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필드

킬링 필드

다른 표기 언어 Killing Fields

요약 1969년~1979년 캄보디아에서 '농경 유토피아 건설'을 내세운 크메르루주의 학살과 기아, 미군의 폭격으로 최대 170만 명이 사망한 사건. 킬링 필드는 '죽음의 들판'을 뜻한다.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한 후 캄보디아를 장악한 크메르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는 집권 후 바로 나라를 '개조'하는 데에 몰두했고, 지식인과 성직자를 포함한 대규모 숙청을 시행했다. 이로 인한 희생자는 최소 15만 명에서 최대 당시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00만 명까지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목차

접기
  1. 정의
  2. 캄보디아 내전
  3. 크메르루주 도시 소개
  4. 지식인·성직자·소수민족 학살
  5. 사망자 수 논란
  6. '붉은 크메르', 크메르루주
  7. 크메르루즈의 몰락
  8. 폴 포트
  9. 킬링 필드가 캄보디아에 남긴 것
  10. 킬링 필드 주역 재판

정의

킬링필드 희생자들의 유골
킬링필드 희생자들의 유골

1970년대를 전후하여 발생한 캄보디아의 대규모 살상과 관련된 사건과 지역. 킬링 필드(Killing Fields, '죽음의 들판'이라는 뜻)는 크게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좁은 의미의 '킬링필드'는 1975년 4월 17일 집권한 폴 포트의 크메르루즈 정권이 캄보디아를 지배한 3년 8개월 10일 동안 학살, 기아 등으로 캄보디아인 15~200만 명 이상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이에 더해 1969~1973년 미군이 베트남군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 캄보디아 북부에 폭탄을 대량 투하해 60~80만 명이 사망한 사건을 '킬링 필드'에 포함하기도 한다.

두번째 의미의 '킬링 필드'는 크메르루즈 정권이 저지른 학살로 죽은 시체들을 한꺼번에 묻은 집단 매장지를 지칭하는 말이다. 약 1만 7000명의 시신을 매장한 수도 프놈펜 인근의 쯔응아익(Cheung Ek)을 비롯해 캄보디아 전국에서 2만 여개의 집단 매장지가 발견됐다.

캄보디아 내전

노로돔 시아누크
노로돔 시아누크

1954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캄보디아 초대 수상이 된 옛 왕가의 후손 노로돔 시아누크는 비밀 경찰을 앞세운 철권통치를 해왔다. 1963년 베트남전쟁의 후방기지 역할을 제공하는 미국에 대해 비동맹노선을 내세워 거부하고, 북베트남군이 캄보디아 동부지역을 군수물자 루트로 이용하는 것을 묵인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미국이 론 놀 장군을 지원해 쿠데타를 일으켜 시아누크 국왕을 쫓아냈다. 론 놀 정권(크메르공화국)은 극심한 좌익탄압을 벌였다.

폴 포트는 1968년 1월 바탐방 부대 습격을 시작으로 무장 투쟁을 개시했다. 크메르루주 세력은 점점 커져 1973년 크메르루주가 국토의 3분의 2를 점령한다. 이 내전 동안 론 놀 군대와 크메르루주 군 양측 모두 극도로 잔인한 행위를 저지른 탓에 사망자수가 엄청났다. 1975년 미국이 베트남에서 병력을 철수하자 론 놀 정권도 무너졌다. 4월 17일 크메르루주군이 수도인 프놈펜으로 입성했다. 내전으로 인해 대부분 난민 신세가 된 사람들은 향후 벌어질 학살은 예상하지 못한 채 폴 포트가 이끄는 군대를 해방군이라 부르며 환영했다.

크메르루주 도시 소개

폴 포트는 집권하자마자 '개조'에 착수했다. 그는 도시를 자본주의와 친미 권력의 온상으로, 농촌은 순수한 사회주의 평등사회로 간주하고 200만 명에 달하던 프놈펜 시민을 단 사흘 만에 모두 도시 밖으로 내몰았다. 프놈펜에서 밀려난 이들은 걷거나 오토바이 등을 타고 길게는 한 달까지 걸려 크메르루즈가 정해주는 농촌 지역으로 이동했다.

크메르루즈 집권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사망자가 도시 소개 정책에서 생겨났다. 수많은 이들이 이주 도중 기아와 질병으로 숨졌고 크메르루즈는 노약자들을 방기하고 불평하는 자들에게 폭행을 가하고 '적'을 색출하여 즉결 처분하기도 했다.

농촌으로 옮겨진 이들은 집단 농장에서 하루 두 끼의 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농사일은 물론, 둑을 쌓고 논과 길을 만드는 강제노역을 수행했다. 공동취사를 하고 집단생활을 하면서도 부모와 자식은 서로 분리되어 다른 지역이나 작업장에 배치됐다.

