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빌 클린턴

다른 표기 언어 Bill Clinton
요약 테이블
출생 1946년 8월 19일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제 42대 대통령. 1993년부터 2001년까지 재임 동안 미국 경제의 호황을 이끌어갔다. 그러나 성추문으로 미국 최초로 의회의 탄핵을 받았다. 유복자로 태어나 조지타운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학위를 받았고 예일대학교 법학대학원을 마치고 아칸소대학 법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1978년 32세 나이로 당시 미국 최연소 아칸소 주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1992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결정되었고, 부시 대통령과 맞붙어 46세의 나이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96년 재임에 성공했고, 2001년 퇴임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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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장기
  2. 정치 입문
  3. 대통령 선거
  4. 클린턴 정부 성과
    1. 재정 흑자
    2. 경제 호황
    3. 소말리아 내전 개입 실패
    4.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5. 의료보장법(health Security Act) 실패
    6. 동성애자 군 복무 정책
    7. 중동 평화 협상
    8. 대북정책 : 페리프로세스
  5. 연임
  6. 논란
    1. 화이트워터게이트
    2. 지퍼게이트
  7. 퇴임 후 클린턴 재단 설립

젊은 대통령이자 최초의 베이비붐 세대 대통령이다. 8년의 재임기간 내내 미국 경제의 호황을 이끌어간 대통령인 동시에 성추문으로 최초로 의회의 탄핵을 받은 대통령이다. 또 민주당 출신으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다음으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이지만, 트루먼 대통령 이후로 재임 기간 중에 상·하 양원을 모두 야당에게 넘겨준 대통령이기도 하다.

빌 클린턴
빌 클린턴

성장기

클린턴은 1946년 8월 19일 미국 남부 아칸소 주의 호프에서 태어났다. 빌 클린턴의 어릴적 이름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였는데, 외판원이었던 아버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주니어는 빌이 태어나기 석달 전에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생계가 막막해진 어머니 버지니아 카시디는 호프에서 야채가게를 하는 친정 부모님께 빌을 맡겨놓고 다른 도시에 있는 간호학교에 다녔다.

마취담당 간호사가 된 버지니아는 빌이 다섯살 때 핫스프링스에서 자동차 대리점을 하는 로저 클린턴과 재혼해 5년 후 빌의 이복동생 로저를 낳았다. 계부인 로저 클린턴은 아내와 이복동생에게 구타를 일삼는 알콜 중독자였다. 빌은 열악한 가정환경에서도 한번도 본 적 없는 자신의 친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성장했다. 빌 클린턴은 열네 살이던 1962년부터 법적으로 클린턴이라는 성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16세였던 1963년 미국재향군인회가 설립한 훈련기구 '보이스 네이션'의 아칸소 주 학생대표로 선발되어 백악관을 방문해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하기도 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때를 '특별한 순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후 클린턴은 우수한 학업 성적을 바탕으로 워싱턴 D.C.의 조지타운 대학교에 입학했다. 남부 사투리를 쓰는 시골뜨기 클린턴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명문가 자제들과 친해져 2년 연속 학년회장을 지냈다. 3학년 때에는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정계 진출을 꿈꿨다.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한 후에는 전 미국에서 32명만을 선발하는 로즈 장학생이 되어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로 유학을 가 PPE(철학, 정치, 경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다시 예일대 로스쿨에 입학해 3년 후 1973년에 법무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예일 로스쿨 재학 중 한 학년 선배인 힐러리 로댐을 만났다.

옥스포드대에 있을 당시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징집 영장을 받거나 자원해서 베트남으로 떠날 때였다. 그러나 클린턴은 영국 유학 기간 동안 징집이 유예됐다. 클린턴은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도 가담했으나 동시에 징집을 기피하는 상황이 자신의 정치적 생존에 치명타를 가할 것을 우려했다.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기회주의적 병역 기피라는 논란을 낳았다. 또 클린턴은 옥스퍼드에 있는 동안 마리화나를 피우기도 했는데 출마 당시 마리화나 흡연 의혹이 제기되자 "마리화나를 입에 물기는 했으나 결코 들이마시지는 않았다((I didn't inhale)"는 변명을 내놓기도 했다.

