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이븐 압둘라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

Muhammad Ibn Abdullah
요약 테이블
출생 570년
사망 632년
국적 아랍 메카

이슬람교의 창시자. 611년 신의 계시를 받아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622년 종교적인 탄압을 피해 메디나로 피난하여 그곳에 포교의 중심을 정하였다. 이것을 헤지라(聖遷)라고 한다. 632년 사망할 무렵 남부 아라비아 전역이 이슬람교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아라비아의 홍해 연안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는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에 필적할 만한 종교인 이슬람교의 창시자이자 지중해 주변에 거대한 제국을 세운 정복자이기도 하다.

아라비아 사회는 무함마드가 탄생하기 전에야 비로소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경제생활은 매우 단순해서 낙타를 이용한 대상(caravan)이 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메카는 특히 인도양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대상로(隊商路)의 요지였다. 예부터 흩어진 유대 인들이 살았으며 이비아니교, 마리아나이트, 네스토리우스교 등 그리스도교 이단이 로마의 이단정죄를 피해 거주하였다.

메카의 지배 계급은 5세기 말경 황야에서 온 쿠라이시 족으로 무함마드는 쿠라이시 족의 하심 가에서 570년에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한때 메카 시를 지배할 정도의 명문가였으나 그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가세가 크게 기울어 그의 수중에는 한 푼의 재산도 상속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으며, 어머니마저 그가 6세 되던 해에 메디나에서 돌아오는 길에 병에 걸려 죽었다. 그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라다가 이후 삼촌 아부 탈립에게서 자라게 되었다. 하지만 아부 탈립은 자식이 워낙 많은데다 가난했기 때문에 무함마드는 어린 나이에 삼촌과 함께 샴으로 대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슬람교 문헌에는 그가 문맹에 무학(無學)으로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오랜 목동생활과 삼촌을 따라다니며 얻은 대상으로서의 경험을 통해 현실적인 지혜에 빠르게 눈을 떴다. 그는 삼촌의 소개로 부유한 과부 카디자의 고용인으로 들어가 시리아 지방으로 대상 무역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이 여행에서 엄청난 소득을 올리고 돌아오자 카디자는 감탄하여 열다섯 살이나 어린 그에게 청혼했다. 그리하여 무함마드는 스물다섯 살에 연상의 카디자와 결혼하여 부유한 상인이 되었다.

비를 기원하는 무함마드와 사람들
비를 기원하는 무함마드와 사람들

하지만 일신의 평화와 달리 그의 인생에는 불행이 닥쳐왔다. 아들들이 태어나기만 하면 어린 나이에 사망했던 것이다. 대상 무역을 다닐 수 있는 건강한 아들을 선호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고민은 점점 커졌다. 그리고 메카 시 근처의 히라 산 동굴에서 명상에 잠기는 일이 많아졌다. 그는 홀로 금식과 명상기도를 하며 진리를 깨닫기 위해 노력했다.

611년의 어느 날 그는 명상을 하던 도중 가위에 눌리는 듯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천사 가브리엘이 그의 목을 잡고 신의 말씀을 복창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도망치듯 돌아와서 자신이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 종교를 창시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그의 아내 카디자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며, 그 후 친척과 친구들을 포교 대상으로 삼아 차츰 교세를 넓혀갔다.

처음 메카 시에서는 이슬람교의 교세가 넓어지는 것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무함마드가 메카 시민을 상대로 포교를 시작하자 시민들이 그에게 반발하게 되었다. 메카 시는 카바 신전으로 오는 아라비아 각지의 순례객들을 상대로 쏠쏠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고, 가장 부유한 상인들로 이루어진 평의회가 시를 지배하고 있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부는 신이 주신 선물이라는 무함마드의 주장은 메카의 이러한 금권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622년, 무함마드는 메카 시의 종교적 탄압에서 탈출하여 야스리브로 거점을 옮겼다. 야스리브는 무함마드를 융숭하게 대접했기 때문에 후에 '예언자의 도시(madinat an-nabiy)'라고 불리게 되었고, 현재는 '메디나(Medina)'라고 불린다.

