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이완용

경덕, 李完用

영악한 처세술로 나라마저 팔아먹은 반역자

요약 테이블
출생 1858년
사망 1926년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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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세에 따라 변신을 거듭하다
  2. 일가붙이 부호의 양자로 가다
  3.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4. 아관파천을 주도하다
  5.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6. 고종을 퇴위시키다
  7. 한일병합에 앞장서다
  8. 철저한 친일부역배로 생을 마감하다

시세에 따라 변신을 거듭하다

흔히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을 친일파, 매국노라고 말한다. 일제에 붙어 나라를 팔아먹었으니 그런 지탄이야 어김없는 사실에 따른 매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수준의 매도쯤으로는 지금도 그는 지하에서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이다. 1907년 2월 2일, 충복이요 비서였던 생질 김명수에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처음 스물다섯 무렵에 종래 조선 사람들이 목적으로 삼던 문과에 합격했다. 당시 미국과의 교류가 점점 요긴했기 때문에, 그런 때에 신설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하여 공부하고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뒤 을미년에 이르러 아관파천 사건으로 인해서 친러파라 일컬어졌다. 그 뒤 러일전쟁이 끝남을 알릴 즈음에 친러파에서 전환하여 현재의 친일파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무릇 천도에는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것을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에도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을 또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에 때를 따라 변역이 없다면 이것은 실리를 잃어 끝내 성취될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는 서양으로 돌아가기가 어렵다. 목하 시세가 또 돌변하고 있으니 모름지기 이런 기회를 타서 인사의 적의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 〈언행잡록〉, 《일당기사(一堂紀事)》

그는 말을 마치고 “이는 숙질간의 이야기이니 남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이때는 을사조약이 끝난 뒤 러 · 프동맹으로 국제정세가 변하고 있었고, 나라를 팔아먹은 오적으로 지목하여 그를 죽이려는 운동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었으며, 각지에서 의병이 크게 일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힘의 논리에 따라 처음에는 수구파, 다음에는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로 변신하다가 그 ‘변역’을 보아 다시 변신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되니 친일파, 매국노라는 지목은 결과론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는 또 평상시에 조선 사람들이 흰 옷과 푸른 옷을 즐겨 입는 것을 보고 이런 습속을 고치기 위해 무슨 색깔이 좋을지를 궁리했다. 그런 끝에 회색이 좋다고 하여 사시사철 회색 옷을 입었다고 한다. 그는 기질적으로 회색분자이면서 자신의 권세와 이권을 챙기기 위해 변신을 거듭했다. 이로 따져보면 그가 영원한 스승으로 받들던 죽은 이토 히로부미도 그에게 고마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자기의 이권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를 스승으로 받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그는 어떤 출신 배경을 가지고 이렇듯 시대의 패륜아와 탕아로 전락했던가?

일가붙이 부호의 양자로 가다

이완용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의 가난한 선비 이호석(李鎬奭)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들 이씨는 본관이 우봉(牛峯)으로 대대로 노론계열에 속했다. 이호석의 5대조 이재(李縡)는 숙부 이만성(李晩成)이 신임사화 때 노론계열로 죽임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용인에 은거하며 성리학에 몰두했다. 그 뒤 이들 자손은 영락하여 겨우 선비 체면만 세우며 살았다.

이완용은 여느 경우처럼 아버지에게서 《천자문》, 《동몽선습》 따위를 배우다가 열 살 때에 이호준(李鎬俊)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이호석과 이호준과는 6대조에서 갈려나갔으니 먼 일가붙이였으나(32촌) 이호준의 집안은 거의 대대로 양자로 가계를 이어왔기에 당내친(堂內親, 8촌 이내의 가까운 친척)에서는 양자를 구할 수가 없었다. 이호준은 당시 서울 안국동에 살고 있었는데, 처가 덕분으로 벼슬을 얻어 했으니 이호석의 집과는 사뭇 가세가 달랐다. 이호준의 장인은 민용현으로 비록 민씨의 중심세력은 아니었으나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호준은 민씨의 힘을 입어 벼슬길에 나와서 1870년에는 전라감사가 되기도 했다.

촌아이 이완용이 안국동의 양갓집으로 들어온 날 양어머니 민씨는 정성껏 밥상을 차렸다. 양어머니는 그가 고기 씹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민씨 : 고기가 질겨 씹기 어려우면 뱉어내라.
완용 : 한번 입에 넣은 것을 질기다고 어떻게 뱉어냅니까?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흐뭇해 박수를 치며 웃었다고 한다. 또 마흔일곱의 중늙은이 이호준도 그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이런 그였으니 양자 이완용의 혼사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런 탓인지 이완용이 열세 살 때에 명문가인 양주조씨 조병익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했다. 이호준에게는 평양기생의 몸에서 난 아들 이윤용(李允用)이 있었으나 서자이기에 가통을 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윤용은 흥선대원군에게 재주를 인정받아 흥선대원군의 서녀와 짝을 지어 사위가 되었다. 이렇게 이호준은 혼인관계에 있어 명문이나 세도가와 줄이 닿아 있었다.