정치 입문

1972년 대통령 선거 때 민주당 후보인 G. 맥거번의 유세에 참여해 텍사스에서의 선거운동을 이끌었다. 예일 로스쿨 졸업 후 아칸소 파예트빌 대학의 로스쿨에서 법학교수가 되었으며 1974년 28세의 나이로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했으나 낙선했다. 1975년 힐러리 로댐과 결혼했다. 1976~1978년 아칸소주 검찰총장으로 선출됐다. 32세였던 1978년 아칸소 주 주지사로 선출됐고, 당시 미국 최연소 주지사가 됐다.

클린턴의 주지사 첫 임기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으며, 1980년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에게 패해 낙선했다. 클린턴은 1982년 다시 주지사 선거에 도전해 당선됐고 임기동안 교육개혁과 경제활성화에 집중했다. 1986년과 1990년 재선되어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아칸소 주의 주지사를 연임했다.

대통령 선거

1992년 대통령 선거는 공화당의 조지 H.W.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하는 선거였다. 흔히 부르는 아버지 부시는 이라크를 상대로 한 걸프전에서 승리하고 구소련 붕괴 이후 안정적으로 국제관계를 조율하는 등의 대외치적을 주로 내세웠다. 그러나 군수산업 불황등 경기 부진 등으로 인해 실업률이 7%를 넘는 상황이었으나 부시는 특별한 경제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에 빌 클린턴은 버스를 타고 미국 전역을 도는 신선한 방식의 선거유세를 전개하면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슬로건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슬로건은 이후로도 탁월한 정치광고 중 하나로 꼽힌다. 선거전에서 세가 밀린 공화당은 빌 클린턴의 주지사 시절 제니퍼 플라워스와의 성추문, 월남전 반대 활동 및 병역 기피문제, 마리화나 흡연 의혹 등을 집중 제기했다.

그러나 클린턴은 선거 토론에서 청중과 카메라에 친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TV에 출연해 색소폰을 불면서 대중적 이미지를 확산시켰다. 또 빌 클린턴의 인기는 뉴욕 전당대회 이후 부통령 후보로 테네시의 젊은 상원의원 엘 고어를 지명하면서 더욱 높아졌다. 클린턴은 선거운동 때 아내 힐러리의 뛰어난 정책 능력을 두고 '하나를 사면 하나가 공짜(Buy one, get one free)'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기도 했다.

선거 결과 일반 투표에서 클린턴은 43%를 득표했고, 조지 부시는 37%를 얻었으며 무소속 후보로 나와 초반 파란을 일으켰던 백만장자 로스 페로는 19%의 득표율을 보였다. 클린턴 대통령 선거인단의 결선 투표에서는 370 대 168로 부시를 이겼다.

클린턴 정부 성과

재정 흑자

1993년 2월 취임한 빌 클린턴은 연방정부의 만성적인 재정적자 문제와 맞닥뜨렸다. 클린턴의 취임 전 해 미국 정부의 재정 적자는 사상 최고 수준인 2900억 달러에 이르렀다. 1993년 8월 클린턴 행정부는 의회에 3280억 달러의 세입 증가, 3290억 달러의 지출 삭감, 460억 달러의 이자부담 경감 등으로 재정 적자를 감축하겠다는 구상을 담은 예산안을 제출했다. 공화당의 반발이 있었으나 '미국을 위한 변화의 비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예산안은 근소한 차이로 의회를 통과했다.

이를 기반으로 클린턴 행정부는 50년 만에 균형재정을 달성하고, 두번째 임기인 1998~2001년 연방재정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연방 예산은 클린턴의 임기가 끝나는 2000년 말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인 2370억 달러의 흑자가 됐다. 미국 의회예산국(CBO)에 따르면 1970년대 이후 미 연방정부 재정이 흑자를 낸 유일한 시기로 기록됐다.

경제 호황

미국은 클린턴이 재임하는 1990년대 동안 연속적인 경제 호황을 누렸다. 실업률도 클린턴 전 대통령 재임 첫해인 1993년 말 6.5%였지만 이후 꾸준히 낮아져 2000년에는 3.9%까지 감소했다. 물가상승률은 1961년 케네지 정권 이후 최하인 연 평균 2.5%, 주택 보유율은 사상 최고인 67.7%를 기록했다. 이 때문에 클린턴은 퇴임 이후에도 '성공한 경제 대통령'으로서의 후한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클린턴 전 대통령이 당시 경제 규제를 풀다가 금융업계에 대한 안전장치도 풀어버렸다는 비판도 있다. 클린턴 정부 당시인 1999년 '글래스-스티걸 법'이 폐기됐는데, 이 법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겸업을 금지해 은행 예금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이 법이 폐기되고 대신 금융서비스 현대화 법안이 마련되었는데, 이 조치가 2008년 금융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이다. 또 저소득층의 주택소유를 늘리기 위해 은행들에게 주택융자를 확대하도록 압박한 것도 주택시장 버블의 전초가 됐다는 지적도 있다.

