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서

전서

다른 표기 언어 篆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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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예술·체육/서예

요약 한자의 고대 서체의 하나.

내용

‘篆’은 당나라 장회관(張懷瓘)의 ≪서단 書斷≫ 권상에 “전(篆)이라는 것은 전(傳)으로 물리(物理)를 전하는 것이니 베풀되 다함이 없다(施之無窮).”고 하였다. 곽말약(郭沫若)은 ≪고대문자의 변증적 발전 古代文字之辨證的發展≫에서 “전(篆)은 연(掾)으로 연은 아전[吏]이니 한대(漢代) 관제(官制)에 문서(文書)를 맡은 하리(下吏)를 연속(掾屬)·연사(掾史)하여 전서는 실상 연서(掾書) 곧 관서(官書)”라고 하였다.

전서는 넓은 뜻으로는 예서(隷書) 이전에 있는 서체로 갑골문(甲骨文)·금문(金文)·석고문(石鼓文)·육국고문(六國古文)·소전(小篆)·무전(繆篆)·첩전(疊篆)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좁은 뜻으로는 대전(大篆)과 소전이 주축이 된다. 전서의 변체(變體)는 지극히 많아 수서(殳書)·각복(刻符) 등 통칭하여 잡체전(雜體篆)이라 한다.

옛사람들은 전서를 창힐(蒼頡)이 만들었다고 하나, 당나라 위속(韋續)은 묵수(墨藪)에 ≪오십칠종서 五十七種書≫를 들고 “황제(黃帝)의 사관(史官) 창힐이 새의 발자취[鳥跡]를 그려서 문자를 삼아 전서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믿기 어렵다.

주선왕(周宣王) 태사(太史) 주(籒)가 ≪사주편 史籒篇≫을 저술하였는데 이것을 ‘대전’이라고 하였다. 그 뒤 여러 나라로 나누어져 문자는 형태를 달리하게 되었고, 진(秦)나라의 정승 이사(李斯)가 하나로 통일한 것을 ‘소전’이라고 한대에 일컫게 되었다.

≪설문 說文≫에 의하면 전은 인서(引書)로, 인서란 붓을 당겨서 죽백(竹帛:책, 특히 史書)에 나타내는 것이라 하여 이사가 통일한 서체를 전서라고 칭한다는 것이다. 전서를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다.

① 갑골문:은(殷)·주(周)시대에 구갑(龜甲)과 수골(獸骨)에 새겨진 문자를 일컬어 구갑수골문자라 한다. 약칭 갑골문·구갑문·복사(卜辭)·정복문자(貞卜文字)·계문(契文)·은계(殷契) 등으로도 부른다. 은·주시대에는 미신을 숭상하여 제사·정벌·질병·전렵(田獵)·기상·출입·연사(年事) 등 어느 하나 점쳐서 길흉을 알려고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점을 친 다음 갑골 위에 복사와 점복에 관한 일을 새겼다. 이들은 은·상시대를 연구하는 데 가장 귀중한 문헌이며 또 한자의 가장 오래된 실증이다.

② 대전:한자 고대 서체의 하나로 그 명칭은 한대에 처음 볼 수 있으니 소전의 대칭이다. 넓게는 소전 이전의 문자와 서체로서 갑골문·종정문(鐘鼎文)·주문(籒文) 및 육국문자(六國文字)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좁게는 주선왕 태사 주가 정리한 문자인 주문이다.

③ 주문:주대문자(周代文字)로 일반은 대전으로 알기도 하고, 또 대전과 같지 않다 하여 ‘주전’·‘기자(奇字)’로 보기도 한다. 허신(許愼)의 ≪설문해자 說文解字≫ 서(敍)에서는 “선왕 태사 주가 대전 15편을 저술하니 혹 고문(古文)과 다르다. ”하고 주는 인명으로 그의 성은 모른다고 하였다. 또, 주전·주서(籒書)·사서(史書)·고주(古籒)라고도 한다.

④ 금문(金文):은·주시대의 청동기(靑銅器) 위의 명문(銘文)의 통칭으로 종정문·길금문(吉金文)·관지문(款識文)이라고도 일컫는다. 대전 계통에 속하여 소전 이전의 대부분 전서 형체를 포괄하고 있어서 고대서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실물자료이다. 청동기는 상대(商代)에 기원하여 서주시대(西周時代)에 성행하였다. 금문의 내용은 당시 사전(祀典)·석명(錫命)·전렵·정벌·계약 등의 기록과 조기원인(造器原因)을 새겼기 때문에 상고사회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⑤ 초전(草篆):초솔(草率)하고 빨리 쓰는 전서라 하여 초전이라 한다. 결구(結構)에 생략하고 간편하게 하여 필획(筆劃)이 때로는 연결되는 것이 특징이다. 청나라의 완원(阮元)은 <적고재종정이기관지 積古齋鐘鼎彛器款識>·<을해정명 乙亥鼎銘>에 대하여 “초평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오직 ‘王九月乙亥’ 및 ‘乃吉金用作寶尊鼎用孝享’ 등의 자(字)이고 그 나머지는 다 알 수 없음은 모두 멋대로 간략하고 덜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청나라의 엄가균(嚴可均)은 ≪설문익 說文翼≫ 서(序)에서 “초서는 그 근원을 고주(古籒)에 두어 전(篆) 같기도 하고 예(隷) 같아서 고기문(古器文)의 서로 이어지고 뒤엉킨[聯綿糾結] 것 같은 것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⑥ 고전(古篆):고전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고대전서로 청나라의 계복(桂馥)은 ≪속삼십오거 續三十五擧≫에서 “宋人間用古篆作印, 元人尤多變態”라 하여 변태적인 전서를 말하였고, 또 하나는 고문자(古文字)를 가리켰으니 명나라의 조환광(趙宦光)은 ≪한산추담 寒山帚談≫에서 구체서(九體書)를 논하되 “二日古篆, 三代之書, 見於金石款識”라 하였다.