이호준의 양자가 된 이완용은 독선생을 들여앉혀 글을 배웠고 명필을 초빙해 글씨도 익혔다. 그는 스무 살 무렵, 《주역》 등 유가경전을 거의 배우고 나서 스물다섯 살 때 증광별시(增廣別試)에 합격했다. 이 과거는 임오군란을 진압한 뒤에 이를 경축하여 보인 시험으로 극도의 부정으로 얼룩졌다고 황현은 《매천야록》에 쓰고 있다.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그 뒤 그는 승지 · 규장각대교 등의 벼슬을 하면서 임금을 모시고 민비의 총애도 입었다. 그런데 그는 성장하면서 말수가 아주 적었고 목소리도 나직했으며 말을 할 적에는 신중하게 생각한 뒤에 했다고 한다. 또 농담이나 잡담도 거의 하지 않았다. 몸가짐을 신중하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성격은 돌과 같이 침착하고 얼음과 같이 냉철하여 소심주도(小心周到)하고 사려 과단한 변종의 인물이었다”(《한국근대사론저집》)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그는 남달리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입었다.

그는 1885년 4월 홍문관 수찬으로 6품직에 올랐는데, 이때에 그는 홍문관에 있는 동료 민종식, 이준용 등과 함께 여섯 차례에 걸쳐 신기선(申箕善) 등 갑신정변의 연루자를 국문하여 뿌리 뽑으라고 강경하게 요구했다. 그는 이때 수구파의 한 사람으로 민씨 추종세력임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또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를 정적으로 삼았다.

이해 8월 조정에서 육영공원을 세워 귀족의 자제를 뽑아 산수, 언어, 정치, 물리 등의 과목을 가르칠 적에 그도 여기에 들어갔다. 또한 1887년 4월에 왕과 영의정 심순택이 보는 앞에서 갑신정변의 혐의자인 신기선, 지운영, 지석영 등을 국문할 때에는 문사낭청(問事郎廳, 심문관)의 자격으로 여규형 등과 함께 참여하여 신임과 명성을 얻었다.

1887년 7월, 박정양이 미국전권대신으로 갈 때 이완용이 참찬관으로 따라갔다. 그가 육영공원에서 배운 영어와 서양 지식을 써볼 기회를 잡은 것이다. 당시 미국공사관원은 10여 명이었다. 그는 미국생활 5개월이 채 못 되는 때 풍토병에 걸려 이를 핑계대고 돌아왔다. 중앙 정계에서 소외되는 처지를 염려해 급하게 돌아온 것이라 볼 수도 있고 향수병 탓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동부승지 따위의 벼슬을 받아 다시 임금 곁에 있었고 이어 외무참의로 승진했다.

1888년 10월에 그는 다시 미국의 대리공사로 부임했다. 당시 박정양이 미국에서, 조선 속국(종주권)을 내건 청국의 외교정책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원세개의 압력을 받아 10개월 만에 소환의 명을 받고 귀국하게 되자, 그 대리의 일을 이완용이 맡은 것이다. 박정양은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하는 등 무능하기 짝이 없었으며 현지법을 어기고 담배를 시장에 내다 파는 밀수행위를 하여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 그는 상투를 틀고 모자를 그 위에 쓰고 너덜너덜한 관복을 입고 다녀 어린애들에게 돌팔매질을 받기도 했다. 청국의 간섭과 견제로 허수아비나 다름없어서 미국인 알렌이 외교 임무를 도맡아 했다. 알렌은 고종의 신임을 받으며 이권에 개입한 인물로 고종의 지시에 따라 미국공사관원의 일원이 되었다.

이와 달리 대리공사로 간 이완용은 영어도 조금 할 줄 알았다. 당시 미국에서는 조선에는 엄청난 금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한편으로는 “서울에는 서양인들이 조선의 어린애를 잡아가서 눈을 도려내 사진기의 렌즈로 쓰거나 끓여서 약을 먹는다는 소문이 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실제 서울에는 이런 소문이 돌았다. 그리하여 자본가들이 서울 진출을 주저하고 있었다. 이완용의 처지는 박정양보다는 나았지만 별다른 외교활동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미국대리공사로 2년쯤 봉직하고 돌아왔을 때에는 미국의 여러 정치제도와 문화 · 경제 등 미국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와서는 대미외교의 1인자가 되었고 또 친미파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더욱이 조선인으로 서재필, 윤치호, 유길준과 함께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으로 꼽혔다. 내무참의를 지내고 나서 외교 · 통상과 관련이 깊은 기관인 교환서, 전환국, 육영공원의 책임을 맡아보았다. 30대 후반의 나이로 3년간 관료로 봉직한 이 시기야말로 조야의 명망을 얻고 임금의 신임을 두텁게 한 득의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젊고 패기에 찬 관료로 한국 근대화에 공헌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894년은 격동의 해였다.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고 청일전쟁이 벌어졌으며 그런 소용돌이 가운데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성립되고 갑오개혁이 이루어졌으며 민씨정권이 타도되었다.

