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 16 군사 쿠데타

5 · 16 군사 쿠데타

독재를 위한 군부의 반란

요약 테이블
시대 1961년

4월 혁명이 일어나고 불과 1년 후인 1961년,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반공 태세의 강화와 부패 척결, 민생고 해결이 쿠데타의 명분이었다. 박정희는 장면 정권을 무너뜨리고, 군정을 거쳐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이것은 18년에 걸친 박정희의 장기 집권과 군부 독재의 시작이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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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배경
  2. 설명

배경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12년 만에 하야하다.
1961년 소장 박정희를 필두로 한 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다.
1963년 박정희,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다.

설명

1961년 5월 16일 오전 3시경,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朴正熙)를 비롯해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 250여 명과 사병 3,500여 명이 한강 어구를 거쳐 서울에 진입했다. 이들은 포병 5개 대대를 앞세워 육군본부를 점령한 데 이어 중앙청, 서울중앙방송국, 발전소 등을 일제히 장악했다. 이들은 오전 5시 첫 방송에서 ‘5·16 혁명 제1성’으로 거사의 명분을 밝혔다.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今朝) 미명을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어 쿠데타 세력은 6개 항의 혁명 공약을 제시했다.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고, 미국 등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하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해 민족 정기를 바로 잡으며, 민생고 해결로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이고, 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한 후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군사혁명위원회의 의장은 장면 정권의 육군참모총장인 장도영(張都暎), 부의장은 박정희가 맡았다.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는 일제 강점기에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관동군(關東軍)에서 복무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로 졸업한 뒤 대위로 임관했다. 육군 정보국에 근무하던 박정희는 여수·순천 사건에 연루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고, 이후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일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정보국장 장도영의 도움으로 복직했다.

5·16을 지지하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
5·16을 지지하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

쿠데타가 일어날 당시는 4월 혁명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학생과 진보적 정치인 들 사이에 민족 통일운동이 활발히 일어날 때였다. 5월 초에는 남북학생회담이 추진됐고, 북한에서도 이를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 군부였다. 당시 군부는 대표적인 친미, 반공 세력에 속했다. 6·25 전쟁 과정에서 한국군의 작전권이 미군으로 이양됐고, 육사 출신의 장교를 중심으로 군 지휘부가 대부분 미군에게 훈련을 받은 영향이 컸다. 실제로 박정희와 일부 군부 세력은 이승만이 휴전을 반대할 때와 이승만 정권 말기에 각각 한 차례씩 주한 미군의 지원 하에 쿠데타를 계획한 적도 있었다. 이승만 하야 이후 각계각층의 시위와 통일운동이 잇따르고 장면 정권이 이에 미온적으로 대처하자 이들은 다시 쿠데타를 실행한 것이다.

거사의 명분을 밝힌 쿠데타 세력은 오전 9시 군사혁명위원회 명의로 포고령을 내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포고령에는 옥내외 집회 금지와 국외 여행 불허, 언론 및 출판의 사전 검열, 야간 통행 금지 시간 연장 등의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오후 7시, 이들이 정권 인수를 공식으로 밝히면서 군사 쿠데타는 성공했다. 국무총리 장면은 수도원으로 몸을 피했고, 대통령 윤보선은 박정희의 요청을 받아들여 유혈사태를 피하라는 서신을 각급 지휘관에 내렸다. 장면 내각은 5월 18일 총사퇴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19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되었다. 이는 행정과 입법권을 모두 장악한 초헌법적인 최고통치기구였다. 이로부터 최고회의 의장인 장도영을 내각 수반으로 하는 군정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쿠데타 세력 내부의 알력으로 장도영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세력이 7월 반혁명죄로 구속되고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하면서 실질적인 박정희 정권이 성립했다. 미국은 쿠데타 발발 직후 ‘합법 정부를 지지한다’라며 반대 성명을 냈으나, 대통령 윤보선과 국무총리 장면의 소극적인 대처로 쿠데타가 기정사실화되고, 박정희가 반공 노선과 민정 이양 의사를 뚜렷이 밝히자 군사 정권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는 박정희가 그해 11월 미국을 초청 방문하면서 대내외에 공식화되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군사 정권의 핵심 기관은 6월 10일에 설치된 중앙정보부였다.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된 국내외 정보 및 범죄 수사와 정부 각부의 정보 수사 활동을 총괄하는 기구로, 쿠데타 주역 중 한 사람인 김종필(金鍾泌)이 부장을 맡았다. 실질적인 임무는 반혁명 인사를 색출하고, 이후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 창출해 나갈 수 있도록 기획하고 활동하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의 설치로 박정희 군사 정권의 정보공작 정치가 막이 오른 셈이다.