⑦ 고문(古文):고문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문자학적 각도로 볼 때 갑골문·종정문·석고문·고도문(古匋文)·고천문(古泉文)과 소전이 모두 고문 계통이고, 진한(秦漢) 이후의 예(隷)·해(楷)는 금문(今文)계통으로 상대하여 일컫는다. 둘째, 은·주 혹은 그보다 이전의 문자로 송의 곽충서(郭忠恕)는 ≪한간 汗簡≫에서 “鳥跡科斗, 通謂古文”이라 하였고 원(元)의 정표(鄭杓)는 ≪서요편 書要篇≫에서 “自伏羲命子襄作六書, 而黃帝後命倉頡製文字 下及唐虞三代, 通謂之古文”이라 하였다.

셋째, 오로지 만주(晩周)·육국(六國)에서 쓰던 문자로, 곧 왕국유(王國維)가 말하는 “허신의 ≪설문해자≫에 나오는 고문은 공자벽중서(孔子壁中書)로 그 체(體)는 주문 소전과 같지 않아 육국유기(六國遺器) 또한 그러하다. 벽중고문(壁中古文)은 주진간(周秦間) 동토(東土)의 무자라.” 하였다.

⑧ 소전:전서의 하나로 ‘대전’과 대칭하는 것으로 ‘진전(秦篆)’이라 일컬으니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하고서 이사에게 명하여 만든 것이다. ≪설문해자≫ 서에 “진문(秦文)과 맞지 않은 것은 모두 없애고 이사는 ≪창힐편 蒼頡篇≫, 조고(趙高)는 ≪원력편 爰歷篇≫, 호무경(胡母敬)은 ≪박학편 博學篇≫을 지어 사주(史籒)의 대전을 고쳐서 소전이라 일컬었다.”고 하였다.

소전의 필획은 둥글고 굴려서 유창하며 대전에 비하여 정제하며, 진(秦)의 각석(刻石)으로 <태산 泰山>·<역산 嶧山>·<낭야대 琅捓臺> 등은 이사가 썼다고 전하며 소전의 대표작이다. 소전으로 획이 약간 굵으면 옥저전[玉筯篆(箸)]이라 하고 가는 것을 철선전(鐵線篆)이라고 한다.

⑨ 한전(漢篆):한대(漢代)의 전서로 체격(體格)이 방형(方形)에 가깝고 필법은 예(隷)에 가깝다. 비(碑)와 같이 장중할 때와 청동기 등에 사용하고 있다. 비에는 전액(篆額)으로, 또 청동기에는 경명(鏡銘)에 주로 썼다. ⑩ 당전(唐篆):당대(唐代)의 서가(書家)들이 쓴 전서로 대전과 소전을 많이 썼으며 이양빙(李陽冰)이 그 대표적이다.

⑪ 동방전(東方篆):동방 곧 고조선으로부터 신라·고려·조선에 걸쳐 그 유적을 살펴보면,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에 단군시대의 고비(古碑)로 전하는 고전비(古篆碑)가 중국에서 창힐의 필적으로 전하는 것과 같아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필적과 동류의 것으로는 남해(南海)에 있는 각석문자(刻石文字)와도 일맥상통하고 있어 주목된다.

신라전(新羅篆)으로는 <신라태종무열왕릉비>가 있어 오(吳)나라의 <천발신참비 天發神讖碑>의 전과 비슷하게 예봉필법(銳鋒筆法)으로 정방형의 특색을 보이고 있으며, 또 최치원(崔致遠)의 필적인 <진감선사비 眞鑑禪師碑>의 전액(篆額)인 <당해동진감선사지비 唐海東眞鑑禪師之碑>의 9자는 예봉필법으로 초전의 맛이 짙어 당시 중국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리고 통일신라기와 고려 및 조선에 걸쳐서는 모두 소전으로 썼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중엽의 허목(許穆)의 전서는 초전의 특색을 살렸으나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기형의 전서를 써서 알아볼 수 없는 자가 많다. 조선 순조 때의 학자 홍길주(洪吉周)는 ≪동문십이가소제 東文十二家小題≫에서 “허목은 결정파대(缺鼎破敦)와 같아서 억지로 은주(殷周)의 고기(古器)라 하나 어리석으면서 기괴함을 좋아하였으니 광혹(誑惑)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풍은 간혹 있어 온 일이라 하겠으나 지나친 경향으로 애써 꾸미는 일은 삼가야 한다.

참고문헌

  •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 ・ 『中國書法大辭典』(香港 書譜出版社,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