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미 정상 회담

적대 관계에서 우호 관계로

중미 정상 회담

요약 테이블
시대 1972년

한국전쟁 당시 중국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과 전쟁을 벌임으로써 미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했다. 하지만 소련과 대립하게 되자 중국은 미국에 주목했다. 특히 닉슨이 냉전 체제를 청산하자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자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길 원했다. 마침내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양국은 22년에 걸친 적대 관계에서 벗어나 공식적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1950년에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과 영국, 네덜란드 등은 중국 정부를 승인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 서방 국가들은 중국 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중국이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과 전쟁을 벌임으로써 중국과 미국의 관계는 적대적이었다. 한국전쟁 휴전 후에도 미국의 중국에 대한 경제 봉쇄 정책 등으로 적대관계는 지속되었다. 특히 중국은 타이완을 합병하는 데 있어 미국이 최대 걸림돌이라 여겼으며, 유엔 가입 역시 미국의 방해 때문에 거부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주요 적국이라는 중국의 인식은 1960대까지 계속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과 미국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고 양국의 만남이 성사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언제나 그렇듯 양국의 국가 이익상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다.

중국의 등을 민 것은 소련과의 관계 악화였다. 분명 중국은 처음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하면서 소련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며, 소련을 경제 발전 모델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중국과 소련의 우호적인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스탈린 사망 후 지도자로 등장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을 비판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와 적대적 투쟁 관계 대신 평화 공존을 주장했다. 흐루시초프는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는 중국 역시 자신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중국은 이 같은 소련의 변화를 수정주의라고 맹비난했으며, 소련을 대신해 전 세계 사회주의 국가들의 지도자를 자처했다. 이러한 중소 대립은 몇 가지 사건으로 표면화된다. 1959년 7월, 소련은 국방 관련 핵 원조 협정을 취소하고 경제 원조를 중단했으며, 1960년에는 중국 내 소련 기술자들을 철수시켰다. 중국과 소련의 관계 악화는 흐루시초프 실각 후에도 지속되었으며, 급기야 1969년 3월에는 우수리 강의 진보도(珍寶島)에서 양국의 군대가 무장 충돌했다. 최대 동반자인 소련과의 대립이 국가 안전을 위협하는 극한 상황으로까지 치닫자 중국은 소련에 대항하고 견제할 파트너로 미국을 주목했다.

이러한 시기에 1969년 7월 25일 미국 대통령 닉슨(Richard Milhous Nixon)은 긴장과 대결의 냉전 체제를 청산하자는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당시 닉슨은 사실상 실패로 끝난 베트남 전쟁에서 손을 떼고 동아시아의 균형을 가능한 한 미국에 유리하게 유지하길 원했다. 〈닉슨 독트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체제를 불식하고 '데탕트'라는 새로운 국제 질서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미국은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중국과 미국의 관계에 있어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앞서 중국이 소련과 우수리 강 지역을 둘러싸고 영토 분쟁을 일으킬 때 중국의 편을 들었으며, 미국 함대는 타이완 해협 순찰도 이즈음 중단했다. 여기에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기념일 행사에 미국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Edgar Parks Snow)와 함께 열병식을 사열하는 마오쩌둥의 사진을 크게 실었다. 이로써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를 호전시키고자 한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던 중 중미 관계에 큰 전환점이자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일명 핑퐁외교가 일어났다. 1971년 3월, 제3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일본 나고야에서 개최되었다. 중국 선수단은 문화대혁명 이후 최초로 국제경기에 참석한 것이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당시 중국은 미국 선수단과 접촉했을 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자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미국 선수단은 적극적으로 접촉을 시도하며 중국 방문 의사까지 전달했다. 1971년 4월 7일에는 마오쩌둥의 허락하에 중국이 미국 탁구 선수단을 공식적으로 초청했으며, 4월 10일에 미국 선수단 15명이 베이징에 도착했다. 4월 14일, 저우언라이는 인민대회당 동대청에서 열린 미국 탁구 선수단 환영식에서 "작은 탁구공 하나가 지구라는 큰 공을 움직였다."라는 말과 함께 우호적인 중미 관계의 출발을 알렸다. 이후 닉슨은 중국에 대한 경제봉쇄 정책의 해제를 발표했다.

