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상가

낙원상가

樂園商街

어느 날 하루, 나만의 영화를 찍기 좋은 곳

낙원상가 지하로 내려가면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다.
4층으로 올라가면 고전영화나 예술영화 한 편을 볼 수 있다.
낙원상가를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여느 곳과는 다른 이곳만의 하루가 펼쳐진다.
어떤 시공간 속에서 나만의 영화를 만들어갈지, 그 하루가 오롯이 기대된다.

모든 것이 다 있는 곳이 있다. 지하에는 온갖 먹거리와 잡화로 가득한 재래시장이 있고, 1층에는 차들이 쌩쌩 달리는 6차선 도로와 사람들이 오가는 네거리가 있고, 2~3층은 수백 개의 전문 악기점들로 채워져 있고, 4층에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만이 아니라 뮤지컬까지 볼 수 있는 전용관이 무려 세 개나 있고, 6층부터 15층까지는 빛이 가득한 환상적인 중정을 은밀히 품고 있는 아파트가 있다. 이 모든 것이 다 있는 그런 곳이 있다. 요새 유행하는 주상복합 건물 분양 광고가 아니다. 1968년에 지어진 낙원상가 건물 이야기다. 한때 3층에는 볼링장이 있고, 4층 극장 건너편에는 유명한 카바레도 있었단다. 단지 의식주를 해결하는 주상복합이 아니라, 춤과 음악, 영화와 스포츠 등 인간의 다양한 문화예술적 욕구를 한곳에서 해소할 수 있는 궁극의 주상복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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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장부터 극장까지 모든 것이 다 있는 그런 곳, 바로 낙원상가 시장부터 극장까지 모든 것이 다 있는 그런 곳, 바로 낙원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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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미지1/10 시장부터 극장까지 모든 것이 다 있는 그런 곳, 바로 낙원상가
시장부터 극장까지 모든 것이 다 있는 그런 곳, 바로 낙원상가

낙원상가 자리는 원래 재래시장 터였다. 낙원동은 서쪽의 인사동, 동쪽의 익선동과 함께 술집과 요정이 많았던 곳이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악사들의 왕래도 많았고, 광복 후에는 종로 거리를 따라 나이트클럽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연주자를 상대하는 악기점들이 생겨났다. 밴드음악의 전성기였던 1980년대에는 2층 빈 공간이나, 상가 ‘삼거리’에 즉석 밴드 인력 시장이 서기도 했다고 한다. 옛날부터 먹거리와 놀거리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낙원상가가 이곳에 세워진 것은 서울 시내 교통 체증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 차량이 급격하게 늘면서, 서울시는 교통 체증을 해소하기 위해 남북 방향의 도로 건설이 절실했다. 당시 국내 최고 높이의 건물인 31층짜리 삼일빌딩을 계획하고 있던 정부와 서울시는, 종로와 을지로를 연결하는 삼일로를 율곡로까지 연장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서울시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묘안을 짜냈다. 조합을 대표하는 민간 기업이 건물을 지어 시에 기부채납하고, 대신 기업이 낙원상가와 아파트의 분양권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낙원상가는 도로 위에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도로를 만들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단순히 길을 뚫기 위해 세운 건물 안에 주변의 길들이 층층이 쌓여서 하나의 마을이 된 것이다.

낙원상가와 나의 인연은 아주 어릴 때로 돌아간다. 삼일대로를 타고 안국동 쪽에서 낙원상가 쪽으로 가다 보면, 교동초등학교와 낙원떡집을 지나 낙원상가 못 미쳐 왼쪽에 종로세무서로 가는 길이 있다. 종로세무서 바로 옆에 원불교 종로교당이 있는데, 부모님이 인연을 맺으신 곳이다. 지금은 호텔과 오피스텔들이 들어서 있는 번잡한 길이지만, 당시에는 한옥이 늘어선 조용한 길이었다. 3층짜리 종로교당은 어린 나에게 거대한 공간으로 느껴졌는데, 어머니가 골목 입구 떡집에서 사주신 맛난 떡과 함께, ‘교당 가는 길’이라는 소중한 추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 추억의 조각에 낙원상가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낙원상가 너머 왁자지껄한 종로에 대한 기억도 없다. 하얀색의 낙원상가는 세상 끝에 서 있는 거대한 설산처럼, 내 기억의 경계를 긋고 있는 것 같다. 교당과 떡집으로 기억되는 이쪽 세상은 조용하고 편안했다.