메디나에는 서로 패권을 다투고 적대하는 아우스, 하즈라지라는 2개의 아랍 부족과 3개의 유대 인 부족이 살고 있었다. 무함마드는 이들 부족의 조정자로 나섰다. 메디나의 아랍 인과 무함마드 사이에 은밀한 교섭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622년 아카바의 맹약이 체결되어 메디나의 아랍 인은 무함마드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곧 메카의 이슬람교도가 떼를 지어 메디나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사태의 심각함에 놀란 메카의 대상들은 그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그는 교묘하게 난을 피해 그해 9월 24일 무사히 메디나에 도착했다. 이것이 헤지라(聖遷, 성전)로 이슬람교도는 서기 622년 7월 16일을 이슬람력의 시발점으로 삼게 되었다. 종교인 동시에 사회조직의 원리이기도 한 이슬람교는 이 해에 틀이 잡혔던 것이다.

메디나
메디나

메디나에서의 생활은 무함마드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이곳에서 비로소 종교라 불릴 만큼 교세를 확장하고 신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종교의 수장이자 군사사령관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그는 무섭게 신장된 자신의 교세를 바탕으로 각 도시를 상대로 포교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7년간 계속된 메카 시와의 종교전쟁은 메디나 시의 승리로 끝났고 메카는 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630년, 무함마드는 쫓겨나듯 탈출했던 메카 시로 당당히 돌아왔다. 그는 아라비아 반도를 점차 통일시키며 행정조직을 개편해 그때까지 자발적이었던 희사(喜捨)를 정부에 바치는 세금으로 바꾸었고, 혈연에 의한 인간의 결합을 종교에 의한 결속으로 대체했으며, 다신교를 영구히 금지했다. 이슬람교도 사회는 평등원칙에 따라 오직 《코란》의 율법에 의해서만 지배되었다.

632년, 무함마드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신은 유일하며 신자는 형제'라는 것을 재차 이야기했다. 전승에 따르면 새로 선출된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Abu Bakr)는 비탄에 빠진 신자들에게 "만일 그대들이 무함마드를 숭배하고 있다면 분명히 무함마드는 죽었다. 그러나 만일 신을 숭배하고 있다면 신은 지금도 살아 있다. 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사망한 후에도 그의 계승자들은 무함마드의 포교전쟁을 계속 수행해갔다. 7세기에는 메소포타미아 및 전 페르시아 지방이 이슬람의 손에 들어갔다. 8세기에는 이집트를 거쳐 북아프리카가 침략에 굴복했고, 이슬람교도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지중해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이처럼 이슬람교의 포교전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먼저 포교전쟁에 동원된 병사들에게 현실적인 보상을 약속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용감히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슬람교에서는 포교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자는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아울러 전쟁을 통해 세계 제국이 실현되면 끝없는 부와 번영을 함께 누리게 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광만이 존재하는 전쟁에서 사막인들은 무서운 전투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지적할 것은 이슬람교의 전투적 성격이다. 무함마드는 선교사업을 일종의 무력에 의존하여 수행해나갔다. 포교 대상지에게 전쟁, 개종, 조공을 바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여 감화나 설교보다는 무력에 의한 포교를 했다. 그러나 일단 무력으로 정복된 지역에 대해서는 관대한 정책을 폈다. 그들이 복종하는 한 별다른 간섭 없이 유화정책을 펴나갔고, 개종하지 않는 사람들도 세금만 내면 차별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이는 비잔틴 제국의 가혹한 지배를 받던 피지배국 국민들을 감동시켰고, 덕택에 별다른 거부반응 없이 이슬람교를 뿌리내리게 할 수 있었다.

아울러 그 교리가 단순하여 많은 유대 인들과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쉽게 동화될 수 있었다는 점 역시 이슬람교가 빠르게 보급될 수 있었던 이유로 거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