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

고구려 제19대 왕, 廣開土大王

위대한 정복자, 중흥의 제왕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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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채호, 광개토대왕비문의 가치를 알아보다
  2. 10대 시절부터 전쟁을 지휘하다
  3. 요하를 건너 중원 땅 정벌을 꿈꾸다
  4. 장수왕, 아버지의 뜻을 잇다

신채호, 광개토대왕비문의 가치를 알아보다

백두산에서 시작해 황해로 흘러 들어가는 압록강의 물줄기가 백두산과 황해 중간쯤 이르는 곳에 험준한 산악지대를 등지고 국내성이 자리 잡고 있다. 국내성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로, 지금 중국의 만주 땅 지안시이다. 이곳에 지금도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각주1) 의 사적을 적은 거대한 돌비가 여기저기 상처난 모습으로 비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한동안 사람들은 이 돌비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그저 글씨체가 멋지다며 함부로 먹칠을 해서 탁본을 떴고, 그곳 주민들은 이 탁본을 글씨 쓰는 사람들에게 팔아먹었다. 만주 침략을 위해 파견된 일본인 장교가 비문의 내용이 일본의 고대역사에 불리하다고 생각해 돌로 쪼아 글씨를 바꾸어 버리는 사건도 있었다. 그 장교는 이 변조한 탁본을 일본 학계에 돌렸다고 한다. 그 때문에 오늘날에도 그 내용의 변조문제가 많은 시빗거리를 낳고 있다.

나라를 잃고 망명해 떠돌던 역사학자 신채호는 어렵게 찾은 이 비석 앞에 서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비석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았고, 그 내용을 옮겨 적어서 위대한 고구려 역사를 쓰는 자료로 삼았다.

1990년대 들어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교류를 트면서 학자와 문인을 비롯해 일반 사람들까지 이 돌비를 찾았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중국인들도 덩달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0대 시절부터 전쟁을 지휘하다

이 비석의 주인공인 광개토대왕은 누구일까? 고구려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제왕으로 존경을 받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어느 정도였을까?

고구려는 나라를 세운 뒤 환도성에 근거지를 두고 차츰 영역을 넓혀 갔다. 어느 정도 국력이 강해지자 압록강 지대로 진출했으며, 서기 3년 압록강 언저리인 국내성을 수도로 삼았다. 국내성은 육지로는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고 물길로는 황해로 나갈 수 있어서 지리적 조건이 좋은 곳이었다.

초기 단계의 고구려의 국경은 위로는 거란족 등 북방민족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 옆으로는 요동을 중심으로 중국과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백제와 신라가 다리처럼 가로놓여 있었다.

11대 임금인 동천왕 재위시 중국의 위나라는 군사를 이끌고 와서 환도성을 공격해 주민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는데, 이때 동천왕은 위험을 피해 도망을 갔다. 고구려가 최초로 외부 침략자에게 받은 치욕이자 시련이었다.

371년에는 백제군이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이때 몸소 전쟁에 나선 고국원왕이 전쟁터에서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임금이 전쟁터에서 죽었으니 나라의 커다란 비극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온 나라가 복수심에 불타 그 뒤 더욱 힘을 길러 영역을 넓혀 갔다.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연대는 427년이므로, 고국원왕이 죽고 난 56년 뒤에 수도를 옮긴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중기에 해당하는 375년 고국양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담덕(談德)이라 지어졌다. 큰아버지 소수림왕과 아버지 고국양왕이 나라의 기초를 닦아 놓은 시기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스러웠으며 자라면서는 큰 뜻을 품었다.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

385년(고국양왕 2) 고구려의 4만 병력이 요동을 공격해 후연 땅인 요동성과 현도성을 함락시키고 1만 명을 포로로 잡아 왔다. 큰 승리를 기록했으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인 5개월 뒤에 후연의 모용농이 고구려 군사를 몰아내고 두 군을 회복했다. 고구려는 다시 요동지방을 빼앗긴 것이다.