소말리아 내전 개입 실패

클린턴 행정부는 1993년 군 병력을 투입하고 군벌조직의 근거지에 폭격을 가하는 등 격화되고 있던 소말리아 내전에 적극 개입했으나 42명의 미군이 사망하는 희생만 남긴채 1994년 철수했다. 특히 '블랙호크다운'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1993년 모가디슈 전투에서는 미군 18명이 사망하고 73명이 부상당했으며, 반군 조직이 미군의 시신을 끌고다니는 모습이 방송으로도 내보내 클린턴 행정부는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 3국의 무역장벽을 낮춘 NAFTA 협정은 전임 조지 H.W. 부시 행정부에서 대선 직전 협상을 시작해 선거 패배 직후인 1992년 12월 협정에 서명했다. 당시 대다수 민주당 의원들이 협정에 반대했으나, 빌 클린턴은 취임 이후 NAFTA 협정의 추가 협상과 의회 비준을 추진했다. 협정은 공화당 의원 다수의 찬성 아래 비준을 통과해 1994년에 발효됐다.

NAFTA 통과는 클린턴 행정부의 주요 성과로 꼽히나 시간이 지날 수록 자유무역에 따른 교역 활성화 보다는 일자리 박탈이라는 부정적 요인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2016년 대선에서도 민주당 경선 후보 버니 샌더스와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 모두 NAFTA로 인해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겼다며 협정에 찬성한 힐러리 클린턴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힐러리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조건부 반대'를 내세우는 배경이기도 하다.

의료보장법(health Security Act) 실패

빌 클린턴은 대선에서 미국의 민간 건강보험제도의 폐해를 날카롭게 비판했으며, 전국민 의료보장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다. 취임 이후 힐러리를 비공식 위원장으로 정부 관료, 보건정책전문가, 의회전문위원 등으로 구성된 '국가 의료제도 개혁을 위한 태스크 포스'가 개혁안의 초안을 만들었다. 지역별로 건강 보험 구매자 조직인 '건강연합'을 만들어 집단적으로 민간 보험을 구매하되 보험료나 급여 범위를 정부가 규제하고 보험료로 재원을 조달하는 방식의 건보 체제 도입을 추진했다.

그러나 내용은 법 조문만 1300쪽에 이를 정도로 복잡한 내용이었고, 초안을 만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 초기의 국민적 지지의 동력을 잃어버린 채 공화당 보수파의 조직적인 반발에 부딪혔다. 여기에 '선출되지 않은' 대통령 부인이 국가 중요정책에 개입하고 있다는 비판이 법정 다툼으로 이어졌다. 결국 법안은 의회에 상정되었으나 1994년 여름 부결됐고, 같은해 11월 총선에서 민주당은 참패하고 공화당이 상하원을 석권하는 계기가 됐다.

동성애자 군 복무 정책

빌 클린턴은 대선 당시 동성연애자에 대한 군대 내 차별을 없애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취임 이후 동성애자의 군 복무에 반대하는 여론이 고조됐고, 빌 클린턴은 취임 6개월 뒤인 1993년 7월 펜타곤과의 논의 끝에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는 새로운 정책을 내놓았다. 동성애자가 자신의 성적 취향을 공개적으로 밝히거나 지휘관, 동료들이 특정인의 성적취향을 묻는 것을 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강제 전역시키는 정책을 말한다.

이 정책은 동성애자가 성적 취향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선에서 군 복무를 하도록 했으나 동성애자와 반대론자 모두의 반발을 샀고 일부에서는 위헌이라는 비판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2001년까지 시행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이 정책으로 군복을 벗은 동성애자는 1만4500명에 달했다. 2001년 9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미군 동성애 커밍아웃 금지 정책을 폐지했으며, 공개적으로 커밍하웃 한 동성애자도 차별없이 군복무 할 수 있게 되었다.