이들은 점령 한 달 후인 5월 20일 '긴급 현안 8개항'을 발표했다. △도시 인구 소개 △시장 폐지 △통화 철폐 △승려직 폐지 △론 놀 정부 고위관료 처형 △공동취사 및 협동농장 설치 △베트남인 추방 △모든 병력 국경 배치 등이었다. 크메르루주는 1975년 5월 '민주캄푸치아' 수립을 선언하고 폴 포트를 총리로한 15인 내각을 결성했다.

지식인·성직자·소수민족 학살

크메르루주는 집권 기간 동안 대규모 숙청을 쉴새 없이 진행했다. 론 놀 정권과 외국 정부를 위해 일한 자는 물론 전문가, 지식인도 압살 대상으로 간주했고, 교수 의사 등은 투옥되거나 처형됐다. 안경을 썼거나 손바닥에 굳은 살이 없다는 이유로도 처형당했다. 성직자도 처형 대상에 올랐고 불교사찰과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가톨릭 교회들은 파괴되거나 곡식창고로 쓰였다.

특히 이들은 국내에 오랫동안 살아온 소수민족들도 학살의 대상으로 삼았다. 2만 명 정도로 추산되던 베트남인들이 몰살됐고, 25만 명의 참족 중 9만 명이 살해당했으며, 상업에 주로 종사하던 43만 명의 화인들은 그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소수에 지나지 않던 타이인, 라오인, 고산족들도 학살의 대상이 됐다.

크메르루주는 학교 건물을 감옥으로 개조해 숙청에 이용했다. 뚜옹 슬렝 감옥에는 크메르루주 조직원이었으나 내부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거나 스파이로 몰려 끌려온 이들이 많았다. 이 감옥에 끌려운 1만 6000여 명 중 단 10여명 만이 살아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잔인한 고문, 구타, 학대 끝에 자백한 이들은 쯔응아익으로 끌려가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이들은 총알을 아낀다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얼굴을 비닐백으로 덮어 질식시켰다. 심지어 엄마를 따라온 갓난아이들도 죽였다. 특히 크메르루주 정권은 이러한 학살범죄에 10대 중반의 소년소녀들을 앞세웠는데 뚜올슬렝 감옥에서 교도관으로 일하던 자들의 80%가 21세 미만의 청소년들이었다.

사망자 수 논란

크메르루주가 집권한 기간 동안 숨진 이들의 수가 얼마인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연구에 따라 최소 15만명에서 120만 명, 200만 명 등이 수치가 엇갈린다. 200만 명은 당시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수다.

미국 예일대학의 역사학자 벤 키어넌은 크메르루주 집권 기간에 기아, 질병, 과로, 고문, 처형 등으로 목숨을 잃은 캄보디아인은 약 176만 1000명이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반면 핀란드 정부의 공식 조사보고서는 크메르루주의 집권 기간 처형과 질병, 기아로 죽은 이들을 합해 약 100만 명으로 추산했다.

핀란드의 보고서는 크메르루즈 집권 전인 1969~1973년 사이 미군의 폭격으로 약 60여 만명이 학살됐다며 이 시기를 '1차 킬링 필드'로 부르고 있다. 베트남 전쟁 막바지이던 당시 미군은 베트남 군의 보급로인 호치민 루트각주1) 를 끊는다며 선전포고 없이 캄보디아 북부에 융단폭격을 가했다. 1999년 공개된 미 공군의 폭격 기록에 따르면 미군은 23만 여회 출격해 네이팜탄, 고엽체, 집속탄 등 각종 폭탄 약 275만 톤을 쏟아부었다.

이 폭격은 60만 여명의 사망자와 200만명의 난민을 발생시켰을 뿐 아니라 곡물수출국이던 캄보디아의 농업 기반을 무너뜨렸다. 1975년 크메르루주가 집권할 당시 캄보디아의 식량 자급률은 20%를 밑돌았고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프놈펜으로 몰려들었다. 총 40만톤의 쌀이 부족했음에도 국제 원조는 중국의 1만 6000톤이 고작이었고, 아사자가 속출했다.

'붉은 크메르', 크메르루주

크메르루주
크메르루주

'크메르루주'라는 이름은 1960년대 시아누크 국왕이 캄푸치아공산당(CPK)을 '붉은 크메르'라고 부른 데서 시작됐다고 알려졌다. 크메르는 캄보디아인의 90%를 차지하는 민족의 이름이자, 앙코르왕조를 포함해 캄보디아의 원류가 된 제국의 이름이기도 하다. 크메르루주 지도부는 캄보디아어로 상부조직을 뜻하는 '앙카'라고만 불렸다.

