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

흑사병

페스트, Plague

중세 말의 경제적 침체를 더욱 가공스럽고 세기말적인 것으로 만든 대재난은 흑사병이었다. 소아시아에서 발생한 흑사병은 제노바 상인에 의해 1347년 말 이탈리아를 거쳐 마르세유에 도착하고, 다시 1348년경에는 프랑스 전체를 휩쓸었다. 당시 아비뇽은 흑사병을 사방으로 유포시킨 교차로 역할을 하였다. 흑사병이 할퀴고 간 도시는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으며, 농촌은 폐허가 되었다. 특히 인구가 밀집된 도시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흑사병
흑사병

흑사병의 치사율은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웠다. 흑사병에 대한 공포는 환자가 참혹하게 죽어가는 모습에서 뿐만 아니라 흑사병 자체에 대한 무지로 인해 더욱 증가하였다. 이 시대에 의사들이 권고한 최선의 처방은 "빨리 떠나라. 최대한 멀리 가라.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늦게 돌아와라."였다. 사람들이 흑사병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성문을 걸어 잠그는 것, 발병한 집에 방역선을 치는 것, 시골로 피난 가는 것, 공기를 정화하기 위해 방향 식물을 뿌리는 것, 채찍고행자의 행렬에 가담하는 것 등이 고작이었다. 당시 도시 곳곳에서 음울한 표정을 짓고 행렬하는 채찍고행자들의 모습은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1348년 프랑스 및 전 유럽에 유행하였던 흑사병
1348년 프랑스 및 전 유럽에 유행하였던 흑사병

원인을 모르는 끔찍한 결과로 인해 엉뚱한 피해자가 나타났다. 중세 이래 차별받아온 유대인이나 문둥병자들이 흑사병을 유포시킨 당사자로 몰린 것이다. 사람들은 흑사병의 원인을 알기 위해 고심했었지만 당시의 의학수준으로 그것은 불가능했다. 파리 대학 의학부는 그것이 천재의 이변 때문이라고 발표했고, 일반인들은 '악마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점차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고 문고리에 독약을 발랐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1321년에 나병 환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습격이 있었고, 유대인에 대한 반감도 증가하여 1349년에는 스트라스부르에서 2천여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아직 의학의 발달이 미비했던 중세 말기, 끔찍한 재앙에 대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이나 해결책을 누구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희생양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그 결과 유대인 학살이나 마녀 사냥이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이처럼 중세 말기는 자연적 재앙에 사람들의 광분이 더해진 세기말적인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