이 시절 이완용은 어떻게 처신했던가? 그는 이때 생모의 초상을 치르느라 일시 벼슬길에서 물러나와 있었다. 당시 그는 분명히 보았다. 민중의 저항이 요원의 불길과 같이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현실을 겪었고, 개방을 단행한 일본이 거대한 청나라를 압도하고 있음도 보았다. 그러나 일본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세력이 있음도 뚜렷이 보았다. 곧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요동과 대만을 할양받았으나 러시아와 프랑스 · 독일의 간섭으로 요동을 반환하는 일본의 초라한 몰골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이런 국제정세를 읽고 친러파로의 변신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해 8월, 그에게 일본 보빙사 박정양과 함께 일본 전권공사로 나가라는 새로운 임무가 떨어졌다. 청국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낸 판국에 일본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사절이었다. 그는 마침 생모의 복상을 입고 있었는데, 고종은 그에게 제복행공(除服行公, 복상 입는 일을 중지하고 공무에 나오는 것)을 명했다. 그러나 그는 간곡하게 이를 사양했다. 하지만 외부협판이라는 중책이 다시 주어졌다. 당시 외무대신은 김윤식이었고 내무대신은 박영효였으니, 그는 실권을 잡지 못한 처지였다. 아무튼 친미파 이완용의 새로운 변신을 기대해볼 만할 것이다.

영악한 민비는 이때 대외정책을 배일친러로 전환했다. 청일전쟁 직후 러시아 · 영국 · 독일의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 직접적 동기가 되었다. 민비는 러시아공사관에 사람을 보내 접촉을 시도했다. 또 외교관료들이 중심이 된 정동파들이 민활하게 움직였다. 정동파는 미국 · 러시아와 유럽의 강대국과 연결하려는 정치집단이었다. 정동파는 러시아공사관과 민비를 이어주는 일을 맡아 나섰다. 망명해 있던 서광범과 서재필도 귀국해 정동파에 들었다. 이완용은 어느새 정동파의 리더가 되었다.

고종은 친일 김홍집 내각을 물러가게 하고 박정양 내각을 출범시켰다. 여기에 이완용이 학부대신으로 발탁되었다. 미국인 알렌이 고종에게 박정양과 이완용을 추천했던 것이다. 중립적 태도를 보인 박정양은 개성이 없는 인물로 소문이 났지만 38세의 젊은 나이로 학부대신으로 입각한 이완용은 달랐다. 이들은 차츰 친러파로 변신을 했다. 이완용은 4개월 동안 학부대신으로 재직하면서 성균관을 개편해 역사와 지리와 산술 등을 가르치게 했고 소학교령을 공포해 초등교육을 강화하는 조치를 단행했으며 한성사범학교를 설립하게도 했다.

1895년 8월 20일, 마침내 큰일이 터지고 말았다. 서울 주재 일본공사 마우라 고로의 공작으로 흥선대원군이 가담하고 외교관이 낀 일본의 낭인들과 조선의 훈련대 군사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민비를 죽이고 시신을 불태웠다. 그리고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떠받들고 제3차 김홍집 내각을 등장시켰다. 이때 내각에서는 단발령을 발동해 상투 자르는 일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이에 전국에서는 의병이 곳곳에서 일어나 친일내각의 타도에 나섰다.

이때 이완용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 그는 그의 형 이윤용과 함께 미국공사관의 서기관 알렌의 주선에 따라 미국공사관에 피신했다. 당시 그는 친미파여서 미국의 보호를 받은 것이다. 그는 미국공사관에 있을 때 중추원의관으로 임명되었다. 중추원은 내각의 자문기구였으나 실권이 없는 자리였다.

아관파천을 주도하다

그는 새로운 음모를 꾸었다. 그는 이범진, 안경수(安駉壽) 등과 어울려 고종을 친일내각의 손아귀에서 놀아나지 않게 하려고 러시아공사관으로 빼돌리려 했다. 그러나 안경수의 배반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완용은 미국의 보호를 받으며 서울에 숨어 지냈다. 그러나 이들은 계속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알렌 등의 협력과, 다시 잠입한 이범진과 모의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고종과 태자를 러시아공사관으로 빼돌리는 일을 성공시켰다. 1896년 2월 11일의 일이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아관파천이라 한다.

아관파천에 성공한 이들은 곧 친러의 박정양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때 이완용은 외부대신을 차지했고 이어 농상공부대신의 서리 등 요직에 앉았다. 그의 형 이윤용은 군부대신에 경무사(警務使)까지 겸임했다. 이때 그들 형제는 외교 · 군사 · 경찰권을 모두 거머쥐었다. 친러내각은 곧 친일파 김홍집 등의 포살령을 내렸는데,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은 민중들에게 맞아 죽었고, 유길준, 장박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베베르와 알렌은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에 가두어놓고 이권을 하나씩 챙기고 있었다. 러시아는 채 익지도 않은 고기를 황급히 먹고 있었던 셈이다. 이완용은 관련 부서의 대신으로 있으면서 이들 이권의 허가에 서명을 해주었다. 이때 그는 많은 뇌물과 이권을 챙길 수 있었다.

