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

진흥왕

다른 표기 언어 眞興王 동의어 진흥, 법운, 삼맥종, 三麥宗, 심맥부, 深麥夫

요약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백제의 근초고왕에 비견되는 신라의 영걸 진흥왕은 6세기 중반 백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견제했지만 백제가 방심한 틈을 타 일거에 한강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오랜 약소국가의 설움을 씻어냈다. 그 후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을 점령하고 대가야를 합병함으로써 신라 역사상 최대의 강역을 개척한 그는 북한산·황초령·마운령·창녕 등지에 순수비를 세워 자신의 업적을 과시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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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소태후의 섭정시대
  2. 불교의 진흥과 황룡사 창건
  3. 신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하다
  4. 관산성 전투의 명암
  5. 진흥왕 순수비를 세우다
  6. 화랑도를 창설하다

북방의 대제국 고구려와 해양대국 백제의 위세에 눌려 오랫동안 기를 펴지 못하던 신라는 법흥왕과 진흥왕 대에 이르러 국체를 정비한 다음 활발한 정복전쟁을 통해 국력을 일신했다. 특히 진흥왕은 나제동맹을 깨고 백제와 고구려를 동시에 공격하여 요충지인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는 한편 여세를 몰아 함경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이어서 그는 관산성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백제를 크게 위축시킨 다음 낙동강 서쪽에 있던 대가야까지 정복함으로써 신라 역사 이래 최대의 영토를 개척했다.

진흥왕의 이와 같은 업적은 창녕비·북한산비·황초령비·마운령비라는 4개의 순수비로 내외에 과시되었다. 그때부터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쥐게 된 신라는 불교를 통해 사상적인 통합을 도모하고, 인재 양성을 위해 청년들의 심신수련단체인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함으로써 장차 삼국통일의 기반을 쌓았다.

지소태후의 섭정시대

신라의 제24대 임금 진흥왕(眞興王)의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삼맥종(三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 승려로서의 법명은 법운(法雲)이다. 아버지는 제22대 임금 지증왕의 아들이자 제23대 임금 법흥왕의 동생인 갈문왕(葛文王) 김입종,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지소부인이다. 진흥왕의 출생연도는 《삼국사기》에 534년, 《삼국유사》에 526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정사인 《삼국사기》의 기록을 좇기로 한다.

국보 147호인 울산의 천전리 각석에는 청동기 시대 이래 수많은 그림과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바위 중간 아래쪽에는 14년의 시차를 두고 근친혼에 따라 성골 혈통으로 태어난 진흥왕의 출생에 관련된 두 개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두동면 천전리 각석
두동면 천전리 각석

앞서 새겨진 원명(原銘)에는 입종갈문왕이 벗으로 사귀던 누이 어사추여랑과 함께 이곳에 놀러왔다는 내용이 담겨 있고, 나중에 새겨진 추명(追銘)에는 14년 뒤에 입종갈문왕의 아내인 지몰시혜비가 아들 심맥부지(深麥夫智)와 함께 천전리에 찾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명문에 따르면 입종갈문왕은 앞서 사귀던 어사추여랑과 혼인하지 않고 조카인 법흥왕의 딸 지몰시혜비, 즉 지소부인과 혼인하여 진흥왕을 낳았던 것이다.

진흥왕은 7세 때인 540년 법흥왕이 승하한 뒤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가 어렸으므로 법흥왕의 왕후인 보도태후가 이듬해인 541년까지 섭정했고, 이어서 어머니 지소태후가 551년까지 섭정을 맡았다. 541년부터 신라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나서게 된 지소태후는 죄수들을 사면하고 관리들의 벼슬을 한 등급씩 올려주는 한편, 법흥왕의 신뢰를 받았던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임명했다.

그때까지 신라의 모든 정책은 귀족들의 협의체인 화백제도에서 결정되었고, 특히 병권은 화백회의 의장이자 재상인 상대등이 쥐고 있었다. 그런데 지소태후는 병권을 병부령 이사부에게 일임함으로써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그녀는 또 545년 7월, 이찬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대아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했다.

지소태후는 이처럼 섭정 기간 동안 왕권을 신장하고 국가의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에 맞서 영토 확장에 주력했다. 아울러 왕실 주도하에 수많은 불사를 일으켜 호국불교의 기틀을 쌓았다.

