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릉

태릉

사적 제201호, 泰陵

문정왕후의 능

태릉은 제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1501~1565) 윤 씨의 능으로 봉분 1기만 있는 단릉이다. 문정왕후는 중종과 인종, 명종 3대에 걸쳐 왕비와 대비로 있으면서 정권에 개입하는 등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조선을 회오리바람 속으로 몰아넣은 인물로 알려진다.

문정왕후에 관한 일화는 워낙 많지만 을사사화와 연계된 정난정의 일화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다. 그녀의 아버지 정윤겸은 부총관을 지냈지만 어머니는 관비 출신이므로 위계가 철저한 조선에서 그녀가 일어설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난정은 이 기회를 반전하기 위해 우선 기생이 되었다. 고관과 자주 어울릴 수 있는 기생은 격이 낮은 여자가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녀는 바람대로 문정왕후의 동생인 소윤 윤원형의 첩이 되었다. 마침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계는 모두 윤원형 쪽으로 쏠린다.

곧바로 윤원형은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종의 척족 윤임이 그의 조카 봉성군에게 왕위를 주려 한다고 무고한다. 이는 인종의 외척인 대윤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의 권력 다툼으로, 결국 대윤의 우두머리인 윤임 등이 반역 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고 만다. 이를 '을사사화'라고 한다.

이 기회를 이용해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 김 씨를 몰아낸 다음 적처각주1) 가 되고,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해 전매·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한다. 그럼에도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했고, 1553년에는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이 되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정난정에 대한 사가들의 평은 비난으로 꽉 차 있지만 그녀는 윤원형을 움직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 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했다. 당시로서는 신분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으로 좌절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문정왕후는 당의 측천무후, 청의 서태후와 비교될 정도로 억척같은 집념으로 아들을 왕으로 만든 여인이다. 그러나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8년 동안 국정을 지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문정왕후의 가장 큰 피해자로 그의 아들인 명종이 손꼽히기도 한다. 왕이 된 아들에게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겠느냐?"라며 호통을 치고, 왕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회초리까지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종을 눈물로 왕위를 지킨 왕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녀의 월권은 적어도 국왕의 권위를 누르거나 자신의 욕심만을 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수렴청정을 끝내며 문정왕후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우리나라가 불행하게도 두 대왕이 연이어 사망했으므로, 주상이 어린 나이에 보위를 이어 국정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부득이 섭정을 하기는 했으나, 미안한 마음을 일찍이 하루도 잊지 못했다. 더구나 재변이 계속 이어지고 여러 변고가 함께 발생함이 지금과 같은 적이 없었다. 나는 항상 나의 부덕한 소치 때문이 아닌가 해 주야로 근심하고 염려했으며 2~3년 이래로는 항상 성상께 귀정(歸政)하고자 했으나, 아직 주상의 학문이 성취되지 못해 모든 기무를 홀로 결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굳이 사양하는 까닭에 머뭇거리다가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신도와 어도로 나누어진 태릉 참도
신도와 어도로 나누어진 태릉 참도

그러나 문정왕후는 남편인 중종 옆에 묻히고 싶었는지 원래 장경왕후의 희릉(고양시 서삼릉 내) 우측에 있던 중종의 능을 정릉(현재의 강남구 삼성동) 터로 옮겨놓고, 자신도 그 옆에 묻힐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정릉 주위의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 자주 침수되자, 명종이 장마철에 물이 들어온다는 명분을 대고 태릉에 안장해 결국 그녀의 뜻은 무산된다.

태릉은 조선 왕릉 가운데 능침과 정자각의 거리가 가장 길며, 기를 모아 뭉치게 한다는 능침 앞 강(岡)을 약하게 한 것이 특이하다. 상설은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는데 봉분 아래에는 구름과 십이지 신을 의미하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병풍석 위의 만석 중앙에는 12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12간지가 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이유는 병풍석을 없애고 신상을 대체하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여기에는 신상과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어 주목할 만하다.

문·무인석은 목이 짧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매우 큰 형태다. 문인석은 높이가 260센티미터로 사람의 실제 키보다 크며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하는 복두 차림이다. 두 손으로는 홀을 공손히 맞잡고 있는데, 좌측 문인석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반면 우측의 문인석은 반대 자세다. 일반적으로 좌우 문인석이 홀을 잡는 방법이 동일한데 이곳은 예외다.

무인석은 문인석과 비슷한 크기이지만 얼굴이 크고 방울눈에 유난히 큰 코와 우락부락한 표정이 특징이다. 문·무인석 모두 얼굴과 몸통의 비례가 1대 4 정도로 머리 부분이 거대하다. 학자들이 이들 석상에 큰 점수를 주지 않는 이유는 얼굴 부분을 제외하고 입체감이 결여되어 사각기둥이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정자각은 6·25전쟁 시 파손되어 석축과 초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94년에 복원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전과 그 앞의 배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태릉에서는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금천교를 만날 수 있으며 태릉의 소나무 숲은 신림(神林)으로 불릴 만큼 울창해 도시에서 얻을 수 없는 풍취를 느끼게 한다.

임진왜란 직전 조영된 태릉은 효인이라는 사람이 능침 안에 금은보화가 많다고 고자질해 1593년 1월 왜군이 기마병 50명을 동원해 도굴하려 했으나, 삼물의 회(灰)가 너무 단단해서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태릉 정자각
태릉 정자각

참고문헌

  •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 ・ 이창환, 「[王을 만나다·24] 태릉(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 『경인일보』, 2010년 3월 11일.
  • ・ 이창환, 「조선 왕실의 측천무후 50여 년간 국정 쥐락펴락」, 『주간동아』, 2010년 8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