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장기적인 안목으로 지구전을 펼친 중국

중일전쟁

요약 테이블
시대 1937년

일본은 만주 침략을 시작으로 아시아 패권을 차지하려는 야욕을 품었다. 일본은 노구교 무력 충돌 사건을 구실로 삼아 화북 지역을 공격하며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중국은 이에 대응하여 지구전을 펼치며 전쟁을 장기화했다. 이후 중일전쟁은 8년간 지속되었고, 진주만 폭격으로 연합국의 총공세를 받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태평양 전쟁 종결과 함께 끝을 맺었다.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만주 진출에 성공했다. 1928년에 난징 국민 정부가 성립되고, 1929년 대공황이 세계를 휩쓸자 일본은 만주, 몽골에 대해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냈다. 1931년 9월 18일 밤, 심양 북쪽 유조구(柳條溝)의 만주 철도선이 폭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일본 관동군의 자작극이었으나, 일본 관동군은 이를 중국군의 소행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만주 전쟁을 일으켜 장쉐량(張學良)의 북대영을 비롯한 중국 군사 기지를 공격하고 만주 철도 근처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그러나 당시 공산당 토벌전을 지휘한 장제스는 군대를 이동함으로써 자신의 기반이 흔들릴 것을 염려해 장쉐량에게 부저항 정책을 지시했다. 또한 이를 국제연맹에 제소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지시했다.

중국이 일본의 침략 행위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동안, 일본은 1932년 2월에 만주 지역 대부분을 점령했고, 급기야 1932년 3월 1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를 내세워 괴뢰 정부 만주국을 설립했다. 중국의 제소에 따라 리턴 조사단을 파견한 국제연맹은 일본에게 상하이와 만주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국제연맹의 권고를 무시하고 러허성까지 점령한 후,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이로써 일본은 너무나 손쉽게 만주를 중국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일본이 손쉽게 만주 지배권을 획득한 것은 장제스가 1930년부터 대규모 포위전을 통해 공산당을 토벌했기 때문이다. 장제스는 '일본을 피부병, 공산당을 심장병'에 비유하면서 일본을 몰아내는 것보다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했다. 그리하여 1933년 5월 25일, 난징 정부는 일본과 당고(塘沽)에서 정전 협정을 맺고 다시 공산당 소탕 작전에 나섰다. 그러는 동안 일본은 중국 침략 계획을 착실히 수행했다. 1935년에는 급기야 허베이성에 괴뢰 정부를 세워 화북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이처럼 난징 정부가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하고 일본의 침략을 묵인하며 일본의 세력 확대를 방관하자 중국 내에서 항일 운동이 활발해졌다. 특히 1935년, 허베이성에 일본 괴뢰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중국의 식민지화에 대한 위기의식이 더욱 고조되었다.

1935년 12월 9일, 학생들은 공산당과 함께 대규모 항일 시위를 벌였으며, 이는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공산당은 1935년에 이미 8·1선언을 통해 내전을 중지하고 민족이 연합해 일본에 대항하자는 결의를 밝혔다. 공산당은 이듬해 장제스와 연합해 항일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장제스의 공산당 토벌 의지는 쉽게 변하지 않았고, 공산당 포위 작전은 계속되었다.

한편 1936년에는 만주 전쟁으로 근거지를 잃은 장쉐량의 동북군이 공산당에 대한 제6차 포위 작전을 수행하고자 시안(西安)에 주둔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인은 중국인끼리의 싸움을 멈추고 모두 항일 투쟁을 하자."라는 공산당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에 전쟁을 중지하고 공산당의 저우언라이와 비밀 회동을 하고, 학병대를 조직하는 등 항일 투쟁을 준비했다. 일본이 내몽골을 독립시키고자 수원성(綏遠省)을 공격했을 때 그는 장제스에게 중국군 지원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장쉐량의 제안을 무시하고 공산당 토벌에 집중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공산당 토벌전에 나서지 않겠다면 푸젠성, 안후이성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장쉐량은 두 가지 명령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로써 장제스에게 반감을 가졌다.

1936년 12월,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군의 군기를 독려하기 위해 시안을 찾았다. 그는 장쉐량에게 공산당 토벌을 계속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항일 운동을 탄압했다. 그러나 시안의 난징 정부 군대에는 항일 운동의 여론이 이미 형성된 상태였다. 이에 장쉐량은 12월 12일, 양호성과 함께 장제스의 숙소에 친위대를 보내 장제스를 체포하고 감금했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8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하고 전국에 공표했다.

첫째, 난징 정부를 개조하고 각 당 각 파를 받아들여 구국에 임한다.
둘째, 모든 내전을 중지한다.
셋째, 상하이에서 체포한 구국 지도자들을 석방한다.
넷째, 모든 정치범을 석방한다.
다섯째, 민중의 모든 애국 운동에 자유를 준다.
여섯째, 민중의 정치적 자유의 권리를 보장한다.
일곱째, 쑨원의 유지를 실행한다.
여덟째, 즉각 구국회의를 소집한다.