이해 7월에 들어 명망가와 유지들은 독립협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다.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과 중국사신이 머물던 모화관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건립하고자 했다. 이때 영은문은 청일전쟁 때 불타 없어졌고 모화관은 시민들에 의해 이미 헐려 있었다. 종래 두 건물을 헐어버리고 독립문을 세우려 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는 온건 개화파들이 주축이 되었는데 외교관료 중심의 정동구락부 회원들이 가담했다. 이 독립협회에 이완용은 정동구락부의 회원으로 끼어들었다. 그 주요 회원을 보면 서재필, 안경수, 김가진, 이상재, 오세창 등이었다. 이완용은 창립총회에서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사람들은 양두구육(羊頭狗肉)을 몰라보았으나 그 자신이 일생 벌인 행적 중에서 이것만은 차마 욕을 퍼붓지 못할 대목일 것이다.

그는 위원장으로 독립문 정초식을 주도했고 왕실과 민중을 묶어 이 운동에 참여시키는 데에 일정한 공헌을 했다. 시민 · 학생 등 4천여 명이 모인 정초식에서 그는 ‘조선의 전정이 어떠할꼬’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조선이 독립을 하면 미국과 같이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의 폴란드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와 같이 망하는 것 모두가 사람하기에 달려 있다.
- 《일당기사》, 〈독립신문〉

물론 하나도 어긋남 없는 바른 말이었다. 그는 독립문 윗자리에 있는 제자(題字)인 한글과 한문 글씨도 썼다고 전한다. 명필의 글씨인 한글과 한문의 독립문 여섯 자는 지금도 독립문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뒤 그는 고종의 환궁을 추진하여 베베르의 미움을 받았다.

1897년 고종은 경운궁(뒤에 덕수궁)으로 옮기고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이완용은 비서원경으로 발탁되었고 다음해 2월에는 독립협회의 2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종로에서 열고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해고하라고 요구하는 등 정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이로 하여 이완용은 러시아와 황실의 견제를 받았다.

이어 독립협회 회원들이, 차츰 보수 경향으로 흘러가고 개혁을 외면하는 정부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자, 정부에서는 서재필의 해고와 〈독립신문〉의 폐간을 꾀했다. 이어 독립협회가 민중 주도의 체제로 정비되고 외국의 이권개입을 규탄하고 나서자, 이권을 넘겨준 일에 앞장섰던 이완용의 입지도 난처하게 되었다. 1년 6개월 정도에 걸친 이완용의 독립협회 참여는 민족운동에 가담한 최초요 최후의 기록이다.

이제 친러파는 점점 빛을 잃고 있었고 친일파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런 때에 그는 다시 독립협회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조정의 요직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는 몇 년 동안 전라북도관찰사(전국의 행정구역 개편하여 전라도를 남북으로 가르고 관찰사를 각기 두었다)로 내려가 있었다. 이때 이완용은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었다는 지탄을 받고 독립협회 회장자리에서 밀려났다. 그에게 닥친 위기였으나 그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이완용은 어느 때에 정읍, 순창, 장성, 남원, 부안을 유람하러 나섰는데 기생 4명에 나졸을 합해 1백여 명이 움직였으며 돈 4천 냥을 경비로 사용했다(〈황성신문〉 1898년 11월 17일자). 나졸들의 행패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다. 게다가 가렴주구를 일삼아 원성이 높았다. 그런 탓인지 2개월 만에 면직되었다. 하지만 5개월 뒤에 다시 궁내부 특진관으로 발탁되었으나 거절하고 양부가 죽자 상복을 입고 정계에 등장하지 않았다.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그러다 다시 기회가 왔다. 러시아는 남진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일본과 맞섰다. 일본은 국제정세의 추이를 보다가 영일동맹을 맺고 나서 러시아의 조차지인 여순을 기습함으로써 러일전쟁을 도발했다.

1904년 2월, 일본은 러일전쟁을 도발한 뒤 대한제국에게서 한러조약의 파기를 강요하고 이어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하여 고문정치를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러시아에 일대 승리를 거두었다. 이해 11월 2일에 그는 오랜 잠복기를 끝내고 궁내부특진관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왔다. 이제 눈부신 친일주구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일제는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주둔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일선에 내세워 친일파를 곳곳에 박아두고 있었다. 재야 쪽으로는 일진회를 만들어 이용구, 송병준, 윤시병을 내세워 일제정책에 협력하거나 사주받는 단체로 써먹으려 했고, 조정안에는 이지용, 이완용, 박제순 등을 박아두어 그네들의 수족으로 부려먹으려 했다.

