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록파

1940년대 한국문학사적 특징

청록파

국어말살정책 속 시를 통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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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1946년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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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록집』
  2. 조지훈
  3. 박목월
  4. 박두진

『청록집』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 사이에 『문장』을 통해 문단에 나온 조지훈 · 박목월 · 박두진이 그 동안의 서정 시편들을 모아 1946년 여름에 들어 공동 시집 『청록집』을 펴낸다.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이 공동 시집의 제명 『청록집』은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따온 것이다. 시집은 주로 세 사람의 『문장』 추천 작품들로 채워지는데, 박목월 편에는 「임」 · 「윤사월」 · 「청노루」 · 「나그네」 등 15편, 조지훈 편에는 「고풍 의상(古風衣裳)」 · 「승무(僧舞)」 · 「완화삼(玩花杉)」 등 12편, 박두진 편에는 「묘지송(墓地頌)」 · 「도봉(道峰)」 · 「설악부(雪岳賦)」 등 12편이 실려 모두 합쳐 39편의 시로 엮인다.

조지훈 · 박목월 · 박두진이 자신들의 서정 시편들을 모아 발간한 공동 시집 〈청록집〉
조지훈 · 박목월 · 박두진이 자신들의 서정 시편들을 모아 발간한 공동 시집 〈청록집〉

박목월 · 조지훈 · 박두진 세 시인은 애초에 특별한 유파 의식을 바탕으로 공동 시집을 펴낸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시에 함께 나타나는 소재의 뚜렷한 자연 지향성, 그리고 일제가 국어 말살 정책으로 숨통을 조이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말의 리듬과 토속적 아름다움을 잘 살려낸 점 때문에 세 시인은 공동 시집 발간 뒤 ‘청록파’로 불리게 된다. 알고 보면 세 사람은 이 합동 시집 한 권을 낸 것 외에는 특별히 행보를 같이한 적이 없다.

〈청록집〉 본문에 들어 있는 세 시인의 모습
〈청록집〉 본문에 들어 있는 세 시인의 모습

그럼에도 청록파가 하나의 유파로 사랑받으며 오랫동안 한국 문학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30여 년에 걸친 일제 강점기가 막을 내리면서 온통 정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른 시대 배경 속에서 정치색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이들의 작품이 오히려 대중의 감수성을 건드린 것과 관련이 깊다. 문학 분야에서도 정치적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좌우 이념의 투쟁으로 점철된 해방 공간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골치 아픈 ‘정치시’보다는 서정시에서 뜻밖의 따뜻한 안식과 위로를 찾은 것이다. 이제 그만 시끄러운 현실을 빠져나가고 싶은 욕구를 절실히 느낀 당대인의 현실 도피 심리에 『청록집』이 내세운 ‘자연의 발견’각주1) 이라는 명제는 썩 훌륭한 출구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일부 비평가는 ‘청록파’의 시들이 지나치게 현실을 배제한 서정 일변도이며, 너무 정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사상의 격류 속에서도 순수 서정의 시 세계를 지키려고 애쓴 청록파 3인
사상의 격류 속에서도 순수 서정의 시 세계를 지키려고 애쓴 청록파 3인
〈청록집〉 출판 기념회(1946. 9.)에서
〈청록집〉 출판 기념회(1946. 9.)에서

조지훈

조지훈(趙芝薰, 1921~1968)은 본명이 동탁인데, 1921년 경북 영양군에서 태어난다. 성균관 유생 출신의 한학자인 할아버지와 개화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익힌 그는 단시일에 중학 과정을 혼자 공부한 뒤 1938년 혜화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다. 학우지 『백지』를 통해 습작 활동을 하던 그는 같은 학교 2학년 때 『문장』 4월호에 투고한 시 「고풍 의상」으로 청록파 중 가장 먼저 초회 추천을 받는 영광을 안게 된다. 그 뒤 「승무」 · 「봉황수」 · 「향문」 등의 작품으로 세 번의 심사를 거쳐 “자연과 인공의 극치”각주2) 를 이룩한 시인이라는 찬사를 들으면서 이듬해인 1940년 2월, 박두진보다 한 달 늦게 추천 과정을 완료하고 등단한다. 그는 유교 분위기에서 성장한 배경과 불교 체험의 바탕 위에서, 「승무」와 「봉황수」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적 연면성(連綿性)을 드러내는 고전적 미의 세계에 천착하는 경향으로 문단의 주목을 끈다.

