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효

박영효

朴泳孝

애국의 길과 친일의 길

요약 테이블
출생 1861년
사망 1939년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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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장 불행한 한국인 중 한 사람
  2. 낡은 국정의 개혁을 도모하다
  3. 개혁 실패로 일본 망명길에 오르다
  4. 친일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다

가장 불행한 한국인 중 한 사람

박영효(朴泳孝, 1861~1939), 영광과 오욕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생애는 그대로 비운의 대한제국 말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세계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내일의 운명을 점칠 수 없었던 역사의 흐름에 따라 그의 일생도 내일을 짐작하지 못하고, 영광과 고뇌와 오욕의 나날을 되풀이했던 것이다. 그의 생애가 바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엽에 걸친 근대한국사를 가장 잘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뒤 식민지 치하에서 오욕의 길을 가장 적나라하게 걸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의 일생을 새삼 되돌아보는 것은 그를 역사적으로 재평가하려는 구차스러운 생각에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를 통해 근대한국사에서 반성의 자료를 찾아 역사의 거울로 삼으려는 것이다.

나라를 문명개화로 이끌려는 개화파의 주역 박영효와 조선을 병탄한 일본의 후작이자 중추원고문 박영효, 이 같은 아이러니가 역사에서 연출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울분과 자괴감은 느낄지언정 그에게 침을 뱉을 수는 없다.

박영효는 문벌정치가 한창이던 시기에 손꼽히는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전후의 철종 연간은 조선조 말기의 착잡한 사회상을 드러낸 농민봉기와 서학의 대두로 전국이 극도로 소연한 시기였다. 더욱이 조선 왕조의 완강한 천주교 탄압은 험난한 개항시기의 역사를 예고해주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판서 박원양(朴元陽)으로 가계와 문벌이 말해주듯이 손색없는 양반 신분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양반 자제들이 그랬듯이 박영효도 어려서부터 한학 공부에 몰두했다. 그는 뒷날 걸맞지 않게도 현현거사(玄玄居士, 은둔의 선비라는 뜻)라는 호를 즐겨 쓰기도 했다.

그의 장래는 누가 보아도 부러워할 만큼 보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1872년 2월, 그의 나이 열두 살 때에는 선왕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했다. 이듬해 4월에는 임금의 사위로 금릉위(錦陵尉)로 봉해지고,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려지게 됨으로써 그의 앞날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탄탄할 것처럼 보였다.

박영효
박영효

그러나 이렇게 약속된 앞날을 두고 박영효는 만족하지 앉았다. 아니 도도하게 밀어닥친 개화의 물결이 박영효와 같은 인물을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개화파 또는 개화운동이 우리 역사에 등장한 것은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 등 선배 세대에 의해서였다. 이들 1세대는 그들이 처한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볼 때에 중심에 있었던 인사들만은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볼 때 대체로 불우한 위치에 있었던 그들의 개안으로 빛을 본 개화사상은 다음 세대, 곧 명문 출신인 박영효, 김옥균,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박영효의 형인 박영교(朴泳敎)에 의하여 비로소 현실적인 힘을 발휘한다.

선배들이 베이징, 톈진을 왕래하면서 수입한 새로운 서적들은 새로운 사상에 굶주리던 지식인 청년들에게는 하나의 경이었다. 박영호가 직접 말한 것처럼 개화사상은 그의 일가인 박규수의 집 사랑채를 통해 청년들에게 전달되었다.

낡은 국정의 개혁을 도모하다

박규수는 실학의 거두 박지원의 손자로서 청년기의 대부분을 초야에 묻혀 지낸 인물이다. 그는 뒤늦게 벼슬하여 진주민란 때에는 현지에 내려가 백성의 참상과 관리들의 부패상을 보고 분개하기도 했으며, 후일 평안감사 때에는 대동강까지 거슬러 올라온 제너럴셔먼호를 관민이 싸워 침몰시킬 당시 책임자였다. 그러나 뒤에 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다녀오면서부터 개화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고, 중인계급의 역관인 오경석과 친분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문물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오경석은 중인계급으로 조선조 말기의 사회적 모순을 누구보다 현장에서 겪었고, 이의 타파를 위해 개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자각한 인물이다. 그는 뒤에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때 외교실무자로 활약하여 개항의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유대치는 한의원 출신으로, 특히 불교와 도교, 한국적 전통신앙에 해박하고, 민중에 뿌리를 박은 내세사상 또는 구원사상의 참뜻을 이해한, 백의정승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이들 선각자들의 가르침이 서울 양반층의 소장 인사들에게 권장 · 보급되어, 새로운 사상은 빠른 속도로 번져나갔다. 박영효, 김옥균 등 개화독립당의 요인들은 물론이고, 어윤중 같은 청년 정치인들까지도 그들의 영향을 받아 국제외교와 개화정계에 앞장서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들의 영향으로 젊은 소장 인사들이 개화사상의 선봉이 되어, 근대국가 형성을 촉구하는 자강독립운동 정신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졌다.