이런 구도에 따라 이완용은 1905년 9월 학부대신이 되었다. 햇수로 따져 9년 만에 다시 대신의 자리를 얻은 것이다. 이 무렵 이토 히로부미는 특명전권대사로 들어와 손택호텔에 자리 잡고 새로운 중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먼저 일본 군부가 러일전쟁 때 써먹고 버린 일진회를 다시 회유하여 끌어들이는 한편, 이완용 등을 철저한 주구로 만드는 일을 벌였다.

그리하여 일진회에서는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하는 것이 동양평화를 위해 어길 수 없는 일이라고 조정에 요구하기도 하고 대중들에게 떠벌였다. 이런 이야기는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이토는 한국의 외교권을 접수하기 위해 공식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는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에 불러 모으고 위협 · 공갈을 일삼으며 “한국의 외교권을 접수하고 한국을 보호한다”는 조약의 체결을 강요했다. 이때 참정대신 한규설 이하 모두 ‘절대 반대’하기로 내약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완용이 불쑥 “오늘의 동아 형세를 살펴볼 때 일본의 제안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지난날의 모든 조약이 일방적인 강요에 못 이겨 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늘 그 조약의 글자수정을 못한 것에 후회하였습니다. 그러하니 이번 새로운 조약은 서로 변동할 수 있도록 하면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 《일당기사》

이 말을 들은 한규설은 펄펄 뛰었으나 이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대신들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이토는 군대를 서울시내와 궁궐 안에 풀어놓고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때 이완용은 또 말했다.

군신 사이에 문답하면서 오직 ‘불가’ 두 자로만 말하니 이를 사체로 따져서는 말할지 모르나 형식상의 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이 미리 강구해둔 바가 있습니다. 이 조약 중에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서 개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조약 3조의 통감 밑엔 ‘외교’ 두 자를 명연하지 않음으로써 이는 뒷날 끝없이 번거로운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또 외교권은 우리나라의 실력이 충실할 때를 기다린 뒤 반환될 것이므로 지금 경솔하게 연한을 정할 수는 없을 것이며 그렇다고 이를 모호하게 보아 넘길 수도 없습니다.
- 《일당기사》

이것을 두고 괴변이라고 하는가? 어쨌든 이 말을 들은 이토는 하세가와를 대동해 궁궐로 들어가 마구잡이로 보호조약을 통과시켰다. 이때에 이완용은 다시 이와 같은 수정을 말하고 또 ‘황실의 안녕’ 조항을 삽입하자는 요구 아닌 요구를 했다.

이때 회의에 참여한 대신 중에 다섯 명은 ‘가’, 세 명은 ‘불가’라고 했는데, 그 ‘가’의 다섯 대신을 5적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런데 5적 중에서도 처음 ‘불가’를 말한 대신도 있었으나 이완용과 이지용만은 처음부터 ‘불가’를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내각총리대신
내각총리대신

이렇게 조약을 맺고 나온 뒤 이지용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날 최명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국가의 일을 우리들이 하지 않으면 할 자가 누구이겠는가?” 조청전쟁(병자호란) 때의 주화파인 최명길을 끌어대어 나랏일을 했다고 떠벌린 것이다. 이완용은 또 “내가 황실을 보호하는 데에 공을 세웠다”고 뽐냈다고 한다. 나라 잃은 황실의 존재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1905년, 양력으로는 11월 17일이요 음력으로는 10월 21일 새벽, 이씨의 조선 왕조는 사실상 무너졌다. 이 나라는 껍데기만 남고 일제의 지배로 들어갔다. 전국 곳곳에서 새로이 의병이 일어났고 5적을 향해서는 암살 · 테러를 가하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때의 정황으로 보면 5적들이 제명에 살 것 같지 않았으나 목숨은 모진 것이라는 말이 진실인 것도 같다.

조약을 반대한 참정대신 한규설이 귀양살이를 떠나고 이토가 통감으로 부임해온 뒤 그는 내각의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러나 보호정치 아래의 총리대신은 일제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토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이토를 ‘영원한 스승’으로 떠받들기 시작했다.

그의 내각에 또 한 사람의 씻을 수 없는 친일파 송병준이 농상공부대신으로 들어왔다. 앞으로 그 둘의 주구경쟁이 볼 만할 것이다.

고종을 퇴위시키다

그가 통감 이토의 위촉을 받아 내각을 조직할 때에 각원(閣員) 중 두 사람을 이토 스스로 추천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통감부의 촉탁인 조중응을 법무대신, 일진회 고문인 송병준을 농상공부대신으로 들여앉혔다. 두 사람의 자격은 따질 것도 없거니와 참으로 의외의 요구였으나 그는 꼭두각시이고 보니 그대로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이토가 두 사람을 이완용의 경쟁자로 내세워 다음의 계책을 추진하려는 음모였다.

50세의 이완용은 참정대신(뒤에 총리대신으로 고침)이 되었는데 이토의 지시를 받는 것 이외에는 걸릴 것이 없었다. 이런 때에 또 하나의 사단이 벌어졌다. 1907년 6월 고종이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자 이준 등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사실이 들통 난 것이다.

