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전쟁

동학 농민 전쟁

농민들의 반봉건, 반외세 투쟁

요약 테이블
시대 1894년

개항 이후 열강과의 불평등 무역 구조로 인한 경제 침탈이 가속화되고 지방 관리의 탐학과 조세 수탈까지 기승을 부리면서 농민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누적된 농민의 불만과 분노는 마침내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폭발했다가 외세의 침략에 항거하는 반봉건, 반침략 투쟁으로 표출되기에 이른다. 1894년 갑오년의 동학 농민 전쟁은 19세기 말 농민 항쟁의 절정을 이룬 것으로, 이후 반일 의병 투쟁으로 그 맥이 이어졌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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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배경
  2. 설명

배경

1860년 몰락한 양반 출신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다.
1893년 일본과 서양을 적대하는 기치를 내걸고 교조 신원운동이 일어나다.
1894년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이 크게 패하다.

설명

1894년 농민 전쟁은 동학(東學)이라는 민중 종교와 그 지도 체제 아래서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됐다는 점이 하나의 특징이다. 1860년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의 최제우(崔濟愚)가 창시한 동학은 봉건적 수탈 구조에 시달리던 농민 사이에 급속히 전파됐다. 정부가 1864년 3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를 물어 최제우를 처형한 이후 동학의 교세는 한때 주춤했지만,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끈질긴 포교 활동 등으로 1870년대 후반에는 삼남 지방에 뿌리를 내릴 정도로 퍼져 갔다. 1880년대에는 충청도 지역의 북접(北接)에서 손병희(孫秉熙), 손천민(孫天民), 전라도의 남접(南接)에서 손화중(孫和中), 서장옥(徐長玉), 황하일(黃河一), 김개남(金開男) 등이 등장해 이후 동학 지도자로 성장한다.

사학(邪學)이라 하여 지방 수령들로부터 지속적으로 탄압을 받던 동학교도들은 1890년대 들어 합법적인 청원활동으로서 교조 신원(伸冤) 운동을 전개했다. 억울하게 처형된 교조 최제우의 누명을 풀어 포교의 자유를 인정해 달라는 것과 고을 수령들의 교도들에 대한 재산 탈취 등 부당 행위를 막아 달라는 것이 청원의 요지였다. 이들은 1892년 10월에 충청도 공주, 11월에 전라도 삼례에서 시위를 벌여 충청도와 전라도 관찰사에게 동학교도에 대한 부당한 수탈을 금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교조 신원은 이루지 못했다.

이에 동학 지도자 40여 명은 국왕에게 직접 청원하기 위해 1893년 2월 광화문 앞에 엎드려 사흘 밤낮으로 복합상소(伏閤上疏)를 올렸다. 하지만 조정은 이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체포했다. 그러자 동학 지도자들은 최제우가 처형된 날인 3월 10일 충청도 보은에서 2만 7,000여 명의 교도가 모인 가운데 집회를 갖고 정부에 대한 투쟁을 결의했다. 이즈음 전라도 금구에서도 전봉준(全琫準)과 서장옥 등 남접이 주도하는 시위가 열려 보은 집회에 호응했다. 집회에는 이미 일반 민중들도 가세하였다. 이때부터 교도들은 교조 신원 요구를 뛰어 넘어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일본과 서양을 물리치고 대의를 세움)의 기치를 내건다.

동경대전
동경대전

앞서 광화문 앞 복합상소 당시에도 외국 공사관이나 교회, 외국인 거류 지역에 ‘왜놈과 서양 오랑캐는 물러가라’라는 내용의 벽보가 붙었다. 동학의 기세를 우려한 조정에서는 어윤중(魚允中)을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보내 이들을 회유, 설득하는 한편 홍계훈(洪啓薰)으로 하여금 관군 600여 명을 이끌고 진압에 나서도록 했다. 그러자 동학교도들은 자진 해산했고, 이에 따라 농민 전쟁 전 단계인 교조 신원운동은 막을 내린다.

동학 농민 전쟁은 1894년 1월 고부 민란에서부터 5월 전주화약(全州和約)에 이르기까지의 1차와 일본의 왕궁 점령에 대응해 다시 봉기한 그해 9월 이후의 2차로 나뉜다. 1차 농민 전쟁은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학정에 분개한 농민들이 고부 접주(接主) 전봉준의 지휘 아래 봉기하면서 촉발됐다. 조병갑은 개항 이후 쌀 수출의 증가로 지주의 수탈에 시달리던 소작농에게 만석보(萬石洑)의 수세를 강제로 징수하고 부친의 비각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는 등 온갖 탐학을 일삼고 있었다. 전봉준을 비롯한 고부 농민들이 관아에 여러 차례 시정을 요구했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에 전봉준 등은 1893년 11월부터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돌리며 봉기를 준비한다. 마침내 1894년 1월 10일 새벽, 전봉준과 농민 1,000여 명은 고부 관아를 습격해 아전을 처단하고, 무기를 탈취했다. 창고에 있던 양곡 1,400여 석을 농민에게 돌려주고, 조세 장부 등을 태우기도 했다. 이들은 조병갑의 학정 시정과 외국 상인 침투 금지 등 13개 조의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정부에서는 조병갑을 처벌하고, 장흥 부사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파견해 진상을 조사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용태가 봉기에 참여한 농민과 그 가족을 색출하고 학살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자, 전봉준 등은 3월 13일 전라도 무장으로 몸을 피했다.