고국양왕은 임금 노릇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아들이 태어나자 큰 기대를 걸었다. 담덕은 386년 태자로 책봉되어 5년 동안 정치수업을 받았으며, 10대 중반부터 전쟁터에 나가 군사를 지휘했다. 전쟁을 익히는 하나의 수련과정이었다.

391년 5월, 만 17세의 나이로 담덕은 고구려의 19대 임금 자리에 올랐다. 그는 임금이 되자 처음으로 고구려 연호를 영락(永樂)이라고 정했다. 영락은 ‘길이 안락을 누린다’는 뜻인데, 자주적인 나라를 새로 열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물론 어린 임금 혼자만의 의지라기보다는 당시 고구려 지도자들이 이런 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그는 413년 죽을 때까지 22년 동안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 눈부신 정복 활동을 벌였다. 그의 정복 활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무엇보다 외교를 통해 동조하는 세력을 만들어 놓았다. 처음에는 강력한 힘을 가진 중국의 나라들과 우호를 맺고 나서 신라를 위협 · 회유하는 방법으로 동맹을 맺거나 복속시켰다. 그런 뒤에 정복하고 싶은 나라들을 골라서 공격했다. 등뒤의 걱정거리를 없애고 지원세력을 만들어 도움을 받은 것이다.

둘째, 남쪽으로 진출하면서 수군과 군함을 이용했다. 그 전에는 기병과 보병을 중심으로 육지를 휩쓸었는데, 새로 수군부대를 창설하고 군함을 만들어 바닷길을 이용한 것이다. 압록강 하류와 그 입구의 황해는 백두산과 압록강 중류의 풍부한 목재를 뗏목으로 실어 와 조선소를 만들 수 있는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바다와 강을 군사 진출로로 개척한 것이다.

셋째, 전쟁을 벌이면서 뛰어난 전략과 전술을 펼쳤다.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전쟁을 벌이면서 그 시기를 잘 잡았다.

한편으로는 고구려가 중기로 접어들면서 불교와 유교를 받아들이고 여러 제도를 새로 만들어 내부를 정비한 점도 통치에 힘을 실어 주었다. 정치와 사상을 통합한 통치의 힘으로 나라가 힘차게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요하를 건너 중원 땅 정벌을 꿈꾸다

비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광개토대왕의 중요한 정복 활동을 살펴보면 이렇다.

대왕은 임금 자리에 오른 지 두 달 뒤인 391년 7월에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한강 이북의 백제 땅을 휩쓸었다.10월에 들어서는 고구려 군사들이 백제의 관미성을 점령했고, 고구려 수군은 일곱 길로 나누어 공격을 퍼부은 끝에 20일 만에 성을 함락시켰다.

이 관미성 전투를 두고 후세에 여러 논란이 있었는데, 조선 초기의 유학자인 권근은 이런 비평을 했다.

부왕이 죽은 지 석 달도 못 되어 친히 백제를 친 것은 아버지 죽음의 애통함을 잊고 거리낌없이 행동한 것이다. 백제에서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군사를 동원한 것은 옳지 않다.
- 《동국사략》

권근은 유학자답게 아버지의 상중에는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고 나무란 것이다. 그런데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이때 직접 정벌에 나서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안정복의 의견은 다르다.

적이 침공해 와서 임금과 어버이를 살해하면 신하와 아들된 자로서는 창을 베고 아침을 기다렸다가 피를 뿌리며 싸움에 나가서 오직 원수 갚을 것을 마음 먹어야 한다. 비록 자신이 못하면 아비는 이런 마음을 아들에게 전하고 아들은 이런 마음을 손자에게 전해서 백대까지 가더라도 원수를 갚아야지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
- 《동사강목》

안정복은 대왕의 행동을 정당하게 본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학자들도 대왕의 업적과 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오늘날 관미성의 위치가 강화도 북쪽이나 파주 오두산성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사면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되어 있고 성 둘레를 바다가 둘러싸서 천연의 요새였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고 했으니, 지금의 오두성과는 지형 설명이 조금 다르다. 오두성은 임진강 입구에 있어서 바다에 닿지 않았고 섬도 아니다. 그래서 강화도 옆에 붙어 있는 교동도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대왕은 392년 북쪽에 있는 거란이 명령을 잘 따르지 않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갔다. 그는 이르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축을 전리품으로 얻었다. 그는 동쪽으로 내려오면서 자신의 영역을 돌아보며 느긋하게 사냥을 즐겼다.