장제스 시안 감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오빠 쑹쯔원(宋子文)과 함께 시안으로 왔다. 그들은 장쉐량이 파견한 저우언라이를 만나 8개 조항 수용을 약속했다. 이로써 장제스는 12월 25일에 석방되었다. 장쉐량과 공산당은 항일 전쟁의 지도자로 장제스 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장제스가 없는 국민당을 친일 인사들이 장악할 경우 오히려 일본의 침략에 유리할 것이라고 염려했던 것이다. 난징에 돌아온 장제스는 약속대로 내전을 중지하고 공산당과 여러 차례 회담을 가졌다.

그런데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교외의 노구교(盧溝橋)에서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작은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당시 양쪽은 협정을 맺어 사건을 평화롭게 매듭지었다. 그러나 전쟁 발발의 구실을 찾던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화북 지역의 병력을 증강시키고 중국 침략 계획을 전개했다. 7월 28일, 일본은 화북 지역을 공격하며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중일전쟁 발발 1개월 후 일본은 베이징과 톈진 이북을 점령했다. 일본이 빠른 속도로 중국을 점령해 오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교섭을 서둘러 끝내고 장제스를 육해공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또한 공산당의 홍군을 8로군으로 개칭하여 명목상 국민당군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제2차 국공합작이 현실화되었으나 양당 간의 비방은 여전하여 완전한 통합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1937년 12월, 상하이에 입성하는 일본군
1937년 12월, 상하이에 입성하는 일본군

일본의 전략은 속전속결이었다. 전쟁 발발 1개월 만인 8월 4일에 베이징을 점령한 일본은 계속 남하해 상하이를 거쳐 12월 13일에는 난징까지 점령했다. 일본은 중국인의 항일 의지를 꺾고자 난징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2개월 동안 자행된 이 학살이 역사상 악명 높은 난징 대학살로, 일본군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30만 명을 학살했다. 30만 명은 중국인의 주장이며,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난징 대학살의 희생자를 12만 명으로 판결했다. 당시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했을 때 난징 시민의 수는 약 60만 명이었고, 희생자 수는 전체의 5분의 1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희생자의 수에 차이가 있더라도 일본군 만행의 죄질에는 차이를 둘 수 없다. 이러한 일본의 만행은 학살에 동참한 일본 군인, 일본 종군기자, 외국 종군기자들에 의해 세계에 알려졌다. 한편 일본은 1938년 광저우를 점령한 데 이어 무한까지 점령했다.

난징 대학살
난징 대학살

사실 일본은 장제스가 중국의 내분을 통합하기 전에 장제스의 직속 부대를 분쇄하고, 일본 경제에 부담을 주기 전에 전쟁을 끝낼 요량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의 전략을 간파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마오쩌둥이었다. 그는 항일 투쟁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보고 지구전을 펼칠 것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일본과의 결정적인 전투를 피했으며, 일본군의 포병이나 기계화 부대가 실력을 발휘할 수 없는 내지의 언덕이나 산에 진을 쳤다. 전선이 장기화될수록 불리하다는 것을 알아챈 일본은 중국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중국군을 봉쇄시키고자 했다. 또한 점령지 난징에 왕자오밍을 내세운 괴뢰 정권을 수립해 중국 내부 분열을 꾀했다. 하지만 넓은 대륙을 바탕으로 한 중국군과 중국인의 끈질긴 항쟁으로 두 계획은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일본의 예상대로 일본은 장기전의 수렁에 빠졌다.

일본군과 비교해 병력에서 열세였던 중국군은 일본군과 정면으로 맞서면서, 적의 뒤를 치고 후퇴하는 게릴라 전법을 구사했다. 여기서 국민당은 일본군에 정면 대응했고, 공산당의 8로군과 신사군(新四軍)은 일본군의 후방을 공격하며 자신들의 근거지를 형성해 나갔다. 이러한 전술로 중국은 일본의 속전속결을 저지했으며,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었다.

한편 중일전쟁의 교착 상태는 공산당의 8로군과 신사군의 병력 증강으로 이어졌다. 이는 공산당이 항일 전쟁을 하면서도 근거지 확보를 게을리 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공산당 세력의 급성장은 장제스를 다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1939년, 결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다시 한 번 충돌했다. 1941년에는 환남(晥南)에서 국민당과 신사군이 전투를 벌이면서 제2차 국공합작을 사실상 붕괴시켰다. 환남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공산당은 충격에 빠졌지만, 국민당에게 보복하지는 않았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면서 중일전쟁의 전제가 달라졌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영국과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여기에 중국도 가담했다. 이듬해, 중국은 영국군과 함께 일본군을 공격해 타격을 주었으며, 일본이 후난성 서부를 공격했을 때에는 연합국 공군의 지원을 받아 승리를 거두었다. 1945년, 중국, 미국, 영국은 일본에게 항복을 독촉했으나 일본은 끝까지 거부했다. 이에 미국은 8월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으며,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로 진격했다. 중국도 가세하여 마오쩌둥은 '일본에 대한 최후의 일전'이라는 성명을 통해 항일 투쟁을 독려했다. 공산당의 8로군과 신사군도 일본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명령했다. 연합국의 총공세를 맞은 일본은 8월 15일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9월 2일에 비로소 항복 문서에 조인했다. 이로써 태평양 전쟁이 종결되었고, 8년간 지속된 중일전쟁도 끝을 맺었다.

ㆍ 1932년 : 일본이 만주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다.
ㆍ 1938년 :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이 광저우에 이어 무한까지 점령하다.
ㆍ 1941년 :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