이어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의 도움을 받아 전봉준, 김개남 등이 20일 무장에서 8,000여 명의 농민군을 일으키면서 농민 전쟁은 본격화됐다. 농민군은 창의문을 발표하고 전봉준을 창의대장으로 삼아 고창, 흥덕을 거쳐 23일 고부 관아를 점령했다. 이들은 고부 북쪽의 백산(白山)으로 이동해 대오를 정비한 뒤 태인과 금구를 거쳐 4월 7일 새벽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했다. 첫 싸움에서 승리한 농민군은 정읍과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을 잇달아 점령한 데 이어 장성 황룡촌에서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이 이끄는 800여 명의 경군(京軍)을 무찔렀다. 농민군은 마침내 4월 27일 전주성을 점거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전라도 일대가 사실상 농민군의 지배에 들어갔다.

이에 위기를 느낀 민씨 정권의 요청에 따라 청나라 군대가 5월 5일 아산만에 상륙했고, 톈진 조약에 근거해 일본군도 다음 날 인천으로 들어왔다. 외세 개입을 우려한 농민군은 일단 경군과 휴전 교섭에 들어가 5월 7일 전주화약을 체결한 뒤 이튿날 자진해산했다. 전주화약에서는 탐관오리와 양반, 토호 등의 탄압 및 수탈 금지, 신분상 차별 대우 폐지, 무명잡세(無名雜稅) 혁파, 친일분자 처벌, 고리채 무효화 등이 담긴 12개 조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이 합의됐다. 전주화약에 따라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金鶴鎭)과 전봉준은 전라도 53개 군에 민정기관인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과감한 폐정 개혁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보수 유생과 향리 등이 개혁 조치와 집강소 설치에 반대하며 민보군(民堡軍)을 만들어 농민군을 체포해 처형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내각을 세우자 이에 분노한 농민군이 척왜(斥倭)를 기치로 다시 봉기하고, 친일 내각도 일본군의 힘을 빌려 농민군 토벌에 나선다. 남접의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 10만여 명은 9월 12일 삼례에 집결해 조직을 재정비한 뒤 10월에 서울을 향해 북상했다. 1차 봉기 때 참여하지 않은 충청, 경상, 강원, 경기, 황해도 등지에서도 속속 농민군이 들고 일어났다. 남접의 1차 봉기에 반대했던 북접의 손병희도 교주 최시형의 승인을 받아 충청도 일대 농민군 10만여 명을 이끌고 논산에서 전봉준과 합류했다.

이처럼 2차 동학 농민 전쟁은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반외세를 목적으로 거병했다는 점에서 1차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남북이 연합한 농민군은 일본군을 치기 위해 서울 쪽으로 북상했고, 이즈음 일본군과 관군, 민보군의 연합 세력도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세 갈래로 나누어 남하하고 있었다. 농민군은 이들을 맞아 목천 세성산(細城山)에서 사흘간의 접전 끝에 패배하였고, 공주, 청주, 나주, 논산, 금구, 원평 등에서는 최신식 근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 세력에게 잇따라 무너졌다.

최대 격전은 공주 우금치(牛禁峙) 일대에서 벌어졌다. 전봉준과 손병희가 합세한 2만여 명의 농민군은 10월 23~25일과 11월 8~11일 두 차례에 걸쳐 일본군, 관군 연합 세력과 50여 차례에 걸쳐 혈전을 벌였으나, 월등히 우세한 화력 앞에 패퇴하였다. 생존자는 불과 500여 명에 불과했다. 우금치 전투를 고비로 농민 전쟁은 사실상 승패가 갈렸다. 농민군은 뿔뿔이 흩어지고, 일본군과 관군은 무자비한 토벌 작전을 벌였다. 전봉준은 12월 2일 순창에서, 손화중은 1895년 1월 6일 흥덕에서 각각 체포돼 그해 3월 말 다른 농민군 지도자들과 함께 처형됐다.

체포된 전봉준
체포된 전봉준

1894년 한 해 동안의 동학 농민 전쟁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동학 농민 전쟁은 폐정 개혁안을 통해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반일 의병 투쟁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