낙원상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허리우드 극장을 통해서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은 나에게 큰 즐거움이었는데, 심지어 어머니는 일곱 살이나 어린 동생을 업고 표를 사기 위해 긴 줄을 서곤 하셨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1976년, 광화문에 있던 국제극장에서 본 〈킹콩〉이 내 생애 최초의 영화였는데, 영화보다는 표를 사기 위해 어머니 손을 잡고 극장을 몇 바퀴 돌았던 기억이 더 생생하다. 같은 해 여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판 만화영화인 〈로보트 태권브이〉를 대한극장에서, 겨울에는 속편인 〈로보트 태권브이 2탄-우주작전〉을 중앙극장에서 보면서, 영화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키우기 시작했다.

허리우드 극장을 찾은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데, 이상하게도 무슨 영화를 봤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고, 어머니가 동생을 업고 힘겹게 계단을 올라갔던 기억만 난다. 어머니께 여쭤보니 〈스타워즈〉를 본 것 같다고 하시는데, 확인해보니 1977년에 〈스타워즈〉는 허리우드 극장이 아니라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머니와 자주 찾던 국제극장(〈슈퍼맨〉, 1979)이나 대한극장(〈슈퍼맨 2〉, 〈벤허〉, 재개봉, 1981)과 다르게 허리우드는 왠지 허름하고 지저분한 느낌이었다.

종로3가 정류장에서 내려,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 옆을 돌아 낙원상가로 가는 길은 포장마차와 노점으로 가득했고, 낙원상가 4층에 있는 허리우드 극장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돼지고기 냄새가 자욱한 순대국밥 골목을 뚫고 가야 했는데, 깔끔한 것을 좋아하시는 어머니나 번잡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는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당시 극장 앞에는 야외 롤러스케이트장이 있고 건너편에는 유명한 123카바레가 있었다고 하는데,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유쾌한 유령 사냥꾼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고스트버스터즈〉 역시 어느 극장에서 봤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는데, 1984년에 허리우드 극장에서 개봉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의아해했다. 가는 길이 유쾌하지 않아서인지, 주변에 도덕적으로 문란한 공간이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영화뿐 아니라 공간에 대한 기억마저 지워버린 것 같다.

특히 1985년 강남에 씨네하우스가 개관하면서, 〈아마데우스〉(1985), 〈인디애나 존스〉(1985), 〈에일리언 2〉(1986) 등 영화에 대한 욕구를 주로 집 근처에서 해결하면서 시내로는 나가지 않게 되었다. 더불어 낙원상가도 공간에 대한 기억은 지워진 채, 도로 위에 세워진 아무런 깊이도 없는 거대한 영화 간판으로서만 기억되었다. 대학생이 되면서 영화 사랑은 더 깊어졌지만, 종로에 있는 단성사(〈다이하드〉, 1988/〈윌로우〉, 1990)와 피카디리(〈붉은 수수밭〉, 1989), 서울극장(〈고스트버스터즈 2〉, 1990/〈터미네이터 2〉, 1991)과 충무로 쪽에 있는 대한극장(〈마지막 황제〉, 1988), 명보극장(〈지옥의 묵시록〉, 1988), 스카라극장(〈아파치〉, 1990), 명동 입구에 있는 중앙극장(〈더티댄싱〉, 1988)을 주로 찾았다. 낙원상가와 허리우드 극장은 내 영화적 체험에서 사라진 채, 종로 변의 영화 간판으로만 존재했다.