크메르루즈의 지도부는 비밀 코드명으로 형제 제1호(Brother Number 1)으로 불리던 폴 포트와 당 상임위 위원장이던 누온 치아, 이엥 사리 부수상 겸 외무부 장관, 따 목 서남지구 당비서, 키우 삼판 국가 수반, 이엥 사리의 아내로 사회부장관이었던 키우 티릿, 국방부 장관이었던 손 센, 문화교육부 장관이었던 윤 얏 등이 핵심 인물이었다. 폴 포트와 이엥 사리는 동서지간이었고 카우 삼판도 먼 친척관계에 있었다.

폴 포트와 이엥 사리, 키우 삼판, 키우 티릿, 손 센은 모두 프랑스 유학 중에 만났고, 키우 삼판은 파리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까지 땄다. 국내파인 누온 치아와 윤 얏 역시 학교 선생으로,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최고의 엘리트와 지식인으로 부를 수 있는 집단에 속했다.

크메르루즈의 몰락

1976년 12월 폴 포트가 베트남을 주적으로 지적하고, 포병 지원 속에 캄보디아 군대가 베트남 국경을 침범하자 1977년 베트남은 캄보디아 공습을 시작했다. 1979년 1월 7일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군의 힘을 빌려 헹 삼린과 훈 센이 이끄는 세력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세웠다.

크메르루주는 태국 접경 밀림 지대로 퇴각했다. 크메르루주는 폴 포트, 시아누크, 손산 등 3개의 반군파로 이루어진 게릴라 조직이 되어 중국의 지원 하에 내전을 벌였다. 폴 포트는 1985년 크메르루주 지도자를 공식 사임하나 여전히 실질적인 지도자로 활동했다. 1988년 베트남군이 전면 철수 한후 유엔의 중재로 1991년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됐고 휴전과 총선 실시에 합의해 캄보디아 내전이 종식되는 듯했다.

그러나 크메르루주는 1993년 5월 총선을 앞두고 협정을 파기한 뒤 훈 센 정부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을 재개했다. 이들은 1994년 7월 키우삼판을 총리로하는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무장투쟁을 계속할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오랜 게릴라 전에 지친 병사들이 투항하기 시작했고, 조직내 변절과 내분이 표면화됐다. 폴 포트가 사망한 1998년 4월부터는 하급 지휘관들이 반기를 들어 타 목 군 사령관을 축출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12월 제2인자였던 누온 체아의 투항으로 크메르루주는 완전히 해산됐다.

폴 포트

폴 포트
폴 포트

크메르루주 정권을 이끌었던 폴 포트의 본명은 살로스 사(Saloth Sar)이다. 1925년 5월 19일 프랑스 식민지였던 캄포디아 북부 캄퐁 통 지역의 비교적 부유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불교사원에서 6년 간 교육을 받았고, 1940년대 초 프놈펜의 기술학교에 진학해 목공을 배웠다. 이때 그는 호치민 휘하에서 프랑스 지배에 저항하는 운동에 참가하고 1946년 캄보디아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9년 무선전자공학을 배우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는데, 1951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해 '숙청'을 강조한 스탈린주의와 모택동 사상에 심취했다. 1953년 캄보디아로 돌아온 그는 1963년까지 10년간 프놈펜의 사립학교에서 역사와 문학을 가르치며 동시에 지하조직인 캄보디아 공산당 활동을 했고, 1963년 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했다.

시아누크 정권의 비밀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 그는 크메르족이 거주하는 북동부 산악지대로 피해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다. 폴 포트는 이 때 크메르족의 자급자족 생활에 크게 감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75년 4월 17일부터 3년 8개월 10일 동안 캄보디아를 자신이 생각하는 농경 유토피아로 개조하며 '킬링필드'를 일으켰다.

폴 포트는 1997년 11월 타 목 군사령관 등 반대파에 의해 종신 자택감금형을 선고받았다. 폴 포트는 캄보디아 북부 안롱 벵 인근에서 가택 연금 중 1998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크메르루주는 다음날 그의 시신을 언론에 공개했으나, 자살이나 타살 가능성 등의 의혹이 제기됐다.

킬링 필드가 캄보디아에 남긴 것

크메르루즈 이후 캄보디아 에는 훈 센 총리의 독재가 이어졌다. 1993년 캄보디아는 입헌군주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노로돔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옹립하고 9월 총선을 거쳐 제 1당인 민족연합전선의 지도자 노로돔 라나리드(시아누크의 아들)가 제1총리로, 훈 센이 제2총리로 선출되어 정부를 구성했다. 1997년 훈 센은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 라나리드 왕자를 축출하고 1998년 선거를 통해 단독 총리에 취임했다. 이후 훈 센은 30년 간 킬링 필드의 공포를 적극 활용해 자신의 장기집권을 정당화하며 독재를 해왔다.