흔히 개화파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김옥균이고, 박영효는 권력의 중심부에 밀착되어 있던 인물이라고 말한다. 박영효는 김옥균보다10년쯤 연하였으나 문벌과 지위가 좋아 항상 대표 자격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사람됨이 소탈했으며, 청년다운 패기도 있었다. 비록 일당의 영수로서의 수완과 역량은 부족했으나 정치적인 배려에서 추대되었던 것이다. 이규완(李圭完)은 박영효와 김옥균을 이렇게 비교하고 있다.

김옥균은 사람을 먼저 가볍게 보다가 나중에 애지중지 알아보았고, 박영효는 먼저 믿고 친근히 지내다가 나중에는 소원하게 하였다. 박영효와 김옥균이 나라를 위하는 점은 똑같은 것이지만, 다만 사람을 알아보고 알아주지 못하는 점에서 두 사람의 인격과 식견이 다른 바 있었다.

한편 박영효의 맏형 박영교는 성격이 강직하고, 일찍이 《지구도경(地球圖經)》 같은 새 서적도 간행했는데, 묵묵히 자기 소신을 실천하는 본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개화사상에 물든 박영효에게 일본 나들이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그의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임오군란 뒤인 1882년 8월 13일에 일본과 체결한 제물포조약의 약정을 이행하기 위한 수신사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는 부사 김만식(金晩植), 종사관 서광범 등 14명과 함께 일본 시찰을 떠나는 민영익, 김옥균 일행과 동행하게 되었다.

그 사명은 당초부터 구차스러운 것이었다. 그 조약 속에는 “임오군란의 주모자를 잡아 처형할 것과 손해배상금 50만 원을 물 것, 그리고 즉시 특사를 보내 일본에 사과할 것” 따위의 조항이 들어 있었으니 말이다. 곧 6월 군변(임오군란)에 대해 국서를 들고 가서 일본에 사과하고, 제물포조약의 비준교환을 무난하게 수행하여, 손해배상금 50만 원의 지불방법을 완화하는 교섭 따위가 그의 임무였다. 체제 기간은 약 1개월 예정이었다. 그런데 불과 5천 원 정도밖에 안 되는 경비마저 일본 정부의 보조를 전제로 하고 떠난 박영효의 심정은 그야말로 착잡했다. 일본 정부는 관세 수입과 금광을 담보로 잡고서야 교섭을 수락했다.

박영효는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일본은 일찍이 서양의 과학문명을 받아들여 모든 분야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다. 이 같은 감탄과 감명은 비단 그 혼자만의 느낌이 아니었다.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 그를 수행한 모든 인사가 공감하는 바였다. 일행은 일본에 머물고 있는 구미 사절들과 접촉하면서 국제관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었으며, 세계정세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되었다.

박영효 등은 신흥 일본의 비약적인 문물제도를 보고, 조국이 사는 길은 서양 문물의 도입 이외에는 없다고 단순하게 믿게 되었다. 그들은 개화 · 독립 · 자강으로 조국의 개화 · 혁신에 전진하려고 결심했다.

1882년 11월, 박영효 수신사 일행은 정보 수집과 자금 운동을 좀 더 계속하기 위하여 김옥균과 서광범을 남겨둔 채 귀국했다. 그러나 귀국하고 보니 국내 정세는 그들에게 더욱 큰 실망을 안겨줄 뿐이었다. 그들이 없는 동안 조정 내외와 척족 중심의 정부는 온통 친청사대의 보수세력으로 들어차 있었다. 그 결과, 귀국 뒤에 이들이 중심이 되어 소장 혁신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귀국한 그들은 개화당 혹은 독립당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척족세력 중심의 보수세력과 극단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박영효는 귀국한 지 얼마 뒤에 한성부윤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개혁의 열의에 불타던 그는 사사건건 친청사대당의 완강한 반대와 모략에 부딪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복제개량, 색의 장려와 종로-동대문 사이의 도로 정비를 위한 가가(假家) 철거 등을 추진했는데 그는 척신의 반대와 모략에 걸려, 이듬해인 1883년 3월에 광주유수라는 한직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박영효는 초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김옥균 등과 합심하여 일본의 힘을 빌려 낡은 국정을 개혁하려고 정치적 활동을 계속했다. 그들이 지나치게 성급한 현실개혁에 집착한 나머지 일본 제국주의세력의 한국 침투에 본의 아닌 동조자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한 끝에 대일차관 3백만 엔의 교섭을 위한 국왕 신임장을 얻었고, 다시 희망에 부푼 박영효는 이 자금을 가지고 직속군대를 육성하려고 6백 명의 장정을 모집했다. 그러나 결국 차관교섭이 실패하여 박영효는 군사 양성 계획을 포기함과 동시에 광주유수 자리도 사임하고 말았다.