이때 이토는 이완용에게 세 가지 일을 지시했다. 첫째, 황제의 상징인 옥새를 빼앗을 것, 둘째, 사람을 뽑아 섭정하게 할 것, 셋째, 고종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천황에게 사죄하게 할 것 따위였다. 이것을 고종이 들어줄 리가 없었다. 이에 이완용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종에게 “태자에게 황제의 위를 넘겨주라”고 요구했으나 고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완용은 칼을 빼들고 소리쳤다.

폐하, 지금이 어느 세상입니까?

고종은 이런 이완용을 흘겨보다가 “그렇다면 태자에게 위를 넘기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리하여 다음 날 태자에게 황제대리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이즈음 이완용, 송병준 등은 늘 칼을 차고 임금 앞에 나타났다. 예전에는 임금의 시종 이외에는 결코 임금 앞에서 무기를 지닐 수가 없었는데, 이들은 이런 왕실의 규정을 아예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태자의 대리는 양위로 바뀌어버렸다. 이완용의 작란으로 일본 천황으로부터 엉뚱하게 “새 황제의 즉위를 축하한다”는 전보가 왔고, 이완용은 그 전보내용대로 고종의 퇴위를 계속 강요하여 성사시켰다. 이어 이완용과 이토는 내정마저 일본통감부에 넘겨주는 이른바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당시 내각의 대신으로 서명했던 일곱 대신은 역사에서 7적(七賊)이 되었고 5적에서 빠졌던 송병준도 당당히 여기에는 끼었다. 전국에서 의병이 다시 벌떼처럼 일어났고 서울의 시민들은 이완용 등 7적의 집에 불을 질렀다. 이때 이완용의 집은 남대문 밖 약고개(지금의 중림동)에 있었는데, 조상인 이만성(李晩成) 등 모든 신주가 불에 타버렸다.(《매천야록》) 손자 잘못 둔 탓에 애꿎은 조상만 욕을 당한 것이다.

이완용의 가족은 몸을 피해 진고개 왜성구락부로 기어들었다. 일본군은 일본인 거주지역인 진고개(지근의 충무로 일대) 주변에 철저한 경계망을 펴고 있었다. 그와 그의 가족은 이곳에서 두 달쯤 머물렀다. 그는 이런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의병과 폭도를 다스리기 위해 일본 군대보다 조선인 헌병보조원이 필요하다고 하여 수많은 헌병보조원 제도를 만들어냈다. 이들 헌병보조원은 뒷날 식민 치하에서 일제 헌병이나 경찰보다 더욱 날뛰었다.

이 무렵 이완용의 주변에 씻을 수 없는 치욕스러운 소문이 떠돌았다. 이완용의 큰아들 이승구가 일본에 수년간 유학 가 있었는데, 이때 이완용이 그의 며느리를 간통했다는 것이다. 이승구가 돌아와 어느 날 안방에 들어 가보니 아버지가 자기 처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명구가 문을 닫고 나와 “집안과 나라가 함께 망했으니 죽지 않고 무엇하리”라고 탄식하고 자살했다 한다. 그 뒤 이완용은 며느리를 독차지해 첩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이 일본 유학 간 것과 돌아온 시기, 그리고 죽은 사실이 모두 부합되니 이 이야기를 얼마만큼 믿어야 할까? 아니면 민중들이 그를 헐뜯으려 만들어낸 이야기일까? 이완용의 평전을 쓴 윤덕한은 이는 허구날조라고 말한다. 아무튼 이완용은 일본 한국통감부가 시키는 대로 잘도 따랐다. 이런 너절한 이야기를 여기에서 다 늘어놓을 수가 없다.

이즈음 그의 심사는 말이 아니었다. 일진회는 송병준과 이용구의 사주로 연일 ‘합방론’을 부르짖으며 성명서를 내기도 하고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더욱이 내부대신으로 있던 송병준은 일본으로 건너가 ‘합방선언서’를 일본 정부에 제출하고 있었다.

이완용으로서는 이를 덮어둘 일이 아니라고 여겼던지 이해 12월 4일 그의 충실한 비서인 이인직(李人稙)과 민씨의 잔당 민영규(閔泳奎)를 시켜 국민대연설회를 개최하게 했다. 원각사에서 열린 연설회에는 시민 4천여 명이 모여들었고 연사로 나선 민영규, 이인직 등은 합방을 주장하는 이용구, 송병준을 규탄하면서 일진회와는 결단코 같은 국민이 될 수 없다고 떠벌렸다.

여기에 참석한 민중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이완용은 이런 일을 벌이며 한편으로는 일진회의 합방안 따위를 아직 시기가 이르다고 퇴짜를 놓고 있었다.(황현 《매천야록》, 조동걸 《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이렇게 몇 자락을 깔며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있을 적에 그가 칼을 맞았으니 여간 통분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그가 이때 죽었더라면 오명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는 일진회로부터 국정을 농단했다는 공격을 연달아 받았다. 이토와 긴밀히 상의한 끝에 그 배후 조종자인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을 수석 대신인 내무대신으로 기용했다. 이로 해서 일진회는 이완용에 대한 공격을 한동안 멈추었다.

