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통일

칭기즈 칸의 정복 사업

몽골 통일

요약 테이블
시대 1206년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 민족은 13세기에 칭기즈 칸이 등장하면서 제국으로 성장했고, 중국의 역사는 유라시아 대륙으로 확장되었다. 이후 칭기즈 칸은 호라즘을 정벌하고 남쪽으로는 인더스 강, 서쪽으로는 카스피 해를 넘어 남부 러시아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전 지역을 몽골 제국의 영토로 확보하였다.

13세기, 중국 역사의 무대는 중국 대륙을 넘어 유라시아로 확장되었다. 이것은 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 민족이 통일을 이루고 정복 사업을 펼쳤기 때문이며, 그 중심에 칭기즈 칸 테무친이 있었다.

몽골 족은 테무친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 역사에서 두드러지지 않았다. 원래 아르군 강 유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 민족은 당나라 시대 흑룡강 지류인 살카 강 부근에서 유목 생활을 했으며, 당나라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몽올이라고 불렀다. 몽골 족은 11세기 거란의 요나라가 발흥할 때는 요나라에, 12세기 여진족의 금나라가 발흥할 때는 금나라에 복속되었다. 게다가 이때까지 통일을 이루지 못해 동쪽의 타타르 족, 서북쪽의 메르키드 족, 서남쪽의 케레이트 족, 남쪽의 웅구트 족, 서쪽의 오이라트 족 등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때에 따라 서로 돕기도 하고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족 간의 패권 다툼은 12세기 말 테무친이 등장하면서 그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몽골 제국을 확장시킨 칭기즈 칸
몽골 제국을 확장시킨 칭기즈 칸

몽골 왕족인 보르지긴 족의 후예로 태어난 테무친은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당시는 금나라가 중원을 지배했던 때로, 금나라는 유목 사회에서 강력한 집단이 출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족 간 견제와 경쟁을 부추겼다. 그리하여 금나라에 복속된 타타르 족이 금나라에 대한 충성의 증표로 보르지긴 족을 공격하여 수장을 살해했으며, 이후 보르지긴 족의 수장이 된 테무친의 아버지 예수게이를 독살했다. 예수게이의 죽음으로 테무친이 집안의 가장이 되었으나, 곧 예수게이의 정적인 타이치우트 일가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보르지긴 족에 대한 배척으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낸 테무진은 생존을 위한 싸움을 반복하며 '최고의 쇠로 만든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처럼 스스로를 단련했다.

테무친은 비록 권력 구도에서 밀려났지만, 당시 몽골 지역의 강력한 통치자인 케레이트 족의 토그릴 완 칸 아래에서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갔다. 그는 토그릴 완 칸의 지원을 받아 어릴 적 친구인 자무카와 동맹을 맺고, 자신의 아내 보르테를 납치했던 메르키트 족을 공격했으며, 자신의 재산을 약탈한 주르킨 족의 귀족들을 공격했다. 그가 주변 부족들을 굴복시키자 부족장들은 그를 칸으로 추대하고자 했다. 1189년, 드디어 테무친은 부족 연합회의 '쿠릴타이'에서 칸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당시 그의 지위는 단순히 생존을 위협하는 다른 부족들로부터 부족을 지켜 주는 존재에 지나지 않아서, 아직까지는 중국 역사에서 말하는 '황제'와 거리가 있었다.

테무친의 본격적인 정복 사업은 타타르 족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테무친은 타타르 족이 금나라에게 한창 공격받고 있을 때 타타르 족의 배후를 공격해 격파함으로써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이후 테무친은 동맹 관계에 있던 자무카가 배신하자 물리친 뒤 그의 세력을 흡수해 버렸다. 또한 토그릴 완 칸마저 자무카의 이간 정책으로 테무친에게 대항하자, 1203년에는 케레이트 족을 격파해 정적이 될 만한 사람들은 모두 살해하고 나머지는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여세를 몰아 1204년에 나이만 족을 격파했으며, 1205년에는 메르키트 족을 멸망시켰다. 이로써 테무친은 몽골 전역을 통합했다. 1206년, 오논 강 인근에서 쿠릴타이가 소집되었고, 테무친은 나라 이름을 '예케 몽골 울루스'라 하고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황제인 칭기즈 칸의 칭호를 얻었다.

몽골 제국 수립 후 칭기즈 칸은 내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봉건 제도와 유사한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그는 씨족적 공동체를 일소하고 십호, 백호, 천호, 만호 조직을 만들어 군사, 행정 조직을 개편했다. 그리고 천호의 수를 95개로 하고, 그중 88개 천호의 수장에 공신들을 임명했다. 또한 법전을 반포하고 몽골 문자를 창제하여 국가 체제를 완비했다.