캄보디아 곳곳에서는 킬링 필드의 현장이 관광지로 운영되고 있다. 대표적인 집단 매장지 중 하나인 쯔응아익(청아익) 대량 학살센터에는 17층 높이로 쌓아올린 유골이 보관되어 있는 위령탑이 있다. 뚜올 슬랭 감옥은 고문박물관으로 전시 중으로 수많은 아이들을 포함한 희생자를 찍은 사진이 벽에 걸려있다.

또 오랜 내전은 캄보디아 전역에 지뢰를 남겼다. 특히 1970년 내전 당시 전국에 1000만 개 이상의 지뢰가 매설된 것으로 추정되고, 2011년 기준 약 400~600만 개의 지뢰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79년부터 2015년까지 지뢰와 불발탄으로 인한 사망자가 2만 명에 가깝고, 3만 여명이 목숨을 건졌으나 9000명 가량은 팔이나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다.

킬링 필드 주역 재판

캄보디아는 '킬링 필드'를 자행한 이들의 처벌을 위해 유엔과 공동으로 ‘캄보디아 법원 내의 특별 재판부’(ECCC)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유엔과 훈 센 정권 사이에 협상 끝에 설치된 이 법정은 '국제전범재판소'가 아니라 캄보디아 국내법에 따른 특별 재판소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2003년 설립을 합의한 후 2006년에야 구성을 완료했고 2007년 심문을 시작해 2009년 첫 재판이 열렸다.

법정 설치에도 긴 시간이 걸렸지만, 기소 내용을 두고도 비판이 적지 않다. 기소 대상을 크메르루즈 지도자로 한정해서 단죄 대상도 좁고, 그마저도 이미 고령이 되어 핵심인물이 다수 사망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인 폴 포트는 1998년 숨졌고, 군 사령관 타 목은 재판이 열리기 전인 2006년 사망했다.

가장 먼저 재판을 받은 것은 투올 슬렝 형무소장 카잉 구엑 이우로 2010년 말 종신형이 선고됐다. 두번째 재판은 이엥 사리-티릿 부부와 누온 체아, 키우 삼판 등 4명을 대상으로 2011년 11월 시작됐으나 이엥 사리-티릿 부부는 각각 2013년과 2015년 사망했다. 누온 체아와 키우 삼판은 2014년 8월 종신형을 선고 받고 항소했다.

훈 센 정권이 재판부 구성에서부터 재판 절차 내내 ECCC 활동에 비협조적인 것은 훈 센 총리 자신도 크메르루즈 장교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소 대상이 확대되면 자신이 이끄는 집권 캄보디아인민당 간부들마저 법정에 서는 상황을 우려해 이미 기소된 6명 외에 추가 기소를 반대했다. 이에 2011년 기소를 전담하는 독일 출신의 지크프리트 블룬크 판사가 "캄보디아 정부의 압력으로 새 범죄사실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사임하기도 했다.

2016년 누온 체아와 키우 삼판에 대한 상급심에서 이들은 다시 종신형을 확정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상고했고, 2018년 11월에 이르러 캄보디아 전범재판소 대법원에서는 크메르루주의 킬링 필드를 집단학살로 인정하고, 누온 체아 전 크메르루주 정권 부서기, 키우 삼판 전 민주캄푸치아(현 캄보디아) 국가주석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종교적·정치적 박해와 투옥, 고문, 강제 혼인으로 인한 집단 성폭행 등 외에 집단학살 혐의로도 유죄판결을 내리고 최종적으로 종신형을 확정했다.

누온 체아는 베트남 민간인과 무슬림 소수민족, 크메르루주 이전 정권 관료들에 대한 집단학살 혐의에 대하여, 키우 삼판은 베트남 민간인을 상대로 한 집단학살 혐의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날 종신형이 확정되었다.

참고문헌

  • ・ 더 뉴스-아시아를 읽는 결정적 사건 9, 다우드 쿠탑 등, 아시아네트워크, 2008년 7월
  • ・ 캄보디아의 야만시대-크메르루즈의 '민주캄푸치아', 선윤환, 신윤환의 동남아 이야기, 서남포럼, 2008년 4월 28일 http://www.seonamforum.net/newsletter/view.asp?idx=1500&board_id=13&page=1
  • ・ <경향신문> '핏빛 광기' 역사속으로 퇴장, 1998년 4월 17일
  • ・ <경향신문> 요동찬 캄보디아 현대사의 증인 시아누크 전 국왕 별세, 2012년 10월 15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100402
  • ・ <시사저널> 지구촌의 한 주 - "킬링필드의 킬러를 국제 법정으로" 1997년 7월 3일
  • ・ <한국일보> 치매가 행운이었나…끝내 단죄 피한 킬링필드의 '여왕'
    http://www.hankookilbo.com/v/e0571d730bec4581a7df1d29220c7206
  • ・ <한겨레21>, 키신저 ·보응우옌잡·훈 센을 증인석에!, 2009년 3월 4일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445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