1960년대의 조지훈
1960년대의 조지훈

1940년께 조지훈은 「아침」 등의 시편을 쓰지만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오대산에 들어가 월정사 강원(月精寺講院)의 외전 강사(外典講師)로 일하며 당시(唐詩)와 불경(佛經)을 탐독하는 등 현실 세계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관조적 생활을 한다. 이 무렵에 조지훈은 잠시 산에서 내려와 경주에 있던 박목월을 찾아가는데, 박목월은 그 첫 만남을 이렇게 돌아본다.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은 1940년 봄이었다. 그의 나이 21세, 우리가 『문장』지 추천을 거친 이듬해였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지훈을 만난 일이 없었다.······ 그가 온다는 전보를 받고 ‘조지훈 환영’이라는 깃발을 들고 역으로 나갔다.······ 밤물결처럼 치렁치렁한 장발을 날리며 경주 역두에서 내게로 걸어오던 지훈은 틀림없이 수수한 흰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박목월, 「처음과 마지막 ― 지훈에의 회상」, 『사상계』(1968. 7.)

이렇게 처음 만난 다음, 해방 뒤인 1946년 서울 성북동 조지훈의 집에서 박두진까지 합쳐 세 사람이 모인다. 이 자리에서 조지훈 · 박목월 · 박두진은 공동 시집 발행에 뜻을 모으고, 박두진이 근무하던 을유문화사를 통해 『청록집』을 펴내기에 이른다.

1940년께 오대산 월정사 불교 강원 강사 시절
1940년께 오대산 월정사 불교 강원 강사 시절

조지훈은 시 창작에 힘쓰는 한편, 1946년 4월 4일 청년문학가협회 창립 대회 때 「해방 시단의 과제」라는 제목으로 보고에 나서 “해방 후 시단은 사이비 시의 범람기”이며 “민족의 세계 시에 공헌할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통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각주3) 임을 주장하는 등 창작 체험을 바탕으로 제 나름의 시론을 펼친다. 이어 그는 1947년 『백민』에 「순수시의 지향 ― 민족 시를 위하여」라는 글을 통해서 장차 시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이 글에서 해방 직후 좌익의 계급 투쟁과 정치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낭만 정신과 관계가 있지만, 이런 낭만이 지나쳐 문단에 혼란과 충돌을 야기시키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생명의 요구’와 ‘생활의 표현’ 같은 순수함으로 시 정신을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순수 문학적 태도를 지켜나가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이지와 정열이 균형을 이루는 ‘고전주의적’ 정신을 제시한다.각주4)

한편, 조지훈은 경기여고 교사를 거쳐 서울여자의과대학과 고려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는데, 고려대 재직 시절에 발발한 6·25 때 초대 국회 의원이던 아버지 조헌영이 최린 · 이광수 같은 여러 지식인과 함께 납치되는 비운을 겪는다. 1·4후퇴 때 조지훈은 피난지인 대전에서 종군 작가단에 참여하고 이후에는 문총, 한국문인협회의 중앙 위원과 대표이사를 지낸다. 1952년에는 첫 단독 시집인 『풀잎 단장』을 펴내고, 이듬해인 1953년에는 시론집인 『시의 원리』를 간행해 이론과 창작 모두에 힘을 기울인다. 1956년에 발행한 『조지훈 시선』에서 그는 절제된 언어로 자연을 관조하는 시 세계를 펼쳐 보이며 같은 해 자유 문학상을 받는다.