내부 안정을 이룬 칭기즈 칸은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시 중국은 서하, 금나라, 남송이 정립한 상태로, 칭기즈 칸은 우선 상대적으로 약한 남쪽의 서하를 공격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1209년, 칭기즈 칸은 서하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몽골은 이미 1205년부터 서하를 공격했으나 이번 공격은 특히 대대적으로 감행되었다. 서하는 금나라에 원군을 요청했으나 금나라가 이를 거절했고, 결국 서하는 몽골의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굴복하여 조공을 약속했다.

칭기즈 칸의 다음 공격 대상은 금나라였다. 1211년, 군대를 직접 이끌고 공격한 이후 뒤 매년 금나라를 공격해 금나라의 주를 점령해 나갔다. 급기야 1214년에 칭기즈 칸은 금나라 수도를 포위하기에 이르렀고, 마침 내분을 겪고 있던 금나라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공주를 바치는 조건으로 강화를 요청했다. 이에 칭기즈 칸은 강화를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했다. 한편 몽골의 공격에 제대로 반격을 못한 금나라는 수도를 옮겨 쇄신을 꾀하고자 했다. 이에 금나라는 중도(中都)를 버리고 변경(汴京)으로 천도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은 이를 자신에 대한 도발로 간주하고, 1215년에 금나라를 재침하여 중도를 함락했다. 이후 칭기즈 칸은 부장 무칼리에게 금나라 정벌을 일임하고, 자신은 서방의 호라즘 제국 정벌에 나섰다.

인더스 강 유역을 지나는 칭기즈 칸
인더스 강 유역을 지나는 칭기즈 칸

칭기즈 칸의 호라즘 제국에 대한 초기 의도는 무력 정벌보다는 평화적 교역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1218년, 칭기즈 칸의 명으로 제베가 서요를 멸망시키자 몽골 제국은 호라즘 제국과 국경을 맞대었다. 칭기즈 칸은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부유한 나라 호라즘과 교역을 통해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몽골은 당시 금나라와 전쟁 중이었으므로 최대 강국이었던 호라즘 제국과 동시에 전쟁을 하는 것이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칭기즈 칸은 450여 명의 상단을 호라즘 제국에 보냈다. 그러나 상단들은 호라즘 국왕의 묵인 아래 모두 살해당했다. 이에 칭기즈 칸은 시비를 따지고 사과를 받고자 사절단을 파견했지만, 그들마저도 호라즘의 무장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 칭기즈 칸은 이 모든 사건을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고, 1219년에 직접 대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칭기즈 칸의 호라즘 정복 전쟁은 잔인했다. 칭기즈 칸은 군사들에게 "여자와 개를 제외하고 모두 죽여라."라고 명령했고,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공격해 호라즘의 수도 사마르칸드를 점령했다. 그럼에도 몽골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다. 1225년에는 남쪽으로 인더스 강 유역, 서쪽으로 카스피 해를 넘어 남부 러시아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전 지역을 영토로 가졌다.

1226년, 호라즘을 정복한 칭기즈 칸이 귀환했다. 하지만 그의 정복 사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227년, 칭기즈 칸은 호라즘 정복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절한 서하에 대해 재침 명령을 내렸다. 칭기즈 칸은 몽골 제국에 대항하는 세력에게 단 한 줌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으며, 완강하게 저항하는 서하 인을 말살하다시피 했다. 서하를 멸망시킨 칭기즈 칸에게 남은 것은 금나라와 남송뿐이었다. 그는 곧 금나라 공격에 착수했다. 그러나 1227년 여름, 서하 정복 전쟁 때 당한 낙마 사고에서 얻은 병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병사했다.

유라시아 대륙을 일대 폭풍으로 몰아넣은 칭기즈 칸의 운명은 여기에서 끝났지만, 그의 정복은 자손에게 이어졌다. 칭기즈 칸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그중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대칸의 자리를 계승하여 금나라 정벌에 나섰다. 1233년, 몽골군이 금나라의 수도 변경을 함락하자 그제야 위기감을 느낀 금나라 애종은 남송과 연합하여 몽골군을 물리치고자 했다. 남송에 도착한 금나라 사신은 애종의 말을 전했다.

"이미 몽골은 40여 개의 나라를 멸망시켰고, 이제 그들의 창칼이 우리를 겨누고 있소. 잇몸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 금나라가 멸망한다면 그다음은 분명 송나라일 것이오. 그러니 금과 송이 연합하여 몽골의 공격을 막아내야 하오."

하지만 남송은 이미 몽골과 연합하여 몽골의 금나라 공격을 원조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1234년, 몽골과 남송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금나라는 애종이 자결하면서 120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하여 중국 대륙에는 이제 몽골 외에 남송만이 남았으며, 금나라 애종의 말처럼 '잇몸을 잃은' 남송은 최후의 운명에 놓였다.

ㆍ 1219년 : 칭기즈 칸이 대군을 이끌고 서방 원정에 나서다.
ㆍ 1227년 : 서하 정복 당시 낙마 사고를 입은 칭기즈 칸이 병사하다.
ㆍ 1234년 : 몽골과 남송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금나라가 12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