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조조

조위 태조 무황제 조조, 曹操
요약 테이블
출생 155년
사망 220년

삼국 시대의 군웅 중 한 사람으로 위나라를 세웠다.
황건적의 난을 평정하면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196년 후한 헌제의 후견인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병법과 임기응변에 능해 난세의 간웅이라 불렸고, 아들 조비가 황제에 오르면서 위나라 태조 무황제로 추존되었다.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2세기 중엽부터 외척과 환관의 세력 다툼으로 흔들리기 시작하던 후한의 정치는 폭정으로 치달았다. 결국 184년 민중들의 생활이 황폐해지자 장각(張角)이 민중을 선동하여 ‘황건의 난’이라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후한 말기의 불안정한 정국 속에서 각지에서 할거하던 군웅들이 패권 다툼을 시작했다. 이 싸움은 손권(孫權), 유비(劉備), 조조(曹操)가 천하를 삼분하여 다스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후한 시대는 막을 내리고 위, 촉, 오의 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조조
조조

손권은 강동 지역 명문가의 후손으로 주유(周瑜), 노숙(魯肅) 등의 보좌를 받아 오(吳)나라를 세웠다. 유비는 전한 경제의 아들 유승(劉勝)의 후손으로 의형제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도원결의를 맺고, 제갈량(諸葛亮)을 등용하여 사천성 지역에 촉한(蜀漢)을 건국했다. 후한 말기 각지에서 일어난 국가들 중 가장 강성했던 나라는 화북 지역의 위나라였다. 위나라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 바로 조조다. 그는 탁월한 군사 전략과 뛰어난 인재들을 규합하여 삼국의 영웅들 중 단연 독보적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조조의 자는 맹덕(孟德), 아명은 아만(阿瞞)으로 패국(沛國) 초현(譙縣) 출신이다. 원래 성은 하후(夏侯)인데 부친 조숭(曹嵩)이 후한의 대환관인 조등(曹騰)의 양자가 되면서 조씨가 되었다. 조조는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고 기민했으며 임기응변에 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다소 방탕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이라 사람들은 그가 뛰어난 인물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양나라 출신의 태위 교현(橋玄)이 조조를 만난 후 “나는 세상의 인재들을 많이 만나 보았지만 자네처럼 뛰어난 인물은 아직 보질 못했네.”라고 말했을 뿐이다.

조조는 흔히 ‘난세의 간웅’으로 일컬어진다. 이 말은 조조가 당대 명망을 떨쳤던 인물 비평가인 허소(許昭)에게 자신이 어떤 인물인지 묻자 그가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고 답했다는 일화에서 유래했다. 이때 보통 사람이라면 벌컥 화를 냈겠지만, 조조는 오히려 어느 쪽이든 결국 천하를 움직이는 것이 자신이니 이름 없이 죽어갈 바에야 간웅이 낫다면서 웃었다고 한다.

174년 조조는 스무 살의 나이에 효렴(孝廉, 효제충신 사상에 기초하여 효자를 지방 관원으로 채용하던 고대 중국의 제도)으로 천거되어 낭관이 되었고, 곧 낙양 북부위를 역임하게 되었다. 조조는 이때부터 여러 서적을 공부하고 특히 병법을 열심히 연구했다. 낙양 북부위로 일하면서 조조는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기로 유명했다. 야간통행금지령을 실시하여 위반하는 자에게는 10대의 태형을 내렸고, 죄질이 나쁜 자는 때려죽이는 형에 처했다. 당시 큰 권력을 휘둘렀던 환관의 숙부가 이를 어겼을 때도 조조는 지위를 막론하고 법을 집행하여 결국 그를 때려죽이게 했다.

184년 외척과 환관의 전횡에 생활이 곤궁해진 백성들은 스스로 황건적이 되어 난을 일으켰다. 후한 영제는 황후의 오빠인 하진(何進)과 대책을 논의하고 각지에서 군대를 모집했다. 조조는 기도위에 임명되어 영천(潁川)에서 황건적의 장수 파재(波才)를 물리치는 공을 세워 제남(濟南) 지역의 상(相, 지방관)으로 승진했다.