낙원상가를 하나의 공간으로 인지한 것은, 대학생이 되어 여자 친구를 사귀면서 데이트 코스를 찾기 시작하면서였다. 당시 어둡고 칙칙한 다방은 밝고 깨끗한 커피숍으로 대체되고 있었고, 국내 원두커피 전문점의 시초인 ‘쟈뎅’(Jardin)이 압구정에 1호점을 낸 것도 1988년이었다. 하지만 아직 원두커피 맛의 매력을 알지 못한 나는 커피숍보다는 전통 찻집을 선호했고, 특히 시원한 미숫가루 한 그릇을 마실 수 있는 인사동 찻집을 종종 찾곤 했다. 가끔 지하철 종로3가역에 내려 단성사나 피카디리 또는 서울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보고 인사동길로 걸어와 차 한잔을 하기도 했지만, 주로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인사동길 주변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것이 일상적인 데이트 코스였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골목길을 헤매고 다니다 널찍한 야외 계단 앞에 서게 됐다. 낙원상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늦은 오후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올라간 계단 위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바로 낙원상가 2층 악기상가였다. 그 넓은 공간을 가득히 메운 형형색색의 악기가 조명에 반짝이는 모습은, 테크니컬러(Technicolor)의 진수 〈오즈의 마법사〉의 한 장면 같았다. 길 양쪽에 늘어선 부스형 상점의 악기들은 유리 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였고, 가운데 아일랜드형 상점의 악기들은 아름다운 몸매를 그대로 드러냈다. 둘러보니 그냥 상가가 아니라 삼거리도 있고, 골목길도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때로는 넘어갈 수 없는 거대한 기억의 장벽으로, 때로는 내부 공간이 없는 영화 간판으로만 인지되던 낙원상가가 살아 있는 골목길로 다시 보인 것이다. 낙원상가 안의 악기상가는 건물 내부의 상가가 아니라 인사동 골목길의 연장으로 느껴졌다.

허리우드 극장을 다시 찾은 것은 2011년 가을이었다. 평상시 프랑스 예술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프랑스 대사관과 프랑스 문화원이 후원하고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주관하는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The Classic French Cinema) : 1930-1960〉 특별전에서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 1901~1999) 감독의 〈불로뉴 숲의 여인들〉(Les Dames du Bois de Boulogne, 1945)과 〈무셰트〉(Mouchette, 1967)를 볼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브레송 감독은 영화 〈소매치기〉(Pickpocket, 1959)를 통해 알게 되었다. 파편화된 도시 공간을 소매치기들의 클로즈업된 손의 움직임으로 연결시키는 장면은, 독특한 시촉각적(haptic)인 감동을 주었는데, 다양한 시간과 공간이 공존하는 골목길을 헤매며 느끼는 나의 묘한 즐거움을 영화적으로 잘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서울아트시네마(Seoul Art Cinema)에서 상영한다고 해서 주소를 찾아보니 낙원상가 4층이었다. 평상시처럼 안국역에서 내려 인사동길을 지나 야외 계단을 타고 2층 악기상가로 올라갔다. 하지만 서울아트시네마로 올라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에는 딱히 안내 표시도 없었다. 한참을 헤매던 나는 아무 계단이나 타고 일단 4층으로 올라가보기로 했다. 4층에 도착하니 극장 커튼이 양쪽으로 열리듯이 눈앞에 널찍한 야외 공간이 나타났다. 오른쪽에는 밋밋한 벽에 창들이 뚫려 있는 거대한 흰색 콘크리트 건물이 서 있었고, 왼쪽에는 흰색 타일의 2층짜리 건물이 있었다. 인사동 너머 고층 건물들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다. 왼쪽 건물 2층에 영화 간판 세 개가 붙어 있는 것을 보니, 드디어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은 것 같았다.

표를 사서 로비로 들어서니, 젊은 사람은 거의 없고 노인 분들만 계셨다. 옛날 프랑스 예술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고 생각하고, 잠시 구석에 앉아 기다리다가 영화가 시작되자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극장 안에는 사람이 몇 명밖에 없었다. 그 많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그분들이 어디로 가셨는지 알았다. 바로 옆 실버 영화관에서 다른 영화를 보고 계셨던 것이다. 그냥 실버 영화관이 아니라, ‘허리우드 클래식 : 실버 영화관’이었다. 그제야 내가 거의 30년 만에 허리우드 극장에 다시 돌아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옛날의 허리우드 극장은 아니었다. 대한극장(1,900석) 다음으로 큰 1,200석의 공간은 세 개로 쪼개져, 예술영화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 노인 전용 영화관 실버 영화관, 댄스 뮤지컬 〈사춤〉(사랑하면 춤을 춰라) 전용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1974년 〈포세이돈 어드벤처〉와 1977년 〈타워링〉 등 한때 재난 영화의 메카로 전성기를 누렸던 허리우드 극장은, 1989년 서울극장으로 시작된 복합상영관 바람과, 19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밀려온 멀티플렉스 쓰나미를 힘겹게 단관으로 버텨내다가, 1997년에 ‘레드/그린/블루’라는 이름의 세 개 상영관을 갖춘 복합상영관으로 재개관했다. 하지만 리모델링 후에도 극장 운영이 만만치 않아, 결국 2005년에 필름포럼과 서울아트시네마가, 2008년에는 필름포럼이 나간 자리에 다시 고전영화 상영관인 ‘허리우드 클래식’과 사춤 전용관이 들어왔다. 2009년에 ‘허리우드 클래식’은 다시 ‘허리우드 클래식 : 실버 영화관’으로 바뀌었다.

