는 위나라의 상서가 되었다. 조비는 사마의를 매우 신임하여 무군대장군에 봉하고 급사중, 녹상서사의 벼슬을 내렸으며, 원정 때는 사마의에게 내정을 맡겼다.

226년 병을 얻은 조비는 임종할 때 조진(曹眞), 진군(陳群), 조휴(曹休) 등과 함께 사마의를 보정대신으로 삼고, 태자 조예의 보필을 부탁했다. 조예는 위나라 2대 황제 명제로 즉위했고, 사마의는 표기대장군이 되었다. 227년 사마의는 오나라의 공격을 막아내고, 완성(宛城)에서 머물며 촉나라와 오나라를 감시했다. 같은 해 말 그는 제갈량의 1차 북벌로 발생한 신성(新城) 군수 맹달(孟達)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으며, 228년에는 위나라와 오나라의 전투에서 홀로 승리하여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조비
조비

230년 조예는 사마의를 대장군 정부대도독으로 임명하여 조진과 함께 촉나라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자연재해로 인해 곧 퇴각했다. 퇴각 도중 사마의는 기곡에 진을 치고, 조진은 사곡에 진을 쳤다. 촉나라의 공격을 받은 조진은 대패하여 231년 화병으로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조예는 사마의에게 복수를 명했고, 조진을 대신하여 전선에 도착한 사마의는 촉군의 도발에도 지구전을 고수하여 결국 양식이 떨어진 촉군이 퇴각하도록 만들었다.

234년 사마의는 오장원에서 제갈량의 군대와 대치했다. 40만 대군을 이끈 사마의는 촉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적의 군량이 떨어질 때까지 군사를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하며 다시 지구전을 구사했다. 제갈량은 사마의에게 부인용 머리 장식, 여자 옷 등을 보내 규방에 들어앉은 부인처럼 겁을 먹고 출전하지 않느냐며 사마의를 도발했지만, 사마의는 넘어가지 않았다. 얼마 후 제갈량이 병으로 쓰러져 진중에서 숨을 거두자 촉군은 스스로 퇴각했다. 촉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공을 인정받아 사마의는 태위에 임명되었다.

군악대
군악대

239년 조예가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로 죽자 태위 사마의와 대장군 조상(曹爽)은 그의 유언을 받들어 조방(曹芳)을 보좌했다. 조상은 사마의를 태부로 임명해 우대하는 듯했으나 실제로는 그의 병권을 박탈했다. 사마의는 병을 핑계 삼아 정쟁을 피하고 정변을 구상했다.

사마의는 아들 사마소(司馬昭)를 시켜 다른 나라로 망명한 사람들을 몰래 소집했다. 3천여 명의 사람이 모였고, 사마의는 이들을 낙양 근처에 분산 배치시킴으로써 비상사태에 대비했다. 248년 조상의 측근 이승(李勝)이 형주 자사로 임명되어 떠나면서 사마의의 상태를 염탐했다. 사마의는 두 하녀의 부축으로 몸을 겨우 가누고, 손을 떨어 죽을 흘리고, 이승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등 노쇠한 노인의 연기를 하여 조상을 방심시켰다. 이로써 사마의는 조상의 경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49년 조상은 어린 군주 조방과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을 자제하라는 책사 환범의 간언을 무시하고 호위병 몇 기만 거느리고 조방을 수행하여 명제의 묘인 고평릉을 알현했다. 사마의는 조상과 조방이 성을 비운 사이 정변을 일으켰다. 그는 태후의 명을 빌려 조상의 관직을 박탈하고 그 무리들을 제거했다. 사마의는 70세의 나이로 다시 승상이 되었고, 정변 이후 조정은 사마씨 세력이 장악했다. 이로부터 14년 후 그의 손자 사마염이 진(晋)나라를 건국하면서 삼국 시대는 종말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