189년 후한의 영제가 승하하고 하황후 소생의 황자 변이 소제로 즉위했다. 이에 하황후와 하진 일파는 후궁인 왕씨 소생의 황자 협과 그를 둘러싸고 있던 시어머니 동태후, 당시 최대 실권자였던 건석과 대립하게 되었다. 하진은 건석을 제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태후가 병사하면서 투쟁은 일단락되었다. 원소는 그다음으로 여러 대에 걸쳐 선비와 지방 호족 세력을 억누르던 환관 세력들을 모조리 제거하려고 했으나 섭정인 허황후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에 이들은 각지의 호족들을 끌어모으고자 했으나 위기를 느낀 환관들의 계책으로 하진이 살해되고 말았다. 하진의 죽음에 원소는 사촌 동생 원술(袁術), 부장 오광과 함께 환관들을 모두 죽였다. 이 틈에 황제 형제는 십상시 장양과 단규와 함께 궁궐을 빠져나왔지만 추격을 받는 도중에 장양과 단규가 자결하고 말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황제 형제는 정세를 관망하다 낙양으로 오던 동탁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로써 동탁의 시대가 열렸다.

189년 동탁은 소제를 폐위시키고 황제의 동생 협을 헌제로 옹립하고 승상에 올랐다. 원소는 낙양을 떠났고, 원술도 남양으로 갔으며, 조조는 진류로 갔다. 동탁의 위세는 황제를 넘어섰고, 폭정과 독재에 백성들은 물론 지배 계급 내부에서도 동탁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조조는 조인(曹仁), 하후돈(夏侯惇)을 중심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원소를 맹주로 한 동탁 토벌 연합군에 분무장군(奮武將軍)으로 동참했다. 190년 3월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의 형양에서 동탁의 군대와 싸웠으나 수가 많고 강한 동탁의 군대에 밀려 산조(酸棗)로 퇴각했다. 그러나 동탁을 격파하고자 했던 조조와는 달리 동탁 토벌군은 동탁을 토벌하겠다는 의지가 부족했고, 나아가 내분까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조조는 동탁 토벌군에서 나와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하기로 결심했다.

독자적인 행보를 결심한 조조는 먼저 인재 확보에 나섰다. 당시에는 후한의 정치 세력이던 환관들을 반대하는 ‘청류파(淸流派)’라는 관료들이 존재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재가 순욱(荀彧)이었다. 191년 조조는 순욱을 군사로 영입했고, 순욱을 따르던 청류파의 우수한 인재들도 조조 휘하에 모이게 되었다. 또한 192년 조조는 청주(靑州) 지역의 황건적을 격퇴하고 30만 대군의 청주군을 창설함으로써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192년 전권을 휘두르던 동탁이 왕윤(王允)과 여포(呂布)에게 살해되었고, 이들 역시 동탁의 잔당에게 목숨을 잃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헌제는 난을 피해 달아났지만 다시 동탁의 잔당에게 붙잡혔다. 196년 조조는 순욱 등 참모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름만 남아 있던 헌제의 후견인을 자청했다. 조조는 헌제의 명의를 빌어 각종 조칙을 반포하고 제후들을 호령하는 등 후한의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삼국 시대의 영웅들은 각각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를 나누어 가졌다고 일컬어지는데 조조는 천시를, 손권은 지리를, 유비는 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된다.

삼국 시대의 군영과 둔전 개간
삼국 시대의 군영과 둔전 개간

헌제를 수중에 넣은 조조는 후한의 수도를 낙양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허창(許昌)으로 옮기고, 참모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둔전제를 실시했다. 조조는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농민들의 생활을 복구시키기 위해 일정 규모의 토지와 농기구, 씨앗 등을 원조하여 그들이 농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군인들도 평화 시에는 농사를 짓게 하여 군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으로 조조는 경제적인 안정을 꾀함과 동시에 군비를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한 조조는 198년 하비에서 여포를 죽였고, 199년에는 원술을 격파했다. 이로써 화북 지역에서 조조에게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원소만이 남게 되었다. 200년 조조는 1만 군사로 원소의 10만 대군과 대치했다. 원소군이 조조군을 포위했지만 조조는 유인책과 매복 작전으로 원소군을 크게 물리쳤다. 전세를 가다듬은 원소군은 조조군을 다시 공격했고, 둘은 관도(官渡)에서 다시 대치했다.

