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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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표기 언어 貞陵 동의어 사적 제208호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 씨(?~1396)의 능으로 29만 9,573제곱미터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시대 풍습에 따라 향처(고향의 부인), 경처(개경의 부인)를 두었는데 강 씨는 경처로 황해도 곡산부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이다.

이성계는 원 동녕부를 원정해 공을 세우고 남해 일대 왜구를 수차례 토벌하면서 고려 중앙인 개성에 진출했다. 하지만 지방 토호라는 출신 때문에 한계를 느꼈고 개성의 권문세족 출신인 강 씨와 정략적으로 혼인한 것이었다.

태조와 신덕왕후가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우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어느 날, 말을 달리며 사냥하다가 목이 타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처자에게 물을 청했는데,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 한 움큼을 띄워 이성계에게 건네주었다. 이성계가 버들잎을 보고 화를 내자 처녀는 "갈증이 심해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이성계는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반해 그녀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마자 현비로 책봉되었고 이성계와의 사이에서 방번, 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본래 태조의 원비는 신의왕후였으나 태조 즉위 전인 고려 공양왕 3년(1391)에 사망했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최초 왕비는 신덕왕후다.

남다른 사랑을 주던 신덕왕후가 갑자기 사망하자 태조는 도성 안에 왕릉 터를 정하는 것은 물론 강 씨 봉분 우측에 자신의 봉분인 수릉을 정하고 능호를 정릉으로 정했다. 오늘날은 정릉이 있던 곳이라 정동이라 부른다.

그동안 신덕왕후의 정릉은 막연하게 서울 한복판인 지금의 영국대사관 자리나 경향신문 문화체육관 근처로 추정해왔다. 그런데 신덕왕후의 능 석물로 보이는 문인석이 서울 중구 정동 소재 주한 미국대사관 영내에서 발견되면서 정릉의 최초 위치를 그곳으로 보기도 한다.

추후의 일이지만 태종은 정릉의 초장지(철거지)에 있던 정자각을 옮겨 태평관 누각을 짓고 봉분의 흔적도 없앴다. 일반적으로 왕실 초장지는 천장 후에도 사가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봉분을 남겨두지만 태종은 이를 무시했다. 다만 문·무인석은 그대로 묻어두라고 명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최초의 문·무인석은 이 지역 주변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신덕왕후는 조선 최초의 왕비였고, 정릉은 조선 최초의 왕릉이므로 태조가 공을 들여 조성했지만 제3대 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정릉의 위상은 바뀐다. 태종은 정릉이 도성 안에 있고 능역이 광대하다는 점을 문제 삼아 능을 현재의 정릉 자리로 옮기고 능역 100걸음 근처까지 주택지를 허락해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집을 짓게 했다. 또한 왕비의 제례를 폐하고, 봄·가을 중월제(中月祭)로 격하했다.

태종의 신덕왕후에 대한 폄하는 이뿐이 아니다. 1410년 8월 홍수로 흙으로 만든 광통교가 무너지자 정릉의 석물로 돌다리를 만들도록 허락했다. 청계천이 복원될 때 광통교도 모습을 드러내 조선 최초의 병풍석과 방울·방패 조각을 확인할 수 있다. 600여 년이 넘었음에도 보존 상태가 매우 좋으므로 청계천을 지날 때 꼭 한 번 들러보기 바란다.

신덕왕후의 능을 이방원이 푸대접한 이유는 그녀와의 알력 때문이다. 고려 말 권문세가였던 신덕왕후 강 씨의 가문은 이성계에게 정치 무대의 중앙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었고, 신덕왕후는 슬기롭고 사리가 밝은 여인이었다. 태조에게 신덕왕후는 충실한 내조자를 넘어 정치적 동지였던 셈이다.

문제는 강 씨가 실질적인 개국 공신인 데다 여세를 몰아 자신의 아들인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해 태조의 뒤를 잇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녀의 이런 조치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 남은 등이 그녀의 편이었고 무엇보다도 태조 역시 자신의 뜻을 따랐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의 왕위 계승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졸지에 계모의 아들인 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긴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신덕왕후의 아들인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동복형인 방간이 자신을 치려고 하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결국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곧바로 신덕왕후를 깎아내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태조와 자신의 친어머니 신의왕후를 함께 모시고, 신덕왕후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해 신위를 모시지 않았다. 또한 기제는 서모나 형수의 기신제의 예에 따라 3품관으로 대행하게 했다.

이런 대우는 태종 이후에도 지속되었는데 200여 년 뒤인 선조 14년(1581) 삼사에서 신덕왕후의 시호와 존호를 복귀하고 정릉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신들은 태조 능에 있는 건원릉 비에 신의·신덕왕후가 열거되어 있고, 강 씨가 차비로 서술된 점, 태조가 강비를 시책에 칭송한 것을 감안하면 후대인들이 부묘를 폐하고 능을 옮긴 것은 천리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그 뒤 현종 10년(1669) 송시열 등이 정통 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 이념을 강조하면서 복위를 주장하자, 마침내 그녀의 신주가 종묘에 봉안된다. 신주를 종묘에 안치하던 날 정릉 일대에 소낙비가 쏟아졌는데, 이 비를 백성들은 '세원지우(洗寃之雨)'라 불렀다.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이다.

정릉은 입구부터 다소 다르다. 입구의 금천교는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대표적 조형물로, 주변에 다양한 나무들이 서식하고 있다. 정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참도가 직선이 아니라 ㄱ자로 꺾여 있다.

봉분에는 난간석과 병풍석이 없으며 혼유석, 문인석, 석마, 각각 1쌍의 석양과 석호가 있다. 조선 초대 국모의 능이라 할 수 있는 정릉은 다른 왕비의 능에 비해 상설의 규모가 작고 초라하며 석물도 원형이 아니다. 고려 공민왕릉 양식을 충실히 따른 사각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두 개의 고석만 옛 능에서 옮겨온 것인데 장명등은 상부의 주두가 사라졌다. 당초 능을 조성했을 때는 고려 공민왕처럼 화려한 병풍석과 난간석은 물론 무인석까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09년 약수터 근처에서 소전대가 발견되어 원래의 자리인 정자각 좌측으로 옮겼다. 소전대는 조선 초기의 능인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 정릉에만 있었으며 축문을 태우던 곳인데, 정조 때 작성한 『춘관통고각주1) 』에 위치를 기록해놓아 쉽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정릉에서 북악터널 쪽으로 가는 도로 좌측에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원찰 흥천사(興天寺)가 있다. 원찰이란 창건주가 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사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우는 사찰을 말한다. 이성계는 강 씨 사망 후 직접 정릉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행차를 조석으로 바쳤으며, 정릉의 아침 재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었다고 한다.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원찰 흥천사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원찰 흥천사

흥천사는 연산군 때 불타 폐허로 방치되다 정조에 의해 현재 자리에 새로 지어졌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인 극락보전을 비롯해 명부전, 용화전, 칠성각, 독성각, 만세루, 승방, 대방, 일주문, 종각이 있다. 이성계가 아침마다 종소리를 들었던 흥천사 대종(보물 제1460호)은 동대문(흥인문)을 거쳐 광화문 종루로 옮겼다가,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으로 옮겼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사찰 내에는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5세 때 쓴 글씨가 남아 있고,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가 6·25전쟁 때 피난 생활을 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 이창환, 「태조 승하 후 파묘 이장 석물은 광통교 축조에 사용」, 『주간동아』, 2010년 4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