조지훈의 첫 단독 시집인 〈풀잎 단장〉
조지훈의 첫 단독 시집인 〈풀잎 단장〉

전쟁 직후 「다부원에서」 같은 시에서 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을 조금씩 표현하던 조지훈은 1950년대 말에 이르러 초기의 순수 서정성에서 차츰 벗어나게 된다. 1959년에 펴낸 시집 『역사 앞에서』를 통해 그는 해방 뒤의 사상적 분열 양상과 혼란이 가라앉을 날 없는 격동기의 현실을 직시하는 지식인의 자의식을 작품에 담아낸다. 『역사 앞에서』 이후 현실에 대한 조지훈의 관심은 더욱 높아지는데, 특히 4·19의 열기를 전하는 시 「마침내 여기 이르지 않곤 끝나지 않은 줄 이미 알았다」 등은 그의 대담한 시적 전환을 보여준다.

1962년 고려대학교 부설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에 취임한 뒤부터 그는 문학보다 민족 문화 연구에 더 몰두해 1964년에 『한국 문화사 서설』 · 『신라 가요 연구 논고』 · 『한국 민족 운동사』 등의 이론서를 발간한다. 이처럼 조지훈은 청록파 세 사람 가운데 사회 현실에 대한 참여 의지를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그러나 이런 역사와 현실에 얽힌 자기 응시의 기저(基底)에는 언제나 ‘청록파’다운 자연 친화 정신이 흐르고 있으며, 1964년에 나온 그의 마지막 시집인 『여운』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자신의 시적 상상력의 모태인 ‘자연’으로 귀의하게 된다.

조지훈의 마지막 시집 〈여운〉
조지훈의 마지막 시집 〈여운〉

조지훈은 만성 기관지염으로 고생하다가 1968년 5월 17일 서울 중구 을지로6가 국립 메디컬센터에서 청록파 시인 가운데 가장 먼저 삶을 마감한다. 시집만이 아니라 『돌의 미학』 · 『창에 기대어』 · 『시와 인생』 · 『지조론』 같은 그의 수필집도 많은 이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조지훈의 육필
조지훈의 육필

박목월

조지훈이 ‘민족’, 박두진이 ‘기독교’에서 삶의 궁극의 가치를 찾았다면, 박목월(朴木月, 1916~1976)은 ‘일상’에 많은 비중을 둔 시인이다. 박목월의 시 세계가 청록파의 다른 두 사람에 비해 스케일이 작고 소박한 것도 이런 성향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박목월 또한 주로 자연에서 시의 소재를 찾으며 창작 활동에 나선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같은 청록파라고 해도 세 사람의 시 세계 속에 나타난 자연은 조금씩 빛깔이 다르다. 박목월의 자연은 전통 율조와 회화적인 감각, 그리고 향토성이 짙게 배어 있는 자연이다. 청록파의 다른 두 시인에 비해 그의 시가 좀더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고, 한결 부드럽고 섬세하며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청록파 가운데 가장 늦게 나와 다른 누구보다 인간적인 냄새가 짙게 풍기는 시를 선보인 박목월
청록파 가운데 가장 늦게 나와 다른 누구보다 인간적인 냄새가 짙게 풍기는 시를 선보인 박목월

박목월은 본명이 영종(泳鍾)인데, 1916년 경북 월성군에서 태어난다. 아버지가 수리 조합장을 지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비교적 넉넉한 환경에서 자란다. 어릴 적에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한 그는 경주에서 좀 떨어진 보통 학교를 졸업한다. 1930년 대구 계성중학에 들어간 그는 하숙 생활을 하며 습작기를 보낸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어린이』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 『신가정』에 「제비맞이」라는 글이 실리면서 아동 문학으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지만, 1935년 졸업 뒤 집안이 기울어 고향으로 돌아와 동부금융조합에 입사한다.