불교의 진흥과 황룡사 창건

진흥왕 재위시기에 신라의 불교는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지소태후는 544년 2월 흥륜사를 창건하여 신라 불교의 본산으로 삼았고, 3월에는 평민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합법화했다. 549년 양나라의 사신과 유학승 각덕이 불사리를 가져오자 진흥왕과 함께 백관들을 이끌고 나가 홍륜사 앞길에서 맞이하기도 했다. 565년 9월에는 진나라의 사신 유사와 승려 명관이 불경 1천 7백여 권을 들여왔다.

진흥왕은 재위 14년째인 553년 2월 월성 동쪽에 있는 궁궐 공사장에서 황룡이 출현하는 이적이 일어나자 궁궐 공사를 멈추고 그 자리에 절을 짓게 했다. 이 절이 바로 불국사와 함께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로 알려진 황룡사이다.

경주 황룡사지 전경
경주 황룡사지 전경

572년, 진흥왕은 태자 동륜이 요절하자 불법에 더욱 정진하면서 슬픔을 달랬다. 573년에는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지방에 있는 모든 사찰에서 7일 동안 팔관회를 열었다.

574년에는 신라 삼보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황룡사 장육상을 주조했다. 이 불상 제조에 소요된 구리는 무려 3만 5천 근, 도금에 소요된 금은 1만 1백 98푼이었다. 이 장육상은 진평왕의 천사옥대, 황룡사의 9층탑과 더불어 신라의 3보로 숭앙 받았다.

576년에는 안흥법사가 중국에 들어가 불경을 공부한 다음 서역의 승려 비마라 등 두 명의 승려와 함께 귀국하여 《능가승만경》과 부처의 진신사리를 바쳤다. 어머니 지소태후를 본받아 불심이 돈독했던 진흥왕은 말년에 승려가 되어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왕비인 사도왕후 역시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서 불법을 닦았다.

신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하다

548년 2월, 고구려와 동예가 힘을 합쳐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수 이북의 독산성을 공격하자 백제의 성왕은 나제동맹을 근거로 신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신라는 이에 부응하여 장군 주진과 정병 3천 명을 독산성으로 보내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550년, 고구려에서 안원왕이 살해되고 돌궐족이 침략하는 등 내우외환에 시달려 남쪽을 돌볼 여력을 잃자 백제는 도살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러자 자존심이 상한 고구려는 전열을 정비한 다음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했다.

이처럼 백제와 고구려가 한수 유역을 두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자 신라는 양국이 지친 틈을 타 불시에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도살성과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금현성을 각각 기습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한수 일대를 거머쥐었다.

551년 봄, 지소태후가 섭정을 거두자 의욕적으로 친정에 임한 진흥왕은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치고 팔관회를 개최했으며, 가야인 악사 우륵을 초빙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해 3월 왕이 순행하던 도중 낭성(娘城)에 이르러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이 음악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특별히 불렀다. 진흥왕이 하림궁에 머물 때 두 사람이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했다. 이때 왕이 우륵의 연주에 감동하여 국원(충주)에 거처를 마련해주자 우륵은 이에 화답하여 신라의 악사였던 계고, 법지, 만덕 세 사람에게 가야금, 노래, 춤을 가르쳐주었다.

진흥왕은 또 지소태후의 뜻을 받들어 영토 확장에 전력을 기울였다. 거칠부, 구진, 비태, 탐지 등 장수들을 동원하여 고구려의 강역인 죽령 이북의 10군을 점령함으로써 북방의 영토를 크게 늘렸다. 553년에는 백제의 동북 변경을 공략하여 신주를 설치하고 아찬 김무력을 군주로 임명했다.

그 결과 신라는 낙동강과 한강 유역의 비옥한 생산성을 바탕으로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을 막아내며 국세를 크게 떨치게 되었다. 반면 신라에게 한성을 비롯하여 북쪽의 옛 영토를 모조리 빼앗긴 백제는 삼면이 포위된 채 전전긍긍하는 지경에 빠져버렸다. 그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백제의 성왕은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보내며 유화책을 펼쳤다.