중동 평화 협상

빌 클린턴은 1993년 취임 이후 8차례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간 정상회담을 주선하는 등 재임기간 중동 평화협상에 매달렸다. 특히 1993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합법적인 팔레스타인 정부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오슬로 평화협정을 중재한 것은 클린턴의 최대 성과로 꼽힌다. 이후 클린턴은 팔레스타인 자치를 후원하면서 이스라엘군의 요르단강 서안 철수를 공식화 하는 등 평화 협정 구체화에 공을 들였다.

1998년 10월에는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 수반과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 사이에서 팔레스타인이 국가를 창설하고 국경을 확정짓는 와이리버 협정의 최종 문안 작성 단계까지 진척시켰다. 그러나 동예루살렘의 주권을 둔 갈등이 해소되지 않아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고 2000년 9월 28일 아리엘 샤론 리쿠드당 당수의 이슬람성지 방문 사건에 따른 유혈 충돌로 파국을 맞았다.

대북정책 : 페리프로세스

1994년 북한이 핵 개발을 시작한 1차 북핵 위기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영변 핵시설 폭격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 영변 핵시설 동결에의 동의를 끌어냈고, 이를 기반으로 미국과 북한은 제네바 합의에 서명했다. 1998년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시험발사하자 미국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조정관으로 임명했다.

페리 대북조정관은 1999년 5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하는 등 남북한 등과 폭넓은 접촉을 거쳐 같은해 10월 클린턴 정부의 대북 정책을 담은 페리 프로세스를 내놓았다. 대북 포용을 기조로 한 페리 보고서는 북한과 미국 등 동맹국들이 상호 위협을 줄이면서 호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3단계 접근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1단계 : 북한의 미사일 발사 중지와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해제 △2단계 :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 △3단계 북미, 북일 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페리 프로세스를 바탕으로 북한과의 협상을 시작해 2000년 10월 조명록 특사와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상호 교환 방문을 통해 관계 개선을 천명하는 북-미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북-미 수교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페리 프로세스는 북한에 강경한 조지 부시 행정부의 등장으로 중단됐다.

한편 빌 클린턴은 2010년 8월 북한에 5개월 째 억류되어있는 두 기자를 귀환시키기 위해 북한을 전격 방문해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빌 클린턴은 8월 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다음날 커런트 TV의 로라 링과 유나 리 기자를 데리고 미국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캘리포니아 버뱅크 공항에 도착한 두 기자가 가족과 눈물 흘리며 포용하는 장면과 그 뒤를 이어 클린턴이 나타나는 장면은 방송으로 생중계됐다.

연임

빌 클린턴은 민주당 대통령으로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52년 만에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1996년 대선에서 클린턴은 경제 호황과 재정적자 감축을 가장 큰 업적으로 내세웠고, 공화당의 밥 돌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일반 투표에서 클린턴은 49%, 공화당 후보 로버트 돌은 41%, 페로는 8%의 지지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서 클린턴은 379 대 159로 돌을 이겼다.

논란

빌 클린턴은 임기 내내 화이트워터게이트, 지퍼게이트로 불린 르윈스키 스캔들 등 금전관계, 혼외정사 등의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1999년 2월에는 탄핵 위기까지 맞았다.

화이트워터게이트

화이트워터 게이트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아칸소 주지사 시절 친구인 제임스 맥두걸 부부와 함께 설립한 '화이트워터 부동산개발회사'의 지역 토지개발을 둘러싼 사기 의혹을 일컫는 것으로, 클린턴 전 대통령은 주지사로 있던 1986년 맥두걸에게 30만 달러를 대출해주도록 금융기관에 압력을 넣은 혐의와 위증 혐의 등으로 여러 차례 특검 조사를 받았다.

특히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5개월 후인 1993년 6월 이 회사의 투자개발 문의에 답하거나 납세 신고를 하는 등의 일을 처리했던 힐러리의 동료 변호사 빈센트 포스터가 의문의 자살을 하면서 논란은 더욱 확대됐다. '업무 중압감에 따른 권총 자살'로 결론이 났으나 힐러리가 관련 서류를 파기했다거나 누군가가 살해했다는 등의 음모론이 일면서 클린턴 부부가 청문회까지 나왔다.