조조는 항복한 원소군의 허유(許攸)의 건의를 받아들여 원소군의 식량 보급지 오소(烏巢)를 점령했다. 원소는 패잔병 800여 기를 이끌고 자신의 근거지로 도망쳤고, 2년 뒤 병사했다. 원소의 군대를 대파한 조조는 명실상부한 화북 지역의 권력자가 되었다. 조조는 이 관도 전투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207년 원소의 아들 원상(袁尙), 원담(袁譚), 원희(袁熙) 세력을 전멸시키고 중국 북쪽 지역을 완전히 제패했다.

208년 북방을 통일한 조조는 승상이 되어 천하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고자 형주의 유표(劉表)와 강동의 손권에게로 진격했다. 조조군이 신야(新野)에 이르렀을 때 형주의 유표가 마침 숨을 거두었다. 아들 유종(劉琮)이 뒤를 이었지만 그는 조조군과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해 버렸다. 유표에게 의탁하여 번성(樊城)에 머무르던 유비는 남쪽으로 도망쳤고, 다급해진 그는 강동의 손권에게 동맹을 제안했다.

강릉(江陵)을 탈취한 조조가 강동으로 진격해 오자 유비와 동맹을 결성한 오나라의 손권은 주유에게 군사 5만을 주어 조조군에 대항하게 했다. 조조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던 연합군은 반간계(反間計, 적의 첩자를 이용하여 적을 제압하는 계책), 고육계(苦肉計, 아군을 희생시켜 거짓 전략을 진짜로 믿게 하는 계책), 연환계(連環計, 36계 중 35계로 다양한 전략들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계책) 등의 책략을 구사했다.

적벽
적벽

적벽(赤壁)에 진을 친 조조군은 모두 북방 출신이라 수전에 익숙하지 못해 심한 뱃멀미를 앓고 있었다. 이때 조조는 병사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배들을 전부 쇠고리로 연결하고 널빤지를 깔아 흔들림이 거의 없는 함선을 만들도록 했다. 하지만 이것이 조조의 가장 큰 실책이 되고 말았다. 조조군의 함선이 하나로 묶여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파악한 주유의 부장 황개(黃蓋)가 화공(火攻) 전략을 제안했다.

황개의 제안대로 주유는 배 10척에 마른 섶과 갈대를 가득 싣고 기름을 부어 만발의 준비를 갖추었다. 황개는 조조에게 거짓으로 투항하고 섶과 갈대를 실은 배로 조조의 함대에 접근하여 불을 붙였다. 조조군의 함대는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이것이 적벽대전이다.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에게 대패한 조조는 천하 통일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조조의 위나라, 유비의 촉한, 손권의 오나라의 삼국정립이 이루어졌다.

적벽대전의 주요 전함 모형
적벽대전의 주요 전함 모형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는 북방으로 돌아와 211년 관중을 평정하고 213년 위공(魏公)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216년 조조는 위왕(魏王)에 올라 위나라의 기반을 마련했다. 조조는 이때 비록 ‘제(帝)’의 호칭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미 황제와 다름없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는 끝내 황제의 자리에는 등극하지 않았다. 조조는 220년 66세의 나이로 낙양에서 병사했다. 조조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위나라 문제로 등극했고, 조조는 태조 무황제로 추증되었다.

조조가 간웅인지 영웅인지에 대한 논의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조조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교현은 그를 두고 ‘치세의 도적이자 난세의 영웅’으로, 허소는 ‘치세의 능신이자 난세의 간웅’으로 상반된 평가를 내렸다. 조조는 송 대 이후부터 간웅으로 폄하되기 시작하여,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출판되면서부터는 악인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중국 현대 문학의 거장 루쉰과 마오쩌둥(毛澤東), 곽말약(郭沫若, 궈모뤄) 등에 의해 ‘재능이 뛰어난 영웅’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평가를 받든 조조가 변화무쌍한 당대 상황 속에서 임기응변과 처세에 강한 유능한 정치가였으며 동시에 용병과 병법에 능했던 전략가였다는 객관적인 사실만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