개혁 실패로 일본 망명길에 오르다

드디어 박영효 등은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청국의 세력과 그것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사대당을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대당이 존재하는 한 그들의 목적 달성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국력이 대단하지 못했던 일본이 청국 등 국제정세의 동향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주한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같이 술수에 능한 사람과의 교섭에서 박영효 등 개화파는 쓰디쓴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박영효의 글씨
박영효의 글씨

그 무렵 청국과 프랑스간에 안남사건이 터지자, 일본은 종전의 태도를 바꾸어 박영효, 김옥균 등을 꼬드겼다. 이들은 일본 정부의 음모와 책동을 의심하지 않고 동지를 모아 정변을 모의했다. 그들은 박영효의 집에 모여 모의한 끝에 1884년(고종 21) 음력 9월 17일의 우정국 청사 낙성식을 계기로 거사하여 친청사대당을 타도하고 혁신 정부를 수립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이 추진되는 동안 박영효는 김옥균과의 긴밀한 연락 아래 일본공사와도 교섭을 벌여, 거사에 필요한 병력 일부를 일본군이 지원한다는 약속도 받았다.

드디어 음력 9월 17일, 안국동에 있는 우정국 개설 연회에 사대당의 주요 인물들과 외국 사절들이 참석했다. 연회가 막 시작될 무렵 갑자기 근처에서 불이 나면서 주위가 소란해졌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민영익은 밖으로 빠져나오다가 자객의 도끼를 맞았으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정변을 일으킨 직후 박영효는 김옥균, 서광범과 함께 한밤중에 고종의 침실로 들어가서 청나라 군사들이 난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면서 피신할 것을 앙청했다.

영문을 모르는 국왕이 강요에 따라 ‘일편내아(日便來衙, 일본 쪽이 관아로 들어온다는 뜻)’라는 친서를 건네주자, 박영효는 이것을 가지고 일본공사에게 연락, 고종을 경우궁(景祐官)으로 옮기게 하고 일군 2백 명이 왕을 호위하게 했다. 한편 그들은 사대당의 영수인 민영목, 민태호, 조영하, 이조연 등 7인의 사대당 벼슬아치를 살해했다.

정변이 성공하여 그들의 꿈이 실현되는 듯했다. 독립당은 즉시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고, 박영효는 신내각의 전후영사(前後營使) 겸 좌포장이라는 군사권의 중임을 맡았으며, 김옥균은 호판서리(戶判署理) 겸 혜상공국당상(惠商公局堂上)이라는 재정권을 거머쥐는 직책을 맡았다. 곧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박영효와 홍영식이 장악하고, 내무와 재무의 실권은 김옥균이 쥐었던 것이다. 독립당은 그들의 숙원이었던 국정 쇄신의 꿈을 실현하려고 14개조의 시정요강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청군의 개입으로 혁신정부가 3일천하로 끝나자, 진퇴유곡에 빠진 박영효는 고종과 작별을 고하고, 일본공사를 따라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뒤에 처진 박영교와 홍영식은 국왕을 따르다가 사대당에게 참살되고 말았다.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는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라고 이름을 바꾸고 지냈다. 망명생활은 그리 단조롭지만은 않았다. 불교 서적을 가까이 하는가 하면 미국인으로부터 친절한 대접을 받으며 학문에도 열중했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일제의 배신행위를 견디다 못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언어 · 풍속이 너무나 달랐던지 1885년 5월 31일 우편선으로 시모노세키에 되돌아와 김옥균과 합류했다.

그는 1888년 명치학원의 영어과를 졸업하고 시모노세키 미국 교회에서 일을 보기도 했으며, 위약증(胃弱症)으로 많은 고생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의 전도와 후배들의 교육을 위해 일본 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한국자제의 교육을 목표로 내세우고 친린의숙(親隣義塾)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본국에서 밀파된 자객 이일직(李逸稙, 일본 이름 田中常一), 권동수(權東壽, 일본 이름 中野耕心), 권재수(權在壽, 일본 이름 中野宅心) 등이 집요하게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고 1887년 일본에 입국한 뒤 제일은행 경성출장소를 거쳐 학자금이라는 명목으로 가끔 1백 엔 또는 2백 엔을 받아다가 정치자금으로 썼다. 박영효는 이일직 등과 싸우다가 검거되어 1888년 5월 2일 예심 종결에서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그는 망명지에서 조국의 조정에 상소를 올리기도 했는데, 갑신정변이 충국 · 애국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국가에도 무익하고’ 그 자신으로서도 부모형제와 친구들이 죽게 되는 결과를 낳은 것을 참회했다. 하지만 그는 더욱 발전된 민주사상을 피력하면서 “당연히 행할 일을 행하지 아니하면 도리어 앙화를 받습니다.