1909년 1월 이완용은 순종과 이토와 함께 기차를 타고 북도 순행 길에 나섰다. 기차가 중화역에 이르렀을 때 한 노인이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서 있었는데 손에는 일장기를 들고 있었다. 분노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토에게 이완용이 영어로 말을 건넸다.

이완용 : 통감 저기를 보십시오. 저 노인이 들고 있는 국기가 어느 나라 국기입니까?
이토 : 일본 국기지.
이완용 : 그러면 저 노인은 어느 나라 백성입니까?
이토 : 조선인이오.
이완용 : 조선인이 일본 국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아도 조선인들은 아직까지 국기에 대한 관념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세계적 대정치가인 통감각하께서 이 정도의 사소한 일을 가지고 격노하십니까?
- 윤덕한 《매국과 애국의 두 얼굴 이완용 평전》 〈이토 암살의 넋을 잃고〉

이 대화는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 아직 완전히 일본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1909년 12월 그는 명동성당에서 있은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여했다. 그가 막 성당 문을 나와 인력거를 타고 출발하려 할 때에 한 청년이 뛰어나와 인력거꾼을 먼저 찌르고 이어 이완용의 어깨부터 심장 부위를 찔렀다. 이완용은 대한의원에서 53일 동안 치료를 받고 용케도 살았으나 칼끝이 왼쪽 폐를 찔러 결국 후유증으로 뒷날 죽게 되었다.

1909년 10월 이토는 조선에 이어 다음 차례로 만주를 침략하려는 공작을 꾸미기 위해 하얼빈역에 내렸다가 안중근에게 저격당해 그야말로 웅지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완용은 실성한 사람처럼 얼이 빠져 있었다 한다. 서울에는 사흘간 이토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가무음주를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또 정부대표의 조문사로 한성부민 대표인 유길준과 함께 다롄에 갔고, 이어 이토의 국장을 도쿄에서 거행할 때에는 서울 장충단에서 추도제를 주도해 거행했다.

그가 쓴 제문에 “아아 애통하도다. 동쪽 바다의 원기와 후지산의 정기가 한 위인을 내서 영웅으로 우뚝 살았도다. 정치의 경략으로 개명(開明)을 먼저 만들어내고 아시아 모든 지역에 평화를 유지하게 하니······”(《일당기사》) 따위의 말을 늘어놓았다.

1910년 5월에 들어 일본은 합방을 실현하기 위해 육군대신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를 새 통감으로 삼아 내보냈다. 이완용은 온양에서 요양하다가 데라우치의 부임소식을 듣고 상처가 채 낫기도 전에 뛰어올라왔다.

한일병합에 앞장서다

데라우치는 그에게 한일병합안을 제시했다. 그는 이론의 여지가 없음을 말하고 다만 “농사짓는 자는 농사짓고 장사하는 자는 장사하고 공업하는 자는 공업에 종사하면 예전처럼 살 수 있으나 양반들은 선악을 따질 것 없이 국가의 존망과 같이 하므로 이들을 돌보지 않으면 인도천리로 보아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조선귀족령이 생겼다.

어쨌든 병합조약(정식으로 따지면 ‘합방’이 아님)은 을사조약 때에 비해 식은 죽 먹기였다. 그의 하수인이요 시종원의 책임자인 윤덕영은 순종이 통곡하다가 잠들자 조약 내용을 적은 종이딱지에 스스로 옥새를 찍어 이완용에게 건네주었다. 1910년 8월 22일 오후 5시. 이제 조선 왕국, 아니 우리 겨레가 이 땅에 터전을 잡고 산 지 5천 년 만에 처음으로 껍데기 왕조마저 날려 보내고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나라가 완전히 넘어간 뒤 그 이름도 그럴듯한 조선의 귀족 65명은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이완용은 일본 귀족으로 따져 넷째 자리인 백작에 은사금 1천 5백여 원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조선총독부정무총감이 의장인 중추원의 부의장(처음에는 고문)이 되었다. 그는 일본과 조선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일본과 조선 사람의 혼혈을 주장하면서 친일행각을 벌였다. 그리하여 조선의 관료 출신으로는 민영휘와 함께 가장 많은 재산을 모은 자산가로 꼽혔다.

이완용
이완용

이렇게 호의호식하며 나날을 지낼 적에 또 한 번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곧 3·1운동이었다. 그가 왕세자 이은과 일본의 황족녀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도쿄에 막 도착했을 때 “고종이 승하했다”는 전보를 받았다. 더욱이 이 결혼을 그가 중매쟁이가 되어 추진시켰다. 그는 급거 귀국하여 서울에서 장례절차에 간여하기도 하고 고종의 덕행을 적은 시책문을 쓰기도 했다. 정말로 아이러니였다.

