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

제갈량

제갈공명, 諸葛亮
요약 테이블
출생 181년
사망 234년

삼국 시대 촉나라의 정치가. 자는 공명으로 흔히 제갈공명이라고도 불린다.
유비의 책사로 탁월한 지략을 이용해 적벽에서 조조의 대군을 크게 물리치고 형주를 차지했다.
221년 촉한이 건국된 후 승상이 되었으며, 유비 사후 여러 차례 위나라 정벌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전설이 된 책략가

제갈량은 낭야군(瑯邪郡) 양도현(陽都縣) 출신으로, 촉한 유비의 책사로 활약해 유비가 촉의 황제가 되자 그 공을 인정받아 승상에 올랐다. 유비가 천하 통일의 대과업을 이룩하지 못했으므로 그 또한 통일 중국의 재상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비와 촉에 대한 충의를 지키고 당당한 패자의 길을 선택했기에 중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제갈량
제갈량

제갈량의 자는 공명(孔明)으로 낭야군의 하급 지방관이던 제갈규(諸葛珪)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양친을 잃은 제갈량은 예장(豫章) 태수인 숙부 제갈현(諸葛玄) 아래에서 자랐다. 제갈현이 옛 친구인 형주 자사 유표에게 의탁할 때 그도 숙부를 따라 함께 갔다. 197년 서성 백성들의 반란으로 제갈현이 죽자, 제갈량은 형주 양양 근처의 융중산(隆中山)에 초가집을 짓고 살면서 농사와 독서를 하며 지냈다.

제갈량은 27세 때 황승언의 딸 황아추를 아내로 맞이했다. 황승언은 면남의 명사이자 유표와 함께 형주 최대의 가문인 채씨 가문의 친척이었다. 아내로 맞이한 황아추는 재능은 뛰어났지만 못생기기로 유명했다. 때문에 제갈량이 추녀인 황아추를 아내로 삼은 것은 그녀의 아버지 황승언을 염두에 두고 혼인을 이용하여 관직의 연줄을 얻으려 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출신, 가문, 계급을 따지는 풍조가 만연하던 당시 천하를 구하고 공적을 세우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던 그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실제로 제갈량은 황승언의 사위가 된 후 형주의 세력가와 명사로부터 관심을 받게 되었으며 평판도 높아졌다.

또한 당시의 양양은 형주의 정치·문화적 중심이었던 곳으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제갈량은 그곳에서 석도(石韜), 서서(徐庶), 맹건(孟建)과 같은 명사들을 사귀고 학문을 교류했다. 형주에서의 제갈량은 방덕이 그를 ‘와룡(臥龍)’이라고 표현했던 시기로, 그는 이 시절 유유자적하게 지내는 듯이 보였으나 실상 명성을 쌓고 시대의 변화를 읽으며 때를 기다렸다.

제갈량의 출사는 207년 유비를 만나면서 이루어졌다. 조조에게 패해 형주의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던 유비는 한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인재를 모으고 있었다. 서서의 추천에 따라 처지가 절박했던 유비는 제갈량을 직접 찾아 나섰다. 유비는 제갈량의 초가를 친히 세 번이나 방문했는데 두 번은 만나지도 못하고 세 번째에서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삼고초려
삼고초려

제갈량은 유비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관측한 정세를 피력하고 중원을 차지할 계책을 내놓았다. “북으로는 조조가 굳건하여 그와 더불어 싸울 수 없으며, 남으로는 손권이 강동을 3대째 지배하고 있어 백성들은 그에게 의지하고 현명한 사람은 이미 그의 사람이 되었으니 그를 도울 수는 있어도 도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형주의 유표와 익주의 유장은 백성을 보살피는 역량이 부족하고 서툴러 그들의 안위를 지켜 주지 못할 것이 분명하오니 먼저 형주와 익주를 취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십시오. 그 후 동쪽으로는 손권과 연합하여 북쪽의 조조에 대항하는 자세를 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로, 그는 더 나아가 근거지를 탄탄히 해 국력을 키운 다음 위나라에 난이 일어났을 때 공격하여 난을 평정하면 천하 통일의 과업을 이룩하여 한 황실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비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었으며 제갈량 또한 그를 성심으로 보좌할 것을 다짐했다.

융중대
융중대

208년 원소를 정벌한 조조는 형주와 동오(東吳)를 취하고자 기세등등하게 남하했다. 이때 형주 자사 유표가 죽고, 아들 유종이 조조의 대군이 두려워 바로 항복해 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괴멸의 위기에 몰린 유비는 제갈량을 오나라에 파견했다. 제갈량은 형주가 조조의 손에 넘어가면 오나라도 조조의 압력을 받아 결국 형주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이며, 손권과 유비가 연합하여 조조의 대군을 물리쳐야만 서로가 살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워 손권을 설득했다. 결국 손권은 주유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다.

