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디

디자인과 기술을 통한 진보

아우디

AU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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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유럽>독일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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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급 자동차의 대명사
  2. 네 개의 링, 그 의미의 전환
  3. 디자인이라는 승부수
  4. 진보와 혁신의 상징
아우디 엠블럼
아우디 엠블럼

고급 자동차의 대명사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프리미엄 자동차’(우리말로 ‘고급차’가 가장 적당할 듯) 브랜드를 물으면 열 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벤츠, BMW, 아우디를 꼽는다. 과거의 영광까지 감안해 조금 더 인심을 쓴다면 재규어와 캐딜락이 포함될 것이다. 진짜 후한 사람은 렉서스와 볼보까지 추가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고급차라고 주장하는 폭스바겐의 대형 세단각주1) 페이톤은 어떨까? 가격만 놓고 보면 1억 원이 넘고, 고급차에 들어가는 첨단장치 상당 부분을 달고 있다. 비싸고 고급스럽지만 브랜드는 2,000만 원대 차에도 똑같이 달려 있는 대중차다. 때문에 페이톤은 고급 옵션이 많이 달린 고가(高價)차로 보는 게 적당하다.

그렇다면 현대 에쿠스나 기아 K9은 어디에 들어갈까? 페이톤과 마찬가지다. 고급차 디자인과 어딘가 비슷하고 이미 고급차에 달린 비싼 옵션을 잔뜩 단 고가차라고 볼 수 있다.

나는 고급차의 기준으로 세 가지를 따진다. 큰 범주에서 다른 전문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선 브랜드를 설명할 전통과 유산이 있어야 한다. 벤츠는 ‘안전의 대명사’, BMW에게는 ‘드라이빙 머신’으로 연결되는 확실한 이미지가 있다. 둘째는 누군가 먼저 개발한 것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업계를 리드하는 기술과 혁신성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디자인이다. 멀리서 봐도 ‘아 저 차는 아우디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자신만의 디자인이 있다. 이런 점에서 고가차의 특징은 디자인을 부분적으로 베끼거나(통상 벤치마킹이라 한다) 남들이 먼저 개발한 신기술을 뒤늦게 장착해 비싼 가격을 받는 차라고 할 수 있다. K9이 한국시장에서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고가차이기 때문이다. 고급차만이 주는 차별화된 요소 없이 비싼 기능만 잔뜩 추가해서 가격만 올려놓아 판매가 신통치 않은 것이다.

그럼 포드의 고급 브랜드 링컨, 닛산의 인피니티, 혼다 어큐라는 왜 빠졌느냐고 묻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들 역시 한때는 고급차 기준에 근접했지만 2퍼센트 부족해 역시 고가차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경우다. 고급 소재를 사용하고 첨단기능을 달았다고 해서 단숨에 프리미엄이 되는 것은 아니다.

통상 고급차는 비슷한 크기와 성능의 대중차에 비해 30~50퍼센트 비싸다. 그런데도 부자들은 쉽사리 고급차에 지갑을 연다. 부자라서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엔진 출력이나 크기 같은 수치 이외에 프리미엄 브랜드라는 숨어 있는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고급차 시장 경쟁은 대중차보다 치열하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고객들은 웬만해서 선호 차량을 바꾸지 않는다. 프리미엄급 시장에서 통상 전년 대비 1퍼센트 판매 신장률을 올리려면 최소 마케팅 비용이 1,000억~2,000억 원 정도 들어간다는 게 업계의 정설이다.

고급차들의 전통은 저마다 확연히 다르다. 벤츠는 최초의 내연기관 자동차 개발부터 시작해 걸어온 길 그 자체가 고급차의 역사였다. BMW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적인 노력으로 고급차 반열에 올랐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아우디는 가장 늦은 후발주자다.

아우디는 1970년대만 해도 유럽의 대중차였으나 1980년대부터는 세계 첫 사륜구동각주2) (콰트로) 승용차를 내놓으면서 본격적으로 고급차 시장에 도전한다. 전륜구동각주3) 인 아우디가 후륜구동각주4) 의 절대 강자인 벤츠. BMW의 벽을 넘기 위해서는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콰트로다. 이후 끊임없는 신기술 개발과 실용화를 통해 2000년 이후 벤츠, BMW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프리미엄 브랜드로 성장했다. 하지만 100년이 넘는 아우디 역사는 여러 번의 합병과 좌절을 맞본 시련의 연속이었다.

네 개의 링, 그 의미의 전환

1969년에 출시된 아우디 100
1969년에 출시된 아우디 100

아우디의 역사는 1909년에 시작됐다. 1899년 호르히 자동차를 설립했던 아우구스트 호르히(August Horch) 박사가 1909년 자신의 성을 라틴어로 번역해 새 자동차 회사의 이름을 만들었다. 아우디는 라틴어로 ‘듣다(Listen)’라는 말이다.