이곳에 정착한 영화관들의 안타까운 사연도 비슷하다. 고전영화와 예술영화 등 일반 극장에서 보기 힘든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상영하는 서울아트시네마는 전용관도 없이 떠돌다 2005년에 이곳까지 왔고, ‘허리우드 클래식 : 실버 영화관’의 대표는 관광호텔을 짓기 위해 2012년 7월에 철거된 노인 전용 극장 ‘서대문아트홀’(구 화양극장)의 대표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소외된 노인과 극장에서 쫓겨난 예술영화가 거대 자본과의 경쟁에서 밀려난 허리우드 극장 자리에 새 보금자리를 튼 것이다.

극장 로비 옆에는 ‘추억 더하기’라는 음악실이 있는데, 한쪽 벽에는 LP판이 가득하고, 입구에는 500원짜리 가래떡 메뉴가 붙어 있다. 1970~1980년대 유명했던 DJ도 불러 신청곡을 받는다고 했다. 실버 영화관 입장료는 55세 이상은 2,000원, 학생은 5,000원, 일반인은 8,000원이지만, 55세 이상 어르신을 모시고 오는 사람은 2,000원으로 할인해준다. 들어올 때 지나쳤던 야외 공간은, 극장 앞 광장이자 낙원상가 4층 옥상 정원이었다. 중앙에 인공 잔디가 있고, 빙 둘러 목재로 마감한 느낌이 포근하고 좋았다. 건너편에는 공연용 스탠드도 있었다. 들어올 때 오른편에 있던 건물은 낙원상가 아파트였다. 밋밋한 겉모습과 다르게 내부에는 아무도 모르는 빛이 가득한 중정이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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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한 무리의 아시아계 젊은 외국인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로 들어갔다. 〈사춤〉을 보러 온 관광객이었다. 녹색 문이 열리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할아버지 할머니 몇 분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3층에서 문이 열렸다. 가죽 재킷에 기타를 멘 청년이 걸어 들어왔다. 대학생인지 인디밴드 연주자인지 잘 모르겠다. 다시 2층 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엄마와 아들로 보이는 두 사람이 들어왔다. 남자아이는 한 손에 검은색 악기 케이스를 들고 있는데, 케이스가 새것인 걸로 봐서는 방과 후 수업을 위해 첫 악기를 구입한 것 같았다. 1층 문이 열리고, 엄마와 아들, 기타를 멘 청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차례로 걸어 나갔다.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불현듯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 건너편으로 낙원상가 아파트로 올라가는 또 다른 로비가 보였다.

밖으로 나오니 갑자기 돼지고기 비린내가 나를 맞았다. 옛날 어머니 손을 잡고 숨을 참고 지나갔던 바로 그 순대국밥집 골목이었다. 거대한 낙원상가 계단 옆을 따라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우리집, 강원도집, 광주집, 전주집, 충청도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마치 전국의 순대국밥집이 다 모여 있는 듯하다. 돼지고기 삶는 솥에서 나온 하얀 김이 골목길을 지나는 사람들 사이를 넘실거리고 있었고, 탑골공원이 저 멀리 보였다. 돼지고기 냄새에 좀 무뎌지니, 로비 바로 앞에 서 있는 낡고 허름한 이층집이 눈에 들어왔다. 4~5층짜리 주변 건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박공지붕의 2층 건물은, ‘소문난 집 추어탕’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모양새가 1960~1970년대 풍경을 연출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세트장 같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창에 ‘해장국 2,000원’이라고 붙어 있었다. 서울 시내에 2,000원짜리 해장국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다니 신기했다. 허기도 지고 해서 한번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나무 원목을 잘라 만든 투박한 테이블에 어르신 몇 분이 둘러앉아 막걸리와 해장국을 드시고 있었다. 주문하자 해장국 한 그릇이 뚝딱 내 앞에 왔다. 우거지가 잔뜩 들어가 우거지국에 가까웠다. 2,000원 이상의 맛이었다. 주인 분께 여쭤보니, 처음 장사를 시작하던 1955년에는 350원이었다고 한다. 1968년에 세워진 낙원상가보다 13년 전 이야기다. 이 동네 진정한 터줏대감을 만난 것이다.

