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의 순교

이차돈의 순교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다

요약 테이블
시대 527년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것은 삼국 중 가장 늦은 527년이었다. 당시 신라는 고대 국가로의 체계를 갖춰 가는 과정에서 불교를 도입하려는 왕과 토착 신앙에 기반을 둔 귀족 세력이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불교 공인에 있어 귀족의 반대에 부딪히자 이차돈이 이적을 일으키며 순교하였고, 이로써 법흥왕은 불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고 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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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배경
  2. 설명

배경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전진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다.
384년 백제 침류왕 원년, 동진의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하다.
527년 신라 법흥왕 14년,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다.

설명

소신이 저녁에 죽어서 아침에 불법(佛法)이 행해지면 불교가 일어나고 성주(聖主)께서는 길이 편안하실 것입니다. 소신의 목을 베어 만민이 굴복하게 하십시오.

527년, 이차돈(異次頓)은 신라의 23대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에게 이 같은 말을 남기고 처형된다. 당시 형리(刑吏)가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에서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고,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진동하더니 꽃비가 내렸다고 《삼국유사》는 적고 있다. 이차돈은 처형 직전 “부처가 있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異蹟)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고, 그 예언이 맞아 떨어지자 불교 공인(公認)을 반대하던 신하들도 마음을 돌렸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신라는 오랜 진통 끝에 마침내 불교를 공식으로 받아들였다. 법흥왕 14년, 이차돈의 나이 26세 때의 일이다.

순교 당시 이차돈은 법흥왕의 왕명을 사칭해 토착 신앙의 성지인 경주의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지으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에 토착 신앙에 기반을 둔 귀족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자, 법흥왕은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라며 이차돈의 목을 베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이차돈의 극단적인 희생은 법흥왕의 의도대로 불교를 공인하는 정치적 명분으로 작용했다.

당시 이차돈의 순교는 단순히 종교적인 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고대 국가 체제를 갖춰나가는 과정에서 국왕과 귀족 세력 간의 치열한 정치적, 사상적 주도권 다툼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은 비로소 국법(國法)과 불법을 통해 강력한 국왕의 권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불교 수용이 무려 150년이나 늦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384) 2년인 372년, 백제는 침류왕(枕流王, 재위 384~385) 원년에 각각 불교를 공인했다. 신라에서도 이차돈의 순교 이전부터 일찌감치 불교가 유입되었지만, 귀족 세력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쉽사리 국가의 공인을 받지 못했다.

당초 여섯 개의 부족이 모여 나라를 이룬 신라에서는 각 부족 출신과 이를 이끄는 귀족들이 건국 당시의 민간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백성들 사이에서도 이 같은 무격(巫覡) 신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특히 귀족들은 민간 토착 신앙의 토대인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을 자신들의 직계조상으로 섬기며 백성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굳건한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선진 종교인 불교를 수용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존립기반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차돈이 절을 지으려 했던 천경림은 천신이 내려와 지신과 결합한 장소로 신성시된 곳이었다.