1994년 1월 특별검사 로버트 피스크가 임명됐으며 일단 무죄로 결말이났다. 1994년 8월 케네스 스타가 뒤이어 특별검사를 맡으면서 성추문 조사까지 확대됐다. 그러나 맥두걸이 1998년 교도소에서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사건은 유야무야됐고 클린턴 부부는 2000년 9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다시 이 음모론을 거론하며 힐러리를 공격하고 나섰다.

지퍼게이트

케네스 스타 검사는 화이트워터 사건에서는 범죄를 입증할만한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했으나, 수사 범위가 확대되자 1998년 1월 클린턴이 백악관 인턴 직원 모니카 르윈스키와 불륜을 저질렀음을 밝혀냈다. 클린턴은 르윈스키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부인했으나 르윈스키가 클린턴과 10여차례 성관계를 가졌다고 증언하고 클린턴의 정액이 묻어있다는 푸른색 드레스를 증거물로 제출하면서 위증혐의에 몰렸다. 이와함께 위증교사, 증언간섭 등의 사법 방해 혐의도 받았다.

결국 클린턴은 1998년 8월 17일 연방대배심에서 증언을 했다. 현직 대통령이 자신의 형사적 혐의에 대해 연방 대배심에서 증언한 미국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이 됐다. 클린턴은 증언 뒤 대국민 연설에서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처음으로 성 접촉을 시인하면서 의회의 탄핵을 가져올 수도 있는 위증을 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이로써 이어 9월 4일에는 처음으로 '죄송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가족과 국민에게 사과했다.

일리노이 주의 공화당원 헨리 하이드가 이끄는 미국 하원은 445쪽에 달하는 스타 검사의 보고서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바탕으로 1998년 12월 19일 위증과 사법방해 혐의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공화당 측은 "클린턴은 신성한 연방 대배심 증언에서 위증을 함으로써 미국의 법질서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1999년 2월 12일 탄핵안은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퇴임 후 클린턴 재단 설립

클린턴은 퇴임 1년 후인 2002년에 클린턴 재단을 설립했다. 전세계 에이즈 퇴치와 에이즈 치료 개선을 위해 설립한 '클린턴 에이즈 계획'에서 출발해 2016년 기준 2000여 명의 직원들이 일하는 국제적 규모의 재단으로 성장했다. 2013년에는 재단의 이름에 아내와 딸의 이름을 넣어 '빌, 힐러리 앤 첼시 클린턴 재단(Bill, Hillary and Chealsea Clinton Foundation)’으로 바꿨다. 딸 첼시 클린턴이 부회장으로 재단의 운영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단은 2014년 기준 전세계에서 20억 달러의 후원금을 받았다. 재단은 매년 국내외에 기부금을 여성인권 신장, 기후변화, 경제개발, 의약품 지원 프로그램 후원 등에 사용해왔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카타르, 쿠웨이트 등 중동의 성차별, 인권침해 국가들로부터 고액의 기부금을 받은 사실이 알려져 논란을 빚었다. 클린턴은 이들 국가로부터 받은 자금이 인도적 활동에 사용되어왔다고 해명하면서, 외국 정부 차원의 기부금은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

2016년 대선에서 클린턴 재단을 두고 국무부와의 유착 논란이 일었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국무장관으로 일할 당시 클린턴 재단의 고액 기부자들이 특혜를 받았을지 모른다는 내용의 이메일이 공개됐다. 힐러리 클린턴은 '법적으로 부적절한 일은 없었다'고 대응했으나, 도널드 트럼프 후보는 특별검사를 임명해야 한다고 공세를 폈다. 빌 클린턴은 힐러리가 당선되면 대기업이나 외국인들로부터 클린턴 재단 후원금을 받지 않고, 재단 업무에서도 손을 떼겠다고 밝혔다.

참고자료

  • ・ 빌 클린턴의 마이라이프, 빌 클린턴, 정영목·이순희 역, 물푸레, 2004년
  • ・ CEO 대통령의 7가지 리더십, 데이비드 거겐, 서율택 역, 스테디북, 2002년
  • ・ <신동아>, 빌 클린턴-미국인이 너무도 사랑하고 또 미워했던 한 남자, 2009년 9월호
  • ・ <동아일보>, '착잡한 클린턴'… 유혈충돌로 공들인 평화 무산위기, 2000년 10월 16일
  • ・ 윌리엄 페리 누구?…빌 클린턴 때 국방장관, 대북정책조정관 역임, 2016년 10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