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 킹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
요약 테이블
출생 1929년
사망 1968년
국적 미국

침례교 목사이자 미국 내 흑인 인권운동을 주도했고, 비폭력을 주장했다. 196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63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에서 인종차별의 철폐와 인종 간의 공존을 호소했다. 1969년 극우파 백인 제임스 얼 레이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마틴 루터 킹
마틴 루터 킹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깨어나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창조되었다는 명백한 이념을 신봉한다'는 미국의 신조 안에 깃든 참뜻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 꿈입니다"로 시작하는 세계적인 연설의 주인공 마틴 루터 킹. 그는 인종차별이 심각했던 1950, 60년대에 흑인의 인권운동을 이끌었던 개신교 목사이다.

그는 1929년 조지아 주 애틀랜타 시에서 마이클 루터 킹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크로저 신학교에서 신학자들의 사상을 공부했고, 1955년 보스턴 대학교 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때 기독교 근본주의적 신앙에서 점차 기독교적인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진보적인 신앙으로 변화를 겪었다.

그가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덱스터 가 침례 교회의 담임목사로 활동하던 1955년 로자 파크스 사건이 벌어졌다.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인종분리법으로 체포된 일이다. 몽고메리 주에서 버스 보이콧 운동이 벌어졌고, 킹은 이 운동을 이끌게 되었다. 1956년 미국 연방 최고재판소에서 마침내 버스 내 인종 분리법 위헌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킹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대중이 일어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것을 정부에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SCLC)를 결성하고, 전국적으로 인권운동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간디의 비폭력운동에 늘 관심을 가졌던 킹은 미국 퀘이커교도 단체를 통해 1959년 2월 인도를 방문해서 간디의 가족들을 만났다. 이 방문을 통해 그는 비폭력 저항과 미국의 인권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의했다. 이후 킹은 더욱 열렬하게 인권운동에 매진했다. 그의 활발한 사회운동은 우파를 자극했다. 당시 FBI 국장이자 우파 인사였던 에드거 후버는 흑인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킹을 위험인물이라고 규정하여 활동 내역을 감시하기도 했다.

1961년 12월, 킹과 SCLC는 조지아 주 알바니에서 일어난 인종분리 반대운동에 참가했다. 그리고 다음 날 시위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기를 거부했고 결국 시에서 그를 풀어주었다. 이 사건으로 알바니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으나, 비폭력 인권운동의 기본 전략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28년 워싱턴을 행진하는 KKK
1928년 워싱턴을 행진하는 KKK

1963년 앨라바마 주 버밍햄에서 킹과 SCLC는 인종차별적인 경제정책과 시의 관행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그들은 비폭력으로 맞섰으나 이 운동은 경찰의 과잉 폭력진압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킹은 버밍햄 운동의 목적을 "직접적인 행동만이 언젠가 협상의 문을 열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1963년 8월 28일 킹은 전미 유색인종 진보협회의 로이 윌킨스, 미국 도시연맹의 휘트니 영, 침대차 짐꾼 협회의 필립 랜돌프, SNCC의 존 루이스, 인종평등협회의 제임스 파머 주니어 등 주요 인권조직 대표들과 함께 워싱턴을 행진하며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 행진의 목적은 남부 지역 흑인들의 비참한 실상을 보여주고 시민들에게 조직위원들의 우려와 슬픔을 알린 후 국회까지 가는 것이었다. 조직위원들은 인권보호에 실패한 정부에 책임을 묻고 싶어했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의 지지와 영향력을 얻으며 이 행진은 훨씬 더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인권운동가 중 일부는 이것이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특히 말콤 X 같은 사람은 '워싱턴에서의 쇼'라고까지 말했다. 또한 이슬람교도들은 행진에 참가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킹의 명연설은 워싱턴 행진에서 행한 연설이다.

워싱턴 행진을 통해 그들이 바란 것은 공립학교에서 인종분리 철폐, 인권법의 승인, 고용에서 인종차별 금지법, 경찰의 폭력에서 노동자들의 보호, 모든 노동자에게 최저 2달러의 임금 보장, 워싱턴 D.C.에서 통제하는 자치정부 수립 등이었다. 총 25만 명가량의 각기 다른 민족들이 행진에 참가했고 킹의 연설에 감동을 받았다.

킹은 흑인뿐만 아니라 차별당하고 있는 전 미국인들이 역사적인 억압에 대해 금전적으로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965년 인터뷰에서 그는 흑인들이 평등권을 인정받는다고 해서 백인과의 경제적 격차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965년 킹과 SCLC 위원들은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행진을 준비했다. 3월 7일 첫 행진이 시작되었을 때 경찰과 폭도들이 행진 참가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고, 이 사진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며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하지만 이 날 킹은 함께 하지 않았다. 그는 린든 존슨 대통령과 만남을 가진 후 행진을 중지하기로 했고, 셀마의 행진 담당자가 킹 없이 진행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1968년 3월 29일, 킹은 3월 12일부터 더 나은 임금과 대우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인 화장실 청소부들을 지지하러 멤피스로 갔다. 그리고 다음 날 킹은 머물고 있던 로레인 모텔 2층 발코니에서 저격당해 사망했다. 범인 제임스 얼 레이는 두 달 후 런던 공항에서 체포되어 99년형을 선고받았다.

서른아홉 평생을 흑인 형제들의 인권을 위해 헌신했던 킹. 사후 그의 몸을 검시한 부검의는 그의 심장 상태가 예순 살 노인과 같다고 말했다. 치열했던 13년의 인권운동이 마틴 루터 킹 개인에게 남긴 흔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인권운동으로 가난과 괴로움, 차별의 고통에서 벗어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더욱 깊은 흔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