목월(木月)이라는 필명은 그가 좋아하던 수주(樹州) 변영로의 아호 중 수(樹)자에 포함된 ‘목(木)’과 소월(素月)로부터 ‘월(月)’을 따서 지은 것이다. 1939년 『문장』에 작품을 투고해 청록파 시인 중에서 가장 늦은 1940년 9월에 등단하는데, 이 때 그는 정지용으로부터 “북의 소월, 남의 목월”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기성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는 박목월이가 날 만하다. 소월의 툭툭 불거지는 삭주 귀성조(朔州龜城調)는 지금 읽어도 좋더니 목월이 못지 않아 아기자기 섬세한 맛이 좋다. 민요풍에서 시에 발전하기까지 목월의 고심이 더 크다. 소월이 천재적이요, 독창적이었던 것이 신경 감각 묘사까지 미치기에는 너무나 “민요”에 시종하고 말았더니 목월이 요적(謠的) 뎃상 연습에서 시까지의 콤포지순에는 요(謠)가 머뭇거리고 있다. 요적 수사(修辭)를 충분히 정리하고 나면 목월의 시가 바로 한국 시이다.
정지용, 『문장』(1940. 9.)

1946년 『청록집』을 낸 뒤에 그는 금융 조합 일을 그만두고 대구 계성중학교와 서울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는다. 이어 출판사 ‘산아방(山雅房)’의 경영을 시초로 1950년에는 ‘여학생사’의 주간으로 잡지에도 손을 대나 실패한다. 곧 조지훈 · 박두진 · 이한직과 함께 『시문학』에 참여하지만, 이것도 6·25 때문에 창간호가 종간호가 되고 만다. 1953년부터 그는 다시 서라벌예대와 홍익대에 출강하는 등 교직에 몸을 담으며, 1954년에는 시집 『산도화』를 펴낸다.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 남도 삼백리 // 술 익는 마을마다 / 타는 저녁놀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시집 『산도화』에 실린 「나그네」의 전문이다. 「나그네」는 민요풍의 리듬과 보편적인 향수의 미감 등이 어우러져 단순한 구조 속에 그 나름의 완성미를 구현한 작품으로, 널리 애송되는 시편 가운데 하나다. 향토색 짙은 서정의 풍경을 보여주는 이 시에 나타난 자연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자연’이다. 그 자연에 굽이치는 것은 유전(流轉)하는 삶에 대한 향수와 슬픔이다.

〈나그네〉가 실린 〈산도화〉
〈나그네〉가 실린 〈산도화〉

이처럼 자연에서 출발한 박목월은 후기로 넘어오며 차츰 현실적 삶의 애환을 노래하게 된다. 그는 세상살이를 바라보면서 현실 속의 갈등이나 초극의 의지를 보여주기보다는 인간의 운명이나 사물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담아내는 데 힘을 기울인다.

초기의 시 세계를 대표하는 『산도화』를 낸 뒤 그는 1956년 ‘한국시인협회’의 출판 간사를 맡아 협회의 기관지인 『현대시』와 연간 시집 『시와 시론』을 발행한다. 1959년에는 시 세계의 전환과 함께 일상의 자잘한 편린에 관심을 기울인 시집 『난(蘭) · 기타(其他)』를 내놓는데, 많은 평자로부터 섬세함과 고유한 정서로 리리시즘을 구현해냈다는 찬사를 듣는다.

사소한 일상에 관심을 기울인 시집 〈난 · 기타〉
사소한 일상에 관심을 기울인 시집 〈난 · 기타〉

1962년에 그는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로 임용되며, 1963년에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개인 교습을 맡기도 한다. 1964년에는 과거의 정형률에서 벗어나 서술체를 사용, 자연을 현대 감각으로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은 시집 『청담(晴曇)』을 내고, 이 시집으로 1968년 대한민국 문예상 본상을 받는다. 1968년에 펴낸 시집 『경상도의 가랑잎』에서는 의문과 자아 확인을 동시에 내포한 “뭐락카노.”라는 시구를 비롯한 경상도 방언을 통해 시인이 고향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고향으로의 회귀란 곧 삶의 본질을 찾아 시공을 거슬러오르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짙은 허무가 배어나기도 하지만, 그 허무의 끝에서 좌절이나 체념을 넘어 삶과 죽음을 여유 있게 바라보는 달관의 자세를 만나게 된다. 1970년대 초반에 나온 「사력질(砂礫質)」 연작은 그의 후기를 대표하는 시로, ‘자연’에서 출발해 ‘일상’과 ‘가족’을 우회한 끝에 그가 안착한 ‘사물의 본질의 세계’에 대한 냉철한 통찰을 담아낸다. 「사력질」에서는 아울러 그 통찰을 통해 유한한 삶에 내재된 한계성과 비극성을 간결하게 보여준 박목월 후기 문학의 진경이 펼쳐진다.

