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H. 로렌스

성에 대한 진지한 탐구

D. H. 로렌스

David Herbert Lawrence
요약 테이블
출생 1885년 09월 11일
사망 1930년 03월 02일
국적 영국
대표작 《채털리 부인의 연인》, 《아들과 연인》 등

성의 본질과 의의를 예리한 시선과 대담한 표현으로 파헤쳐 문학과 예술 표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D. H. 로렌스
D. H. 로렌스

D. H. 로렌스는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소설가로, 성(性)의 본질과 의의를 노골적이고 대담하게 파헤친 인물이다. 그의 작품들은 당대에는 음란물로 외설 논쟁에 시달리고, 검열, 삭제, 출간 금지 등 수많은 시련을 겪었으며, 그의 사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무삭제본이 출간될 정도였다. 본국인 영국에서 1913년작 《아들과 연인》은 1992년에야 무삭제본이 출간되었으며, 1915년작 《무지개》는 출간 즉시 판매 금지 조치를 받았고, 1928년작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아예 출간이 금지되어 이탈리아에서 초판이 출판되었다가 1960년에야 출간될 수 있었다. 이 일련의 작품들은 외설 시비로 말미암아 오늘날까지 에로티시즘의 고전 정도로만 여기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D. H. 로렌스의 작품들은 결혼제도와 계층 문제의 본질을 '성적 억압'으로 상정하고, 성의 해방을 통해 생명력을 되찾음으로써 현대 문명의 비극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관점에서 쓴 현대 문명 비평서라 할 수 있다. 로렌스 이전의 어떤 작가도 인간의 성적 본성을 깊이 있게 탐구하지도, 이를 자연과 사회, 이성과 감정 사이의 대립으로 완전히 극화하지도 못했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는 1885년 9월 11일 영국 중부 노팅엄셔 주의 탄광 지대인 이스트우드에서 태어났다. 광부였던 아버지 데이비드 허버트 리처즈 로렌스는 당시 하층 노동자의 표본 같은 인물로, 건장하고 쾌활하고 좋은 아버지였으나 무학에 문맹으로 교양과는 거리가 멀었다. 반면 어머니 리디아 비어절은 청교도 집안 출신의 전직 교사로, 세련된 교양과 유머 감각을 갖춘 데다 지적 수준이 매우 높은 인물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잘생긴 외모에 끌려 결혼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으며, 남편의 무식을 경멸했고, 아이들에게 모든 사랑과 욕망을 집중했다. D. H. 로렌스는 이들 사이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나, 계층과 교양 수준이 다른 부모의 갈등 속에 어머니의 집중된 애정을 받고 자랐다. 탄광촌 사택에서 광부들의 험하고 가난한 생활에 갈등하고 좌절하는 어머니를 목격한 경험으로 D. H. 로렌스는 계층 대립과 여성 및 어머니의 욕망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또한 셋째 형 어니스트가 죽으면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 로렌스에게 집중된 경험은 어머니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는데, 이 때문에 그의 작품과 인생 전반의 경향성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스트우드에 있는 로렌스 생가
이스트우드에 있는 로렌스 생가

어머니 리디아는 자식들이 남편처럼 노동자로 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교육열이 매우 높았고, 아이들을 중산층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 보냈다. 로렌스는 보베일 공립 초등학교를 거쳐 노팅엄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학창 시절 중산층 아이들과 지내면서 오히려 자신이 하층민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잠시 의료기구 공장 사무원으로 일하다가 노팅엄 대학 교사 양성 과정을 수료했다.