반면 국왕으로서는 토착 신앙에 뿌리를 둔 귀족 세력의 기득권을 누르지 않고는 고대 국가의 체제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효율적인 통치 행위를 기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 영토 확장과 각종 제도의 정비로 신라 사회가 종래 민간 신앙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급속한 변화를 겪자 이를 헤쳐 나갈 새로운 고등 종교와 사상에 대한 갈증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법흥왕이 불교를 일으키기 위해 미리 이차돈과 일을 도모했다는 기록이 이 같은 시대 분위기를 방증한다. 성품이 곧고 일찍이 불교에 심취한 이차돈과 불법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길 염원한 법흥왕의 마음이 서로 맞아떨어졌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는 이차돈을 왕과 가까운 신하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이차돈이 당시 사인(舍人)이라는 말직 벼슬을 맡고 있었고, 그의 실제 성은 박씨(朴氏)이며, 갈문왕(葛文王)의 손자로 법흥왕과는 5촌이 되는 왕족이라고 적었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법흥대왕이 등극했을 때 “예전에 한나라 명제가 꿈에 감응되어 불법이 동방에 유행했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부터 인민을 위해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마련하려 했다.” 하고 말했다.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국왕이 중심이 돼 불교를 적극 수용했다는 점에서 삼국 모두 중앙집권 국가에 걸맞은 국왕의 통치 이데올로기로써 불교 신앙을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이차돈이 순교한 뒤 법흥왕은 문제의 천경림에 흥륜사(興輪寺)라는 절을 지었고,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에게 왕위를 넘긴 다음에는 스스로 승려가 되었다. 당초 무즉지매금왕(无卽知寐錦王)이던 왕호도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으로 바꾸었다. 또 순교 당시 이차돈의 잘린 머리가 하늘에 올랐다가 떨어진 곳에 자추사(刺楸寺)라는 절을 지었다. 현재 경주 동천동에 있는 백률사가 그 절인 것으로 추정된다. 백률사에서는 모두 여섯 면으로 된 이차돈 순교비가 발견되기도 했다. 《삼국유사》에는 ‘나인들은 이를 슬퍼하여 좋은 곳을 가려 절을 짓고 이를 자추사라 하였다. 이에 집집마다 부처를 공경하면 대대로 영화를 얻고 불도(佛道)를 행하면 불법의 이익을 얻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불교가 공인되자, 신라에는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확립된다. 국왕이 다스리는 땅은 불국토(佛國土, 부처님의 땅)이며, 모든 부족은 부처님의 제자라는 인식이 퍼져 나갔다. 이제 국왕은 귀족 세력이 넘볼 수 없는 초월적이고 신성한 권리를 지닌 존재가 된 것이다. 잦은 전쟁과 조세, 부역, 미약한 신분 출신 등으로 현실에서 고통을 겪고 있던 백성들은 불교의 내세관(來世觀)과 윤회설(輪廻說)을 큰 위안과 희망으로 삼게 됐다. 또 귀족들은 전생의 업(業)에 따라 현재의 처지가 결정된다는 윤회전생(輪廻轉生) 사상을 당시 골품제(骨品制)를 바탕으로 한 자신들의 신분상 특권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삼았다. 골품제란 수도인 경주와 주요 지방의 주민들을 차등을 두어 편제한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여 신라 사회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민간 신앙은 불교에게 그 지위를 내준다.

신라 금관
신라 금관

한편 법흥왕은 불교가 공인되기 전인 517년에 병부(兵部)를 설치해 군사권을 장악했으며, 520년에는 국왕 중심의 국가 질서를 확고히 하기 위해 국법인 율령(律令)을 반포했다. 또 불교 공인 4년 뒤인 531년에는 상대등(上大等)을 설치했다. 상대등은 귀족들이 모여 국가 중대사를 의결하는 화백회의의 의장이며, 국왕이 직접 임명했다. 강화된 왕권을 중심으로 국왕과 귀족이 조화를 이루며 나라의 체계를 잡아 나간 셈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법흥왕 18년 4월에) 이찬(伊湌) 철부(哲夫)를 상대등으로 삼고, 나라 일을 총괄하여 주재하도록 했다. 상대등이라는 관명은 이로써 비롯된 것이니, 지금의 재상(宰相)과 같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법흥왕은 532년에 경남 김해 지역에 있던 금관가야를 복속했다. 법흥왕은 또 536년에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 중국과 대등한 관계에 있음을 과시했다. 이처럼 법흥왕은 재위 초반부터 왕권 강화와 국가 발전을 위한 기반을 차곡차곡 다져 나갔으며, 그 정점에 바로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 공인이 있었던 것이다.

법흥왕에 이어 진흥왕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수나라에서 가져오는 등 불교 교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나갔다. 572년에는 전쟁터에서 숨진 병사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궁 바깥 사찰에서 팔관회를 열어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성격을 드러냈다. 특히 진흥왕 재위 기간에 창설된 화랑도의 정신과 불교의 미륵 사상이 접목되면서 그 결과로 후일 삼국 통일의 정신적 동력이 싹트게 된다.

이와 같이 초창기에 국왕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수용되고 활용된 불교는 귀족들에 이어 서민들의 신앙과 실생활에까지 널리 확산되면서 고대 사회의 면모를 혁명적으로 변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