1970년 서울 용산구 원효로 자택 서재에서
1970년 서울 용산구 원효로 자택 서재에서

1973년 9월 그는 박남수 · 김종길 · 이형기 · 김광림 · 김종해 · 이건청 등이 참여한 월간 시 전문지 『심상(心象)』을 발행한다. 이후에도 시집 『무순(無順)』을 펴내는 등 1976년 삶을 다하기 전까지 박목월은 출판인으로서, 교육자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청록파’라는 이름을 지상에 남긴 한 시인으로서 뚜렷한 자취를 남긴다. 그는 시집 외에도 수필집 『구름의 서정』 · 『토요일의 밤하늘』 · 『행복의 얼굴』 · 『보랏빛 소묘』, 동시집 『산새알 물새알』 · 『초록별』 · 『사랑집』 등을 남긴다.

박목월의 수필집 〈토요일의 밤하늘〉
박목월의 수필집 〈토요일의 밤하늘〉

박두진

같은 청록파이지만 기독교적 윤리 의식이 바탕에 깔린 박두진(朴斗鎭, 1916~1998)의 자연에 대한 시선은 다른 두 시인과 또 구별된다. 그의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소박한 자연’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서 빚어진 의연하고 당당한, 강렬한 의지로서의 자연이다. 시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온 우주에 편만(遍滿)해 있고 그 위에 초월해 있는 한 법칙”의 “주재자(主宰者)의 의지”각주5) 로서의 자연이다.

기독교적 윤리 의식이 바탕에 깔린 시 세계를 펼친 청록파 시인 박두진
기독교적 윤리 의식이 바탕에 깔린 시 세계를 펼친 청록파 시인 박두진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박두진은 1939년 『문장』 6월호에 「향현(香峴)」 · 「묘지송(墓地頌)」 · 「낙엽송(落葉頌)」이, 다음해인 1940년에 「의(蟻)」 · 「들국화」가 추천되어 청록파 시인 가운데 가장 먼저 완료 추천을 받는다. 정지용으로부터 “시단에 하나의 신자연을 소개하여 선자는 법열 이상입니다.”각주6) 라는 극찬을 받은 그는 이후에도 꾸준히 「도봉(道峯)」 · 「별」 · 「푸른 하늘 아래」 · 「설악부(雪岳賦)」 · 「장미의 노래」 등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시들을 발표한다.

해방 뒤 『청록집』 발간에 즈음해 그는 서정주 · 박목월과 더불어 우익 문학 단체인 ‘청문협’에 가입한다. 이어 ‘문협’에 가담해 시 분과 위원장으로 피선되기도 하지만, 그는 단체의 활동이나 정치보다는 등산과 수석 채집, 서예에 더욱 몰두한다. 이렇게 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박두진에게도 오랜 암흑기에서의 해방은 강렬한 동적 심상을 불러일으켜 1949년에 펴낸 첫 단독 시집인 『해』에서는 여전히 산을 소재로 하면서도 예전처럼 누워 침묵하는 산의 이미지와는 다른, 이글이글 타는 해를 솟아오르게 하는 생명력이 충만한 산을 노래한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해야 솟아라. //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박두진, 「해」, 『해』(1949)
어두운 현실을 뒤로하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 박두진의 첫 단독 시집 〈해〉
어두운 현실을 뒤로하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 박두진의 첫 단독 시집 〈해〉

이처럼 「해」는 상징과 의인화를 통해 어두운 과거를 뒤로하고 밝고 활기찬 내일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 시다. 이런 소박한 의미를 좀더 파헤쳐 들어가보면 ‘해’는 근원적이며 영원한 절대자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해’가 솟기를 기다리는 신념에 찬 시인을 만날 수 있다.