하구에서 유비의 군사와 합류한 주유는 조조의 수군과 긴 대치 끝에 208년 말 적벽에서 화공으로 조조군을 크게 격퇴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일화처럼 제갈량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 손권과 유비 연합군에게 유리한 동남풍이 불게 한 일은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제갈량의 활약으로 손권과의 동맹이 성사되고, 적벽대전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적벽대전의 승리로 유비는 형주를 취해 근거지를 마련할 수 있었으며, 이로써 유비는 제갈량의 천하 통일 전략의 기초가 되는 삼국 정립의 기틀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214년 익주까지 취한 유비는 221년 촉한을 건국하고 제갈량을 승상으로 임명했다. 2년 후 유비는 오나라와의 전투에서 얻은 병이 깊어져 숨을 거두었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아들 유선과 뒷일을 부탁하며, 만약 유선이 촉한을 다스리기에 부족하다면 그 자리를 취해도 좋다는 유언을 남겼다. 제갈량은 유비의 유언에도 유선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당시 촉한의 불안정한 대내외적 상황을 수습하는 데 착수했다. 내적으로는 후주(後主) 유선을 보좌할 뜻을 확실히 표명하고 백성들이 생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으며 군대를 정비하는 한편 인재를 등용했다. 또한 법을 집행함에 있어 공정함을 잃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사는 일이 없게 했다. 한편 외적으로는 형주 소유권 문제로 깨진 오나라와의 동맹 관계를 회복시켜 위나라를 경계했으며, 남쪽 지역의 이민족을 평정하여 후방을 안정시켰다.

225년 제갈량은 후방의 불안 요소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남정(南征)에 나섰다. 유비가 죽은 후 남쪽에서 옹개(雍闓), 고정(高定), 주포(朱褒) 등이 모반을 일으켰고, 이에 제갈량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반란을 평정했다. 이때 옹개를 대신하여 왕이 된 맹획(孟獲)을 일곱 번 생포했으나 일곱 번 풀어주고 화친을 맺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맹획은 이 ‘칠종칠금(七縱七擒)’ 후 진심으로 제갈량에게 항복했다고 한다. 제갈량의 남정은 단순히 반란을 평정하는 것이 아니라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준비 단계이기도 했다.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배후를 튼튼히 할 필요가 있는데다 남정으로 풍부한 노동력과 재력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 이에 더해 남정에서의 승리는 저하되어 있던 군대의 사기를 상승시켰다.

227년 제갈량은 북쪽의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렸다. 이는 천하 통일에 대한 오랜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자 촉한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했다.

제갈량의 1차 북벌은 228년 봄에 이루어졌다. 제갈량이 먼저 기산을 점령하자 위나라의 남안(南案), 천수(天水), 안정(安定)은 곧 항복했다. 그러나 가정(街亭)에서 마속(馬謖)이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고 그릇된 군사행동을 하여 촉한군은 위나라군에게 대패했다. 제갈량은 패배의 책임을 물어 자신이 중용했던 마속을 목 베고 스스로 벼슬을 낮추는 등 1차 북벌을 실패로 마무리했다.

228년 겨울 군을 재정비한 제갈량은 유선에게 다시 출사표를 올리고 2차 북벌에 올랐다. 그는 진창(陳昌)을 포위했지만 위나라 장수 학소의 격렬한 저항으로 20여 일이 지나도록 점령하지 못했다. 그동안 위나라의 지원군이 합류하고, 군량 보급로가 끊겨 결국 제갈량은 철수를 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제갈량은 229년 촉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무도와 음평을 공격했으나 역시 대패했다.

231년 봄 제갈량은 북벌의 실패 원인을 물자 보급이 원활하지 못한 데 있다고 생각하고 농서 지방에서 보리를 재배, 수확해 군량을 확보했다. 그러나 위나라는 전투를 장기전으로 이끌었고 결국 제갈량은 한중으로 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네 차례에 걸친 북벌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북벌 실패 후 제갈량은 3년간 국력을 키워 30만 대군을 양성했다. 드디어 234년 봄 5차 북벌이 시작되었다. 제갈량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오장원에 진을 치고 위나라와 대치했다. 그러나 천운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제갈량은 위나라와 대치한 지 100여 일도 지나지 않아 병에 걸리고 말았다. 234년 8월 제갈량은 천하 통일의 뜻을 뒤로한 채 군영에서 54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이후 촉한은 더 이상 북벌을 시도하지 않았고 끝내 위나라에 멸망당했다.

제갈량의 뛰어난 재능과 반복된 노력에도 그의 북벌이 성공하지 못한 데는 다양한 이유들이 제시된다. 대표적으로 촉한과 위나라의 현격한 국력 차이, 촉한의 인재 부족에 더해 제갈량의 군 지휘 능력과 임기응변 부족, 조심스럽고 완벽을 기하는 성격 등이 꼽힌다. 하지만 지략과 정세 파악 능력이 뛰어났던 제갈량이 북벌에 불리했던 촉한의 객관적인 사실까지 간파하지 못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그가 다섯 차례나 북벌을 감행한 데는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인 위나라의 멸망보다는 유비의 죽음으로 세력이 약해진 촉한의 존재를 대외적으로 알리고, 국력을 신장시켜 촉한을 유지하고자 한 이유가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