관산성 전투의 명암

진흥왕 재위 15년째인 554년, 사비성에서 절치부심하고 있던 백제의 성왕은 태자 여창을 선봉으로 삼고 가야와 왜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했다. 관산성은 한강 하류지역을 지키는 신라군의 보급을 맡은 전략의 요충지였다. 급보를 받은 진흥왕은 각간 우덕, 이찬 탐지를 보내 백제군과 맞서게 했다.

관산성 전투는 신라와 백제가 국운을 걸고 부딪친 건곤일척의 싸움이었다. 초전에 관산성을 함락시킨 백제의 태자 여창은 구천 지역에 본진을 설치하고 신라군의 반격에 대비했다. 그런데 승전보에 도취한 성왕이 여창을 격려하기 위해 친위군 50명을 대동하고 구천으로 달려가다가 신라군의 기습을 받고 살해되면서 전황이 급변했다. 당시 성왕을 죽인 사람은 일개 비장이었던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였다. 이를 계기로 승기를 잡은 신라군은 급격하게 사기를 잃은 백제군에게 맹공을 가하여 관산성을 되찾았다. 이 전투에서 백제군은 좌평 4명과 함께 2만 9천 6백 명의 병사를 잃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그 결과 국세가 급격히 쇠약해진 백제는 3개월 뒤 고구려의 공격으로 옛 도읍인 웅진성이 포위되는 참담한 지경을 맞이하기도 했다. 반면 기세가 오른 신라는 백제의 비사벌(창녕)을 공략하여 완산주(전주)를 설치했다.

562년 7월, 백제가 가야의 잔존세력을 후원하기 위해 신라의 변경을 공격했다. 신라가 이에 맞서 군사를 동원한 틈을 타 가야왕 도설지가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신라의 반격으로 백제군은 1천여 명의 군사를 잃고 물러났으며, 가야의 반란군은 신라의 장군 이사부와 부장 사다함이 5천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나타자 무력시위를 벌이자 겁을 먹고 항복해 버렸다.

576년경 신라의 강역
576년경 신라의 강역

갑작스런 백제의 도발과 가야의 반란을 손쉽게 평정한 신라는 완산주를 폐하고 대야주(합천)를 설치하는 등 새롭게 편입된 영토 관리에 전념했다. 이듬해에는 북방에 비열흘주(안변)를 설치하고 사찬 성종을 군주로 임명했다. 그처럼 신라는 진흥왕의 시기에 한강 유역에 이어 가야 지역까지 점령하고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함흥 일대까지 차지하면서 역사상 최대의 강역을 개척했던 것이다.

진흥왕 순수비를 세우다

진흥왕의 업적은 새롭게 영토로 편입된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등지에 순수비를 세우면서 대내외에 과시되었다. ‘순수(巡狩)’란 본래 중국의 황제들이 천신에게 제사 지내고 지방을 시찰하며 민심을 돌보던 대규모 국가 행사였다.

진흥왕은 이를 본받아 새로 개척한 영토를 몸소 시찰하는 한편 강력한 정복군주로서 자신의 정책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순수비를 세웠던 것이다. 경주 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신라가 드디어 대제국 고구려, 백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강대국으로 성장했으니 실로 감개무량했을 것이다.

진흥왕 순수비 가운데 제일 먼저 발견된 황초령비는 568년에 함경남도 장진군 황초령에 세워졌다. 이 비석에는 비를 세우게 된 연유와 의의, 진흥왕의 업적과 순회한 목적, 수행한 사람들의 직위, 이름 등이 깨알처럼 새겨져 있다. 현재 마운령비와 함께 함흥역사박물관 본궁에 보관되어 있다.

마운령비는 16세기 말에 발견되어 17세기 초 한백겸이 《동국지리지》에 고려 윤관의 비석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1929년에 최남선이 함경남도 이원군 마운령 만덕산 산중에 파묻혀 있던 이 비석을 찾아낸 후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고증했다. 비문에는 황초령비와 마찬가지로 진흥왕의 업적과 변방을 돌아보는 목적, 비를 세우게 된 연유와 함께 수행한 관리들의 출신과 벼슬, 이름 등이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지금까지 발견된 진흥왕순수비 가운데 비문이 제일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산 비봉에 세워진 북한산비는 오랫동안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영조 대까지도 이 비석은 고려의 도선대사나 조선 창건에 간여했던 무학대사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1751년에 편찬된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1816년 7월 우리나라 금석학의 태두인 추사 김정희에 의해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글자가 해독되면서 진흥왕의 순수비로 확인되었다. 이 글자가 《삼국사기》 진흥왕 29년조(568년)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두었다.’란 대목과 정확하게 일치했기 때문이다.