아우디 창업의 기틀을 다진 아우구스트 호르히 박사
아우디 창업의 기틀을 다진 아우구스트 호르히 박사

군소 자동차 업체였던 아우디는 네 개의 링 역사를 만나면서 도약한다. 1932년 독일 삭소니 지방의 자동차 회사였던 아우디(Audi), 반더러(Wanderer), 호르히(Horch), 데카베(DKW)가 모여 ‘서로의 장점을 살리자’며 합병을 했다. 사명은 아우토 유니언으로 정했다. 현재 아우디의 초석을 놓는 대합병이었다. 그리고 고리처럼 연결된 네 개의 링을 엠블럼으로 정했다. ‘서로 싸우지 않는다’는 상징이었다. 기술력에서 대동소이했던 네 개의 회사는 협력이 가장 큰 과제였다. 화합을 의미한 네 개의 링은 요즘 들어서 부(富)의 상징으로도 비유된다. 링 하나를 결혼반지로 보면 아우디는 네 번 결혼할 만한 부자나 탈 수 있는 차라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아우디 회장을 역임한 페르디난트 피에히 현 폭스바겐-아우디 그룹 이사회 의장은 네 번 결혼했다.

네 개 링의 결합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신차 개발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고 내분이 이어졌으며, 여기에 판매 부진까지 겹치면서 1958년 다임러-벤츠에 인수되고 말았다. 고급차 위치를 확고하게 굳히고 있던 벤츠에서 아우디는 뚜렷한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1964년 폭스바겐 그룹에 다시 인수됐다. 인수 당시 아우디는 폭스바겐 브랜드와 엇비슷한 대중차로 출발했다. 폭스바겐과 마찬가지로 전륜구동차만 생산했던 것이다. 당시 고급차는 대부분 후륜구동이었다. 벤츠와 BMW가 후륜구동으로 고급차를 대표했고 미국 캐딜락, 영국 재규어도 후륜구동이었다. 뒷바퀴로 구동을 전달하는 후륜구동은 앞뒤 무게 배분을 50:50에 맞추면서 안정된 코너링과 승차감을 자랑했다.

1980년 아우디는 제네바모터쇼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사륜구동 콰트로를 내놓았다. 전륜구동뿐이었던 아우디는 전륜구동은 그대로 이용하고 차대를 가로지르는 축(프로펠러 샤프트각주5) )을 통해 뒷바퀴에도 동력을 전달했다. 사륜구동으로 전륜구동이 지닌 핸들링과 승차감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고급차 시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콰트로는 이후 WRC 등 모터스포츠 대회에서 잇따라 우승하면서 탁월한 주행성능을 뽐냈다.

1980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선보인 아우디 콰트로
1980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선보인 아우디 콰트로

디자인이라는 승부수

2000년 이후 자동차 전문가들이 꼽는 아우디의 가장 큰 경쟁력은 다이내믹한 디자인과 다양한 신차 투입이다. 이런 전략에는 폭스바겐 그룹 산하라는 배경이 있다. 개발비를 줄이면서 다양한 차종을 단시간에 내놓을 수 있는 폭스바겐-아우디의 차체(플랫폼각주6) ) 공유 전략 덕을 톡톡히 보는 것이다. 폭스바겐 골프 차체를 이용해 아우디 소형 세단 A4, SUV Q5, 쿠페 A5를 만드는 식이다.

아우디는 일반도로 시속 400킬로미터 돌파(1937년), 사륜구동 승용차 콰트로 개발(1980년), 알루미늄 차체 개발(1993년) 등 세계 최초의 신기술에서 경쟁사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리고 고급차 브랜드의 성능과 기술이 비슷해진 2000년대에는 차별화된 경쟁 요소로 디자인에 승부를 걸었다. 기술만으로는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디자인에 있어 가장 큰 도전은 커다란 라디에이터 그릴인 ‘싱글프레임’이다. 2004년 A6로 처음 선보인 싱글프레임은 이후 모든 차량에 사용되면서 패밀리룩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발터 드 실바 디자인 총괄 사장(현 폭스바겐 총괄)은 “싱글프레임은 다이내믹하면서도 기품이 흐르는 아우디 내면의 힘을 표현한 것”이라며 “정체되지 않고 진보하는 역동적인 디자인 철학을 그대로 반영했다”라고 설명했다. 이후 아우디의 디자인은 현대기아차 등 세계 자동차 업체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

싱글프레임이 적용된 A8, A6, A4 등의 모델은 세계적 권위인 아우토니스 디자인 어워드(2005년)를 받는 등 디자인 분야의 상들을 휩쓸었다. 2세대 아우디 TT는 ‘2006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동차’, ‘2007 최고의 자동차 디자인’에 잇따라 선정됐다. 아우디는 외관 디자인뿐 아니라 별도의 촉각, 후각, 청각 팀을 운영하면서 고객의 오감(五感)을 만족시키는 감성품질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아우디는 1970년대 미국에서 뼈아픈 실패를 맞봐야만 했다. 한 방송사에서 “아우디는 급발진 위험이 있다”는 검증 안 된 보도를 내보냈던 것이다. 2009년 미국판 토요타 리콜과 비슷한 경우다. 판매는 급감했고 결국 미국시장 철수로 이어졌다. 아우디는 1980년대 중반에 다시 미국에 진출했지만 한 번 꺾인 신뢰를 회복하기가 쉽지 않았던 탓에 미국시장에서는 고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는 전화위복이 됐다. 어떤 고급차보다도 먼저 중국에 입성했던 것이다(1989년). 벤츠와 BMW, 렉서스가 미국에 집중하는 동안 아우디는 1990년대 이후 중국에서 고급차 1위를 질주했다.