또 비상한 일을 한 뒤에야 비상한 공이 있습니다”라며 계속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894년 박영효가 망명한 지 10년이 지나는 시기에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했다.

그러자 일본은 박영효를 이용하기 위하여 주한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烏圭介)로 하여금 그의 귀국을 알선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는 동지 2명, 일본인 2명과 함께 조국을 등진 지 꼭 10년 만인 1894년 8월 6일 귀국하여 정세를 관망하기에 이르렀다.

친일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다

당시 국내정세는 명성황후와 다시 집권한 흥선대원군 일족 사이의 알력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계략에 비상했던 명성황후는 지난 10년 간의 원한도 잊고 일본 정부가 밀고나온 박영효를 포섭하려고 1894년 8월 5일 그의 죄명을 말소했다. 따라서 박영효는 명예 회복과 동시에 정치무대의 표면에 나서게 되었다. 박영효의 등장은 이 나라 정계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특히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공사는 궁중에서의 박영효의 신임도를 면밀하게 살폈다. 그는 은밀히 박영효를 만나 대례복을 기증하며 그를 회유하는 한편, 그에 대한 왕과 왕비의 신임을 살피기도 했다.

그런데 이 무렵, 흥선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李埈鎔)의 왕위 추대 음모사건이 터져 대원군은 더욱 왕에게서 멀어지고, 일본공사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1894년 12월에 정부의 인사 개편이 단행되었다. 이 인사 개편에서 박영효는 내무대신으로 임명되었으며, 제2차 김홍집 내각에서는 김홍집, 박영효의 연립정부까지 조직하게 되었다.

1910년 8월 29일, 치욕적인 병합으로 나라는 망했다. 나라와 함께 박영효의 정신도 쇠잔했는지, 그해 10월 7일에 일제가 한국인 회유정책의 하나로 그에게 준 후작의 작위를 날름 받았다. 그 뒤 중추원고문을 지냈고, 1918년에는 조선식산은행 이사에 취임하기도 했다.

3·1운동을 준비하던 손병희 계열의 인사들이 그에게 접근하여 민족대표로 참여해줄 것으로 요청했으나 그는 이를 외면했다. 하지만 이완용처럼 경고문을 내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1925년에는 정(正) 3위로 서훈까지 받았다. 이때부터 일제의 꼭두각시로 여지없이 전락했다.

그는 또한 민족지를 표방한 창간 당시의 〈동아일보〉(1920년 4월 1일) 사장직에 취임하기도 했다가, 1939년 9월에 드디어 영광과 오욕의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그의 생애 후반기에 일제는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전시체제로 사회를 온통 쥐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순종하는 자세만을 보여 주었다.

그를 논할 때 마지막으로 지나칠 수 없는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우리나라의 국기인 태극기 문제이다. 원래 국기는 병자수호조약 당시부터 논의되어서 대체로 국기의 기본골격은 결정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882년 박영효 일행이 일본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국기를 적절하게 사용하라는 왕의 내락을 받았다.

그는 사행차 타고 가던 일본 기선 메이지마루에서 영국 총영사 아스톤과 선장인 영국사람 제임스와 함께 조정에서 결정했던 종래의 태극 팔괘의 도안을 놓고 의견을 듣다가 태극 4괘 도안을 넣는 국기로 결정했다. 1882년 8월 14일 일본 고베에 상륙한 뒤부터 태극기를 즉시 게양 · 사용하는 한편 본국 정부에도 보고했고, 그 뒤 정부에서는 1883년 1월 27일 국기 사용을 정식으로 반포했다. 그는 국기를 본국에 보내면서 우방 각국에도 알리는 동시에 고베의 숙소에도 게양했다. 도쿄에 도착해서는 10월 3일의 왕비 탄생 축하연 석상에 게양하여 자주독립의 애국심을 발휘했다.

어쨌거나 그는 시대가 만들어놓은 인물로, 때로는 역사의 주역으로, 때로는 일제의 꼭두각시로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지금 인사동에는 그가 살던 집이 전통 찻집으로 탈바꿈하여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그의 영욕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하겠다.

박영효의 가옥
박영효의 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