대학 시절에 그는 틈틈이 단편소설과 희곡 등을 습작했으며, 첫 장편소설인 《흰 공작》(1911년 출간)을 썼다. 1908년에 교사 자격을 취득하고 런던 남부의 데이비슨 로우드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습작 활동도 계속해 이듬해 〈잉글리시 리뷰〉 지에 시를 게재하면서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로렌스는 그의 인생 전반을 지배할 몇 가지 사건들에 맞닥뜨린다. 어머니의 죽음과 아내 프리다 위클리와의 만남이다. 16세 때 로렌스는 어머니 친구의 딸인 제시 체임버스라는 여자를 만나 오랜 연애를 하다 1910년에 헤어졌는데, 그 직후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루이 버로우즈와 갑작스럽게 약혼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여성과의 연애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감정의 혼란을 겪는 와중에, 연애가 파탄 나자 급격하게 대체물을 찾은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해 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로렌스는 심한 충격을 받았으며, 1년여 후 갑작스럽게 루이 버로우즈와 파혼했다. 버로우즈와 파혼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로렌스는 5세 연상의 프리다 위클리와 다시 사랑에 빠졌다. 프리다는 로렌스의 프랑스어 교수였던 어니스트 위클리의 부인이었다. 두 사람은 독일, 이탈리아로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끝에 1914년 프리다가 이혼하면서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1913년 첫 시집 《연시와 그 밖의 시들》과 두 번째 장편소설 《아들과 연인》을 펴냈다. 《아들과 연인》은 노팅엄셔의 전원과 광산촌을 배경으로, 주인공 폴 모렐과 어머니의 근친상간적인 집착 관계,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폴의 자아 및 심리 분열, 유부녀 크레일라 도즈와의 잘못된 성적 관계와 절망을 다룬다. 자전적 요소가 강하며 이를 통해 계급, 가족, 남녀의 갈등, 산업화와 하층 노동자의 가난한 삶, 결혼으로 인한 여성의 속박과 지위 하락 등 당대 문제들을 다루었다. 출판사에서는 로렌스와 상의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성애를 묘사한 곳을 상당 부분 삭제하고 출간했고, 이 작품은 이로부터 80년 후에야 온전한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게 된다. 《아들과 연인》을 발표하고 로렌스는 재능 있는 소설가로 평단과 대중의 인정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로렌스는 아내 프리다가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스파이 혐의를 받는 등 고초를 겪지만, 프리다와의 결혼 생활로 정서적 안정을 얻고 대표작들을 집필했다. 1914년 말에는 단편집 《프로이센 장교》를 출간했으며, E. M. 포스터, 올더스 헉슬리, 버트런드 러셀 등과 교유하면서 사상적, 문학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1915년에는 장편소설 《무지개》를 발표했는데, 근대화가 시작된 중부의 시골을 배경으로, 농장을 경영하는 브랑윈 가의 삼대에 걸친 이야기이다. 세대 간의 갈등, 계급 이동, 신여성, 미성년과 여성의 성, 여성 동성애 문제 등을 다루고 있으며, 파격적이고 대담한 성애 묘사로 발간 즉시 판매 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는 영국 전역과 이탈리아를 방랑하면서 《무지개》에서 다룬 남녀의 역학 관계와 그 변화, 윤리 문제를 더욱 깊이 파헤친 《사랑하는 여인들》을 썼으며, 서서히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영국을 떠나기로 하고 미국, 이탈리아 등지로 거처를 옮겼으며, 1920년대를 통틀어 유럽과 미국 곳곳을 방랑했다. 미국에서 로렌스는 《무지개》와 《사랑하는 여인들》을 출간해 호평을 받았으나 런던에서는 외설 작가로 공격받는 상황이 계속됐다. 스리랑카와 오스트레일리아를 여행하고 와서 그는 《캥거루》, 《아론의 지팡이》 등을 썼으며, 멕시코 여행을 하면서 아스텍 문명에 매료되어 《날개 달린 뱀》을 썼다. 또한 소설 외에도 《미국 고전 문학의 연구》, 《정신분석과 무의식》, 《무의식의 환상》, 《역사 위대한 떨림》과 같은 학술 서적들과 《바다와 사르데냐》 같은 여행기도 썼다.

1925년, 폐결핵 판정을 받은 그는 이탈리아 사르데냐 지방에 정착해 요양을 하면서 대표작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영국 중부의 탄광 마을을 배경으로, 전쟁으로 불구가 된 남편을 둔 여인이 산지기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로렌스는 육체를 인간다움의 본질로 여겼으며, 산업 사회와 현대 문명은 육체의 죽음을 야기한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성행위는 그에게 있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류와 접촉, 애정, 생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수단이다. 때문에 그는 성행위가 외설로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꾸밈없이 썼지만, 이 작품은 최고의 외설 시비에 휘말렸으며 오랜 재판 끝에 그의 사후 30여 년이나 지나서야 영국에서 출판이 가능했다. 외설 논란에 휘말려 그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이 작품은 본질적으로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인간의 가장 내밀한 영역인 성을 공개된 영역으로 끌어들이면서 문학과 예술 표현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품이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음에도 단편집 《말을 타고 가버린 여인》과 《시선집》을 출간했으며, 런던에서 회화전을 열기도 한다. 그러나 내무성이 전시회를 중단시키고 일부 그림을 압수했다.

뉴멕시코에 있는 로렌스 기념 예배당
뉴멕시코에 있는 로렌스 기념 예배당

1929년 말 병세가 악화되어 이듬해 2월 프랑스 남부 방스의 요양원으로 옮겨 갔으며, 그해 3월 2일 사망하여 방스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1935년, 유언에 따라 유해가 화장되어 미국 뉴멕시코 타오스의 목장에 매장되었으며, 그곳에는 현재 로렌스 기념 예배당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