절치부심(切齒腐心, 몹시 분하여 이를 갈며 속을 썩이는 것)하던 백제의 아신왕은 다시 힘을 모아 393년 장수 진무(眞武)를 시켜 고구려 공격을 지시했다.

관미성은 우리가 북쪽 변방을 대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충지이다. 지금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어서 과인이 통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경이 마땅히 마음을 굳게 가지고 치욕을 씻어 주기 바란다.
- 《삼국사기》

아신왕의 말대로 관미성은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교두보였다. 진무는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관미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395년 백제는 다시 고구려 공격에 나서 패수(대동강)를 사이에 두고 한바탕 전투를 치렀다. 백제군은 8000여 명의 포로를 빼앗기고 8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 연달아 보낸 백제 군사들이 개성 송악산에서 큰 눈을 만나 많이 얼어 죽고 말았다.

이번에는 대왕이 남쪽 정벌을 개시했다. 백제와 신라는 그동안 고구려의 힘에 눌려 복종하는 체해 왔지만, 대왕이 즉위하던 해부터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건드렸다. 게다가 백제는 신라와 달리 틈만 보이면 언제든지 도전해 왔다.

대왕은 396년 직접 수군을 이끌고 황해의 해안을 따라 내려왔다. 대왕이 거느린 수군은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휩쓸고 내려와 관미성을 거쳐 한강에 이르렀다. 고구려 수군은 물길을 타고 쉽게 전진하여 한강 중류 북쪽에 있는 아차성(阿且城, 또는 蛾嵯城이라고도 함)을 점령했다.

고구려군은 아리수(阿利水)각주2) 를 건너 그 남쪽의 위례성에 있는 백제의 아신왕을 굴복시켰다. 고구려 군사들은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때 고구려 군사들은 백제 영역의 58개 성과 700개의 촌락을 얻었다. 점령지역이 오늘날로 치면 황해도와 경기도와 충청도 황해 해안지역에 해당한다. 아신왕이 복종한다는 의미로 남녀 1000명과 가는 베 1000필을 바치자, 대왕은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아 돌아왔다. 이때 아신왕은 “이제부터 영원한 종이 되겠나이다”라고 맹세했다. 고구려의 완전한 승리였다. 하지만 백제와 왜는 은밀히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아신왕은 이듬해 왕자 전지를 백제의 속국인 일본 북쪽 규슈에 있는 왜국에 파견해 복수전을 계획했다.

대왕은 남쪽 진출의 기지인 평양 등지를 돌아보면서 앞날을 대비했고, 군사를 경상도 상주 등지로 보내 조공을 바치게 했다. 또한 군사를 보내 동쪽 숙신의 땅을 정벌하여(398) 300명의 포로를 잡아 오고 속국으로 만들었다.

마침내 399년 백제가 맹세를 깨고 다시 조공을 거부하며 맞서 왔다. 백제는 왜와 손을 잡고 군사력을 강화한 뒤 다시 맞서 볼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이때 신하 노릇을 충실히 하던 신라에서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다.

“왜인들이 가득히 몰려와 파괴와 약탈을 일삼고 있으니 이를 몰아내 주십시오.”

다음 해인 400년, 대왕은 신라에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냈다. 이번에는 직접 군사를 이끌지는 않았다. 고구려 군사들은 동쪽 길을 따라 경주로 진군해 왜군을 쫓아내고 곧이어 오늘날 고령 지역에 있는 임라가라를 정벌했다. 그리고 낙동강 입구의 임나(任那)각주3) 도 손에 넣었다.

404년, 왜가 이번에는 황해로 들어와 황해도 일대의 옛 대방 땅으로 올라오자, 대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모조리 무찔렀다. 이때 전리품으로 갑옷과 투구 1만 벌을 거둬들였다.