북한산비(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북한산비(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현재 국보 3호로 지정되어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비석은 많은 부분이 손상되었고 한국전쟁 때 입은 총탄 자국까지 남아있다. 현재 총 200여 글자 중 120여 글자만이 해독되었지만 그 중에 보이는 ‘진흥태왕(眞興太王)’이라는 네 글자는 신라 최대의 업적을 남긴 임금으로서의 강인한 기세를 뽐내는 것만 같다.

한편, 창녕비는 일제강점기에 소풍 간 학생들이 경상남도 창녕의 화왕산 골짜기에서 발견했는데 당시 일본인 교장이 자신이 발견했다고 주장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창녕비는 진흥왕이 561년 가야연맹의 한 세력이었던 창녕을 정복한 기념으로 세워진 것이다. 여기에는 39명의 귀족과 관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국사》를 편찬한 거칠부, 김유신의 아버지 김무력 등의 이름이 눈에 띈다.

진흥왕순수비
진흥왕순수비

현재 국보 33호로 지정되어 있는 창녕비는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새로운 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라는 뜻의 척경비로 이름 지어졌지만, 왕을 수행한 신하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진흥왕순수비로 인정받고 있다. 이 비석에는 대가야 최후의 태자로서 월광태자로 불리는 도설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도설지는 562년 진흥왕에 의해 대가야의 왕으로 책봉되었지만 백제와 짜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한 뒤 왕위에서 끌어내려졌다. 결국 그는 승려가 되어 현재 경상남도 합천에 있는 월광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화랑도를 창설하다

564년, 신라가 중국의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자, 이듬해인 565년 북제의 무성황제는 조서를 내려 진흥왕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使持節 東夷校尉 樂浪郡公 新羅王)’으로 봉했다. 진흥왕은 568년에 이르러 연호를 ‘크게 번창한다.’는 뜻의 ‘태창(太昌)’, 572년에는 ‘널리 구제한다.’는 뜻의 ‘홍제(鴻濟)’로 바꾸었다. 이는 그 동안의 공격적인 영토확장전쟁을 마무리하고 외교와 내치에 전념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576년, 진흥왕은 촌락시대부터 존재하던 청소년 조직을 고대국가의 체제에 맞게 개편하고 이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려는 목적으로 원화제도를 시행했다. 그런데 리더인 원화로 선발된 남모와 준정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준정이 남모를 물에 빠뜨려 죽이자 왕이 원화제도를 폐지하고 화랑도로 바꾸었다. 《삼국사기》에서는 화랑도의 연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최치원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다. 이를 풍류(風流)라 하는데 이 도를 설치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3교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하였다.’
최치원,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

이처럼 화랑도는 한국 고유의 사상과 도교, 불교, 유교가 합해진 이념에 따른 일종의 심신 수련 단체로 신라의 융성기에 예비군의 확보와 인재양성차원에서 국가적으로 조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는 이 화랑 제도를 통해 김유신, 사다함, 관창, 반굴 등 충성심으로 무장한 인재들이 지속적으로 배출되었고, 그들의 활약은 장차 신라가 삼국통일을 달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진흥왕이 세상을 떠난 것은 43세 때인 576년 가을이었다. 그는 재위 37년 동안 신라의 전성기를 이룩했고, 영토의 확장과 국력의 과시, 백성들에 대한 포용과 불교적인 교화를 실천했던 영웅이었다.

참고자료

  • ・ 《삼국사기》 1. 김부식 저. 이강래 역. 한길사. 1998.
  • ・ 《삼국사기》 2. 김부식 저. 이강래 역. 한길사. 2000.
  • ・ 《삼국유사》 일연 저. 김원중 역. 민음사. 2008.
  • ・ 《한국사 7: 삼국의 정치와 사회3 - 신라,가야》 국사편찬위원회.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