2008년에 예상 못한 금융위기가 닥치자 판세가 요동쳤다. 미국 의존도가 큰 벤츠와 BMW는 다음 해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적자를 냈다. 상대적으로 미국 판매가 적은 아우디는 2009년에 처음으로 연간 100만 대 판매(100만 3,400대)를 넘어서면서 중국 호조를 바탕으로 흑자를 이어갔다. BMW와 벤츠의 북미시장 의존도는 25~30퍼센트에 달하는 반면 아우디는 10퍼센트 이하였다.

1998년에 등장한 아우디 TT
1998년에 등장한 아우디 TT

진보와 혁신의 상징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아우디의 성공 키워드는 ‘진보와 혁신’이다. 시장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조직을 갖춘 것이다. 아우디는 준중형 차체(C세그먼트각주7) ) 하나로 세단부터 해치백각주8) , 쿠페각주9) , 컨버터블각주10) 뿐 아니라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까지 개발했다. A4와 A4아반트(왜건), A4컨버터블, A3해치백, A5쿠페, SUV인 Q5는 모두 A4와 같은 차체와 엔진을 쓴다.

다양한 차종에 같은 차체와 엔진을 사용하면서 생산단가를 낮추는 규모의 경제 효과를 톡톡히 봤다. 개발비는 줄이면서도 다양한 신차를 만들어 고객의 요구에 대응한 것이다. 물론 이런 신차 경쟁력에는 차종마다 확실하게 차별화에 성공한 디자인 능력이 뒷받침되었다. 최근에는 매년 경쟁사보다 많은 새로운 모델(마이너체인지 포함)도 내놓고 있다.

다양한 차종을 하나의 조립라인에서 생산하는 것도 생산성을 높인 경쟁 요소다. 잉골슈타트 본사 공장에서는 A3해치백부터 A4세단과 왜건, A5쿠페, 스포츠카인 TT, Q5가 함께 생산된다. 마티아스 리플 공장 홍보 담당자는 “판매량에 따라 전환배치뿐 아니라 근로시간도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생산성이 높은 이유”라고 말한다.

아우디는 2015년에는 연간 150만 대 판매를 달성해 내심 BMW를 꺾고 고급차 브랜드 세계 1위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강세였던 중국뿐 아니라 미국시장마저 호조다. 2011년 벤츠까지 제친 아우디의 1위 등극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를 위해 아우디는 2011년에 경쟁차인 벤츠 S클래스, BMW 7시리즈에 비해 약세를 보인 대형차 시장에 새로운 카드를 빼들었다. 대형세단은 고급차의 이미지를 좌우하는 플래그십 모델각주11) 이다. 그동안 아우디 A8은 벤츠 S클래스, BMW 7시리즈에 밀려 존재감마저 위태로웠다. 신형 A8은 무게를 줄여 고성능을 내기 위해 차체를 100퍼센트 알루미늄으로 만들었다. 대형세단 시장에서 성공 없이 세계 1위는 불가능하다고 본 아우디는 A8을 승부수로 던진 것이다.

한국에서도 괄목할 성장을 했다. 2004년 진출 첫해 807대를 팔았다. 2011년에는 1만 대를 넘겼으며, 2013년에는 50퍼센트 성장률로 2만 대를 돌파했다. A8은 한국에서도 호조다. 2011년 G20 정상회담에 나온 의전차량 34대가 1억 5,000만 원대의 고가였지만 단숨에 동이 났다.

아우디의 기함 A8
아우디의 기함 A8

특이한 것은 아우디의 경영진 세대교체다. 아우디는 2007년 1월, 44세의 루퍼트 슈타들러를 사장으로 임명했다. 부사장단이 모두 50대 중반인 점을 감안하면 혁신적인 인사였다. 슈타들러는 1990년 아우디에 입사해 영업·마케팅·상품기획·인사·재무 경력을 쌓아왔다. 젊은 사장이 50대 중후반의 담당 임원을 독려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그해 BMW도 40대 후반으로 회장을 교체했다.

슈타들러 회장은 취임 이후 한목소리로 아우디 성공의 유전자인 ‘진보와 혁신’을 외쳤다. 당시 90만 대 수준이던 연간 판매를 수년 내에 100만 대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목표는 세계 1위(고급차 시장)라고 공언했다.

그의 말은 모두 맞아떨어진 듯하다. 약속을 지킨 경영자가 됐다. 이제 50세를 넘긴 슈타들러는 아우디 브랜드뿐 아니라 아우디 그룹을 관장하는 관록 있는 CEO로 거듭났다. 고급차 시장의 1위 BMW와 연간 판매대수 격차를 10만 대 이내로 좁힌 아우디가 세계 1위에 어떤 방식으로 오를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