대왕은 남쪽을 평정한 뒤 발길을 다시 북서쪽으로 돌렸다. 407년에 요동 땅에 있는 후연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고 무수한 물자를 빼앗았으며 성의 방비를 굳건히 했다. 410년에는 동해 주변에 있는 동부여가 예전과 달리 조공을 피하며 배반하자, 대왕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정벌했다.

대왕의 활동은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그는 요하와 황하를 넘어 중원 땅 정벌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사망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그는 중원 정벌의 원대한 꿈을 아들 장수왕에게 넘겨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장수왕, 아버지의 뜻을 잇다

대왕이 다스리던 시기에 고구려가 주변 나라를 공격한 횟수는 12차례였고,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간 경우도 7차례였다. 그가 직접 정벌에 나설 때에는 군사들의 사기가 더욱 높아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군사들은 그의 전략전술을 믿고 따르며 가는 곳마다 용맹을 떨쳤다. 그 결과 64성과 1400촌을 빼앗아 조공을 받거나 굴복을 시켜 고구려의 신하로 만들었다. 전쟁을 통해 거둬들인 물자는 그 양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비문에 그의 업적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은혜와 덕택이 하늘에 미쳤고 위엄과 무력(무로 닦인 힘)이 사해(四海, 온 천하)를 덮었다. 못된 무리를 쓸어내고 왕업을 편안케 했다. 나라는 풍부했고 백성은 풍요로웠으며 오곡이 풍성했다.

또 비문에는 “문의 정치로 다스리고 무로 공업을 이룩했으며, 동쪽을 정벌하고 서쪽을 토벌하였다”고 찬양했다. 정벌만 일삼은 것이 아니라 나라 안으로는 제도를 정비하고 문화의 기틀을 세웠다는 뜻이다. 그의 업적을 잘 요약한 구절이다.

광개토대왕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장수왕은 산릉조성 작업에 착수했다. 414년, 드디어 그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 완성되었다. 화강암으로 된 비의 높이는 6.39미터, 밑면 넓이는 1.43미터이고, 각 면의 넓이는 약간 들쭉날쭉 차이가 났다. 비에 새겨진 문자의 행수는 44행이며 모두 1775자가 새겨져 있다.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비

그 전에는 고구려에서 왕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않았는데, 이 비석을 시작으로 뒤의 왕들도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따라서 이 비석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꼽히지만 오랜 기간을 지내는 동안 비바람에 씻긴데다가 관리가 잘되지 않아, 글자가 떨어져 나가서 보이지 않는 글자도 많다.

장수왕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땅을 더욱 넓혀 나갔다. 먼저 남쪽 방면을 보면 동쪽으로는 죽령과 조령, 서쪽으로는 황해의 남양만을 경계로 삼았고 나아가 정남쪽으로는 충주 금강 일대까지 진출했다각주4) .

북쪽으로는 부채살 모양으로 뻗어 나갔다. 북쪽 방면은 서쪽으로는 요동반도를 포함한 요하의 동쪽, 서북쪽으로는 선양을 넘어 시라무렌 강에서 몽골 땅을 바라보았고, 정면의 북쪽으로는 쑹화강 평야를 중심으로 하르빈 지역과 얼굴을 맞대고, 동북쪽으로는 두만강 입구와 블라디보스토크의 언저리와 그 아래 지역을 차지했다. 북경 언저리에 있는 유주까지 진출했다는 설도 있다.

이 시기 고구려의 영토를 두고 남한 학계에서는 40~56만 제곱킬로미터, 북한 학계에서는 56만 제곱킬로미터 정도였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한국의 영토인 한반도의 넓이는 22만 제곱킬로미터쯤 된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이런 고구려의 역사를 자기네 지방으로 만드는 작업을 벌이면서 역사 왜곡을 일삼고 있다.

광개토대왕은 우리 민족이 낳은 영웅이며, 광개토대왕비는 여러모로 소중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고대사에서는 정복자를 영웅으로 받들고 있다. 정복은 개척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과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위대한 정복군주요, 개척자였다.

올바른 민족사 인식이 더욱 필요한 시대인 만큼 대왕의 업적과 그것이 갖는 의의에 대해 깊이 새겨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