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사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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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는 도시 이름이기도 하고 동시에 지역 이름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된 이후 북 왕국인 이스라엘의 임금 오므리는 비싼 값을 치르고 산 땅 사마리아에 기원전 9세기 초 새로운 수도를 세웠다.각주1) 그곳은 남 왕국인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68km 떨어져 있었다.

사마리아는 주변보다 높은 곳에 세워진 도시였기에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가 쉬웠고 또한 남북뿐만 아니라 동서를 잇는 주요 도로가 옆으로 지나가고 있었으므로 오므리 임금 이후 한때 번영을 구가하기도 했다. 사마리아는 처음에 한 도시의 이름이었지만각주2) , 후에 이스라엘 또는 에프라임처럼 북 왕국 전체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각주3)

사마리아는 지정학적인 좋은 위치와 값진 곡물이나 올리브, 포도 등을 생산할 수 있는 비옥한 땅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은 페니키아, 시리아 등 이방 국가들과의 교역이나 교류가 잦았던 이유로 이방 종교와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많았다.각주4) 다시 말해서 믿음의 순수성을 잃을 가능성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북 왕국이 기원전 721년경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했을 때각주5) 아시리아 임금은 많은 사마리아인들을 다른 곳으로 추방하고 사마리아에는 시리아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이민족들을 데려와 정착시켰다.각주6) 이후 사마리아인들은 이민족들과 피가 섞여 혼합 인종이 되었고 그들의 종교 역시 이민족들이 갖고 들어온 이방 신들 때문에 혼합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각주7)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에 뒤이어 차례로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의 통치 아래서 기원전 30년경 사마리아는 헤로데 왕국의 일부로 편입되었는데, 이때 헤로데는 사마리아를 세바스테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했다. 사마리아는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겪으며 살아오다가 기원후 66-70년 유다인들의 반란 때 다시 파괴되었다.

신약 시대에 사마리아는 북쪽의 갈릴래아와 남쪽의 유다 사이에 놓여 있는 중앙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다.각주8) 당시 팔레스티나의 요르단 강 서부 지역은 크게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이 세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사마리아는 동쪽으로는 요르단강, 서쪽으로는 지중해, 남쪽으로는 요빠 계곡, 북쪽으로는 이즈르엘 평야(에스드렐론 평야)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구약에서는 북 왕국 이스라엘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사마리아 사람들로 지칭했지만각주9) , 신약에서는 사마리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사마리아 사람들로 지칭했다.각주10)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의 종교적인 전통을 신봉하던 사람들도 사마리아인이라 불렀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받아들였다. 모세오경만이 그들의 교의와 관습들의 기초가 되었고 그들은 제정일치 체제 아래서 대사제가 정하는 규율을 따랐다.

모세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최고의 예언자요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개자로 생각했으며, 심판 날에 의인들은 낙원에서 부활하고 악한 사람들은 영원히 타오르는 불 속에 떨어진다고 믿었다. 그들은 다윗 가문에서 나올 메시아보다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각주11) 로서 모든 것을 회복시켜 줄 구원자를 기다려 왔다. 그들은 또 유다인들보다 안식일이나 정결례 등 율법을 더 엄격하게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의 거룩한 산인 그리짐 산을 이스라엘의 예배가 이루어지는 유일한 장소로 쓰려고 하느님께서 택하신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각주12)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비록 공동의 신앙 유산을 나누어 갖고 있었지만각주13) , 서로 반목하며 접촉하지 않았다.각주14)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율법적으로 정결하지 않고 로마에 호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을 무시하고 경시했다. 사마리아인이라는 말 자체가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경멸의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각주15) 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이 이스라엘 신앙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마리아인들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유다인들의 부정적인 시각은 구약 시대부터 생겨난 것으로 그들 사이의 분열은 오래전부터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마리아가 아시리아에 의해 파괴된 이후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시리아에 의해 강제 이주해 온 사람들로서 비록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받아들여 예배하기는 했지만, 이를 그들이 이미 믿고 있던 다신교적인 신앙과 혼합시켜 버렸기 때문이다.각주16) 이때부터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온전한 유다인도, 온전한 이방인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비록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을 때 이스라엘인이 아닌 사람들이 자기들의 지역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이스라엘의 후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인들이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을 지키지 못하고 혼합주의 종교를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그들의 참여를 거부했다.각주17) 이때부터 반목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해서 사마리아인들이 기원전 4세기경 그리짐 산에 그들만의 성전을 세웠을 때 두 민족은 완전히 분열되었다.

이방인들이 그러했듯이, 예수님께서도 사마리아인들을 이스라엘 가문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신 것처럼 보이지만각주18) ,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같은 시대 유다인들의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경건한 유다인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셨다. 즉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시면서 사마리아 여인과 거리낌 없이 접촉하셨고 이때 사마리아 여인은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하였다.각주19)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유다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충실하셨지만각주20) ,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을 허물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으셨다.

이 점은 예수님께서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과 진리로 참되게 예배하게 될 종교가 장소에 연계되어 있던 종교를 대신할 것임을 알려 주신 것에서 분명하게 표명되었다.각주21)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유다 사회로부터 추방된 이들을 당신 자신과 연계시킴으로써 의로움은 혈통이나 종교의식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믿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임을 계시하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모든 이방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도록 기초를 놓으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이후에 사도들에게 사마리아에도 복음을 전하라고 특별히 지시하셨고각주22) , 사도행전에서는 그분의 말씀처럼 초대 교회가 사마리아인들에게 성공적으로 복음을 선포했다고 서술해 주고 있다.각주23)

참고

  • ・ 이 책에 인용되는 성경 구절은 새 번역 《성경》(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5)을 따랐다.
  • ・ 외국어로 된 고유 명사(인명, 지명) 표기는 새 번역 《성경》(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5)에 실려 있는 표기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