이때 손병희가 그를 찾아가 민족대표와 독립선언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했다는데 이를 고자질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는 3·1운동이 진행되는 시기인 4월 5일 경고문을 〈매일신보〉에 내고 이어 두 차례에 걸쳐 포고문을 냈다. 청년 · 학생들이 학업에 열중하지 않고 가산을 탕진하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조선독립은 실력양성이 있은 뒤에 이루어진다고 떠벌렸다. 이른바 민족개량주의자들이 ‘실력양성론’을 들고 나오기 전에 그가 먼저 조선총독부의 눈치를 살펴 이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이것이 그의 천재적 변신술이요 출세수단이었다. 이런 공로 탓인지, 이듬해 그는 백작에서 후작으로 뛰어올랐다.

3·1운동 뒤 일제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새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사이토 마코토를 맞이하러 부산까지 내려갔다. 그들 일행이 서울에 내리자 강우규 의사가 던진 폭탄이 사이토 마코토가 탈 마차에 터졌다. 두 사람 모두 이때도 화를 면했다. 질긴 운명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1920년 3·1운동에 따른 공로로 그에게 후작이 주어졌다. 1924년에는 아들 이항구도 남작을 받았다.

철저한 친일부역배로 생을 마감하다

1926년 양력 2월 11일, 여염에서는 한창 음력설 준비를 서두를 때 그는 서울 옥인동 자기 집에서 죽었다. 그는 겨울철만 되면 해수병이 도졌는데, 이때에도 천식으로 자리에 누웠다. 이재명의 칼에 폐를 다친 후유증이었다.

그의 명정에는 ‘조선총독부중추원부의장정이품대훈위후작이공지구(朝鮮總督府中樞院副議長正二品大勳位侯爵李公之柩)’라 썼다. 도대체 학부대신이나 내각총리대신 같은 높은 벼슬을 쓰지 않고 겨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아래에 두었던 중추원부의장의 직함만 썼으니 죽어서까지 철저한 친일부역배가 된 것이다. 그의 영결식이 용산에서 있었는데 기마대들이 호위를 맡아 돌고 무수한 조화와 만시를 쓴 깃발이 펄럭였으며 자동차와 인력거가 뒤를 따랐다. 천여 명의 조문객과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10여 리에 뻗혔다.

그의 시체는 특급열차에 실려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 선인봉 아래 명당 터에 묻혔다. 이 명당은 그가 전라북도관찰사로 있을 당시 유명한 풍수쟁이를 시켜 잡은 것이다.

그러나 명당이 무슨 소용인가? 8·15광복 후 넓은 그의 묘지가 곧잘 국민학생들의 소풍장소가 되었다. 아이들이 묫등에 올라 “요놈 매국노 뒈져라”라고 떠들어대는 바람에 미국에 숨어 있던 손자들이 무덤을 파서 시체를 화장하고 무덤을 없애버렸다 한다. 그리고 그의 손자와 증손자들은 지금도 미국과 서울에서 출신을 숨기며 살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수구파, 다음에는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로 변신하여 시세를 잘도 타서 얻은 그 많은 권세와 재산과 명당이 이렇게 끝나버렸으니 천도와 인사가 무심하지 않은 것인가?

곧잘 시대가 영웅을 만들기도 하나 때로는 시대가 한 인물을 삼키기도 한다. 그는 분명히 글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쓰고 예술도 이해하고 머리도 좋아서 훌륭한 교양인으로 남을 수도 있었으나 마음 하나 잘못 먹은 탓으로 영원한 매국노가 된 것이다. 그를 객관적으로 다루려는 의도에서 평전을 쓴 윤덕한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탐욕스럽고 패륜적이며 배은망덕한 인간 말종이라는 ‘그럴듯한 매국노 이완용 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삿대질을 하면서 망국과 매국의 모든 책임을 그에게 떠넘겨왔다. 이것은 우리에게 망국의 치욕감을 어느 정도 덜어주는 위안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진실은 아니다. 진실이 아닌 것에서 역사의 교훈을 얻을 수는 없다. 이제 문제는 ‘엉뚱한 이완용 상’에 욕설을 퍼붓는 것이 아니라 한때 대단히 애국적이었던 인물이 어떻게 해서 만고의 매국노로 전락하게 되었는가 하는 그 비극적 과정과 변신의 논리를 밝히는 데 있다.
- 《매국과 애국의 두 얼굴, 이완용 평전》

과연 이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 분명히 그의 전반기의 모습은 한 가닥 인정해줄 요소가 있을 것이다. 그는 영어는 할 줄 알아도 일본어로는 거의 의사소통을 하지 못했다고 하고, 평소에 양복과 조선옷을 입었으나 일본옷은 입지 않았다고 하며, 기독교나 일본 신도를 믿지 않고 불교를 받들었다 한다. 이런 일상생활의 모습은 또 무엇을 시사할까? 이제까지 장황하고 지루한 이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할지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