군사 정권은 이후 각종 강권 조치를 신속하게 진행해 나갔다. 6월 21일에는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 조직법이 공포돼 용공분자 색출을 명분으로 진보적 정치인과 학생, 노조 간부 등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이뤄지고, 각종 정당과 사회단체, 노동조합 등이 해산되었다. 3·15 부정선거 연루자와 폭력배 등도 처벌되었다. 이에 따라 2주 만에 7만 6,000여 명이 검거됐으며, 한 달 사이에 1,170종의 신문, 잡지가 폐간되었다. 4월 혁명 직후 창간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趙鏞壽)도 이때 사형당했다. 1962년 3월에는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해 구정치인 4,374명의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다.

경제, 사회 부문에서는 민생을 안정시키고 부정부패와 구악을 일소함으로써 민족 정기를 정립한다는 취지 아래 농어촌고리채정리법, 부정축재처리법, 국가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 등이 제정되었다. 이어 6월에는 경제 개발 자금을 동원하기 위해 10대 1의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군사 정권의 경제 시책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군사 정권은 비밀리에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공화당)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4대 의혹 사건을 일으켰고, 이는 국가의 경제 기강을 흐트러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유령 회사를 설립하고 증권시장에 개입해 폭리를 취한 증권 파동, 유엔군 병사들의 휴가처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워커힐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공사 대금을 횡령한 워커힐 사건, 일본에서 도박기계와 승용차를 면세로 수입해 큰 이익을 남기고 판매한 파친코 사건 및 새나라자동차 사건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군부 세력은 밀가루와 설탕, 시멘트 가격을 올려 폭리를 취하는 것을 눈감아 주고, 일부 자본가들로부터 몇십 억의 정치 자금을 챙겼다.

박정희 군사 정권은 1962년 12월 17일 국회 동의 없이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을 임명할 수 있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와 국회 단원제를 담은 새 헌법을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 지었다. 투표자의 78퍼센트가 새 헌법에 찬성했다. 이어 ‘1963년 4월 대통령 선거, 5월 국회의원 선거, 8월 민정 이양’ 등의 정치 일정을 발표했다. 공화당은 이 같은 정치 일정에 대비해 중앙정보부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정당으로, 언론인과 교수, 관리 등을 끌어들여 1963년 2월 발족했다.

박정희는 정치 일정 발표 당시 본인도 대선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가 2·18 성명을 통해 군인의 민정 불참을 선언하면서 출마 의사를 번복했다. 그러자 군 지휘관들과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군인들이 군정 연장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이에 박정희는 ‘군정 4년 연장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재야 정치인은 물론 미국이 이에 반대하자 박정희는 다시 이를 보류하는 성명을 냈다.

대선 일정이 1963년 10월 15일로 최종 확정되자 박정희는 원대 복귀와 대선 출마 사이에서 몇 차례 의사를 번복한 끝에 결국 대선 직전인 8월 30일에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뒤 공화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다. 민정에 뛰어들기 위해 군복을 벗은 박정희는 중부 전선 모 부대에서 열린 전역식에서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고 전역 인사를 했다. 박정희는 선거에서 민정당(民政黨) 윤보선 후보를 15만여 표 차이로 누르고 12월 17일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제3공화국은 이렇게 출범했다. 군부 쿠데타 세력이 ‘민정’으로 겉모습만 바꾼 채 계속 권력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