베이징을 방문한 닉슨과 닉슨을 마중 나온 저우언라이
베이징을 방문한 닉슨과 닉슨을 마중 나온 저우언라이

핑퐁 외교 이후 중국의 저우언라이와 미국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파키스탄 루트를 통해 비밀리에 양국 고위층 회담을 추진하여 양국 사이에 긍정적인 교신이 오갔다. 그리고 1971년 7월, 키신저가 미국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했다. 베이징에서 만난 저우언라이와 키신저는 양국의 관계 개선을 다짐하며,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그리고 정식 회담에 앞서 1971년 10월 25일 열린 유엔 총회에서 중국은 타이완을 대신해 유엔 회원국이 되었으며, 동시에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미국은 표면적으로 중국의 유엔 가입에 반대 입장을 취했으나, 이미 준비된 절차상의 조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72년 2월 21일, 닉슨이 베이징 수도 공항에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비행기에서 내린 닉슨은 마중 나온 저우언라이를 향해 걸어가 서로 악수했다. 그리고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닉슨이 도착한 지 약 3시간 정도가 흐른 뒤 마오쩌둥의 서재에서 닉슨과 회견을 가졌다. 당시 마오쩌둥은 고령으로 병세가 악화된 상태였지만, 회견은 약 70분가량 진행되었다. 오후 6시에는 저우언라이와 닉슨의 1차 회담이 열렸으며, 한 시간 뒤에는 닉슨 대통령을 위한 환영 만찬이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그날의 분위기는 시종 화기애애했다.

1972년 2월 26일, 저우언라이와 닉슨은 항저우를 방문 후 다시 상하이로 향했다. 1972년 2월 28일, 양국은 상하이에서 〈중미 공동 성명(상하이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양국은 22년에 걸친 적대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양국은 영토와 주권의 상호 존중, 상호 불가침, 내정 불간섭, 호혜 평등, 평화 공존 등 평화 5원칙에 따라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확립했다. 또한 국제적인 문제에도 이러한 원칙을 기본으로 할 것을 합의했다.

다만 양국은 관계 개선에 있어 최대 걸림돌인 타이완에 대한 합의는 이루지 못하고, 입장만 확인했다.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이며, 타이완은 중국의 1개 성(省)이기 때문에 반드시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타이완에 관한 문제는 내정에 속하므로 다른 나라가 간섭할 권리가 없음을 강조했다. 여기에 미국은 중국의 타이완 통합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하며,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과 타이완이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이처럼 〈중미 공동 성명〉은 양국에 가장 민감한 타이완 문제에서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기 때문에 매우 모호한 성격을 지녔다. 이후 이것은 양국의 완전한 관계 개선을 위한 숙제로 남았다.

양국의 관계 정상화는 타이완 문제 때문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중국은 1954년에 미국과 타이완이 체결한 상호 방위 조약의 파기와 미국의 타이완 정부 승인 취소, 타이완에서의 미군 철수 등을 요구했다. 결국 중미의 상호 접근은 지지부진한 상태를 면치 못했다. 중미 관계는 1977년, 덩샤오핑의 복권과 지미 카터의 대통령 당선 이후에 재개되었다. 그리고 1978년 12월, 중국은 타이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충분한 시간과 평화적인 방법을 거듭 약속했다. 이에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승인하고, 타이완 국민당 정부의 승인을 취소했다.

1979년 1월 1일, 중국과 미국의 국교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이로써 미국은 타이완 주재 대사관을 철수시키고, 1954년 장제스와 체결한 상호 방위 조약도 폐기했다. 그러나 미국에게 타이완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대상이었으므로, 1979년 4월 미국 의회는 '타이완 관계법'을 통과시켜 중국에게 국제법 위반이라는 맹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도 중미 관계는 정치, 경제, 문화 등 다각적으로 발전해 갔다.

ㆍ 1950년 :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인정하지 않다.
ㆍ 1969년 :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무장 충돌로 악화되다.
ㆍ 1972년 : 닉슨이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