두진의 특이성은 그의 구의적(究意的) 귀의(歸依)가 다른 동양 시인들에서처럼 자연에의 동화 법칙에 의하지 않는 데 있다. 그도 물론 항상 자연의 품속에 들어가 살기는 한다. 그리고 “영원의 어머니”라고 부르기까지도 한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다시 “다른 태양”이 솟아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메시야’가 재림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김동리, 「자연의 발견」, 『문학과 인간』(청운사, 1952)

그는 1953년에 시집 『오도』를, 1956년에 『박두진 시선』을 펴내 같은 해 제4회 자유 문학상을 받는다. 이후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던 박두진은 4·19 때 학원 분규로 교수직을 사퇴한다. 1962년과 1963년에 각각 발간한 시집 『거미와 성좌(星座)』 · 『인간 밀림』에서 그는 드문드문 현실에 대한 자각을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거미와 성좌」에서는 “여덟 개의 발끝으로 하는 여덟 차례의 간음”이나, 추녀 끝에서 벗나무 가지까지 점착성 분비물과 포망을 치며 일하는 거미의 생태를 통해 고통스런 현실과 그 속에서 노동으로 살아가는 집요한 삶의 의지를 그려낸다.

  • 1956년에 나온 〈박두진 시선〉 1
  • 거미의 생태를 통해 고통스런 현실과 노동으로 살아가는 집요한 삶의 의지를 묘사한 〈거미와 성좌〉 2
    • 11956년에 나온 〈박두진 시선〉
    • 2거미의 생태를 통해 고통스런 현실과 노동으로 살아가는 집요한 삶의 의지를 묘사한 〈거미와 성좌〉

박두진은 이후 우석대와 이화여대를 거쳐 다시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그 동안 자신의 본령은 역시 자연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 1967년에 발간한 시집 『하얀 날개』에서 그는 다시 자연으로 귀의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나 이 시집에 담긴 자연은 과거의 산이나 해 또는 바다 같은 광활한 대상이 아니라 꽃이나 새 같은 소박한 자연이다. 즉, 꽃이 지거나 피는 일 같은 작고 순간적인 대상을 통해 영원을 발견해나가는 것이 시인의 몫이 된 것이다. 한동안의 공백을 거쳐 1973년에 펴낸 시집 『고산 식물(高山植物)』과 『수석 열전(水石列傳)』에서 박두진은 자연과 인간 및 사회 현실을 두루 시 속에 담게 되며, 아울러 이들을 절대 경지로 끌어올리려는 끈질긴 노력을 보여준다.

이후에도 그는 1976년 『속 수석 열전』, 1977년 『야생대(野生帶)』, 1981년 『예레미아의 노래』, 1981년 『포옹 무한(抱擁無限)』, 1981년 『박두진 시집』 등을 꾸준히 펴낸다. 그는 시집 외에도 틈틈이 수필집 『시인의 고향』 · 『생각하는 갈대』 · 『언덕에 이는 바람』과 시론집 『시와 사랑』 · 『한국 현대 시론』 등을 내놓아 성실한 문학인으로서 많은 동료와 후학에게 귀감이 된다. 1993년 제15회 외솔상, 1997년 제1회 아시아 기독교 문학상 등을 받은 박두진은 1998년에 여든둘의 나이로 숨진다.

1971년 덕소에서 작가 박영준(오른쪽)과 함께
1971년 덕소에서 작가 박영준(오른쪽)과 함께

참고문헌

  • ・ 권영민, 『한국 현대 문학사 1945~1990』, 민음사, 1993
  • ・ 박철석, 『한국 현대 문학사론』, 민지사, 1990
  • ・ 정한모, 『한국 현대시의 현장』, 박영사, 1983
  • ・ 김용성, 『한국 현대 문학사 탐방』, 현암사, 1984
  • ・ 김재홍, 『한국 현대 시인 연구』, 일지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