1945년에 만들어진 프랑스 영화 〈불로뉴 숲의 여인들〉을 보러 나온 하루가, 1969년에 지어진 허리우드 극장을 거쳐, 1955년 이래 변함없는 해장국 맛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사이에 나는 고전영화를 사랑하는 노인 분들과, 댄스 뮤지컬을 보러 온 외국인들과, 젊은 기타리스트와, 생애 첫 악기를 산 엄마와 아들, 그리고 50년 넘게 이 자리를 지켜온 해장국집 주인을 만났다. 클로즈업된 손의 움직임이 파편화된 공간을 연결하며 독특한 감동을 준 브레송 감독의 영화 〈소매치기〉처럼, 다양한 장소와 다양한 시간을 넘나들며,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나만의 영화를 만든 하루였다. 정해진 동선도 없고, 강요된 조망도 없이, 기분이 이끄는 대로 나만의 새로운 시퀀스를 만드는 느낌이었다.

지난 봄날, 90년 된 한옥마을이 서울 시내에 남아 있다고 해서 낙원상가를 다시 찾았다. 지하철 5호선 종로3가역에서 내렸다. 길(돈화문로 11길) 위로 올라오니, 파릇파릇한 가로수에 봄기운이 완연했다. 길을 따라 늘어선 2~3층짜리 건물에는 국악사와 악기점, 주점과 음식점이 많았고, 군데군데 호텔과 모텔도 보였다. 음식점의 주 메뉴는 추어탕, 장어, 복어 등 힘나는 것들 위주였고, 파전이나 빈대떡집도 눈에 띄었다. 카페는 전혀 보이지 않고 다방만 있었다. 오래된 것들에 깃들어 있는 시간의 가치는 잊고, 새로운 것과 젊음에만 집착하는 우리 사회가 외면해온 것들이 모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낙원상가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젊음의 공간으로부터 노인만을 위한 공간을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낙원상가로 가는 길가 오른편 편의점 옆으로 익선동 165번지 한옥마을로 들어가는 골목길이 있다. 192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주택건설 업체인 ‘건양사’(建陽社)가 조성한 한옥마을이다. 가회동 한옥마을도 건양사의 작품이라고 한다. 한옥이 늘어선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으니, 오랜 세월에 빛깔을 잃고 사이가 벌어진 대문, 1960~1970년대에 유행했던 파벽돌과 흰색 타일, 1980년대의 반듯한 붉은 벽돌, 1990년대의 장식 타일과 시멘트 마감, 최근에 깔끔하게 덧칠해진 회벽과 교체된 보도블록 등 지난 9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동네 어르신에게 물어보니, 2004년에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되어 아파트와 관광호텔이 들어설 예정이었지만, 최근 들어 보존 여론이 만만치 않아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한옥마을을 한 바퀴 돌고 다시 큰길로 나오니 낙원상가가 다시 보인다. 앞으로 가면 낙원상가 밑을 통과해 관광객과 젊음이 넘치는 인사동길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꺾으면 떡집 골목을 지나 구한말의 역사를 담고 있는 운현궁과 천도교 중앙대교당, 그리고 북촌까지 갈 수 있고, 왼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순대국밥 골목을 지나 3·1운동의 발상지이자 최초의 근대적인 공원인 탑골공원, 그리고 조선시대 시전행랑에서 시작한 종로까지 갈 수 있다. 아니면 낙원상가 지하 재래시장으로 내려가 따끈한 국수 한 그릇을 먹을 수도 있고, 2층으로 올라가 잊고 있던 음악의 꿈을 다시 살려볼 수도 있고, 4층으로 올라가 고전영화나 예술영화 한 편을 볼 수도 있다.

오늘은 또 어떤 시공간 속에서 나만의 영화를 만들어갈지 기대된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어느 공간으로 가야 할지, 어느 시간으로 가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자본의 논리와, 시간의 가치를 망각하는 도시 미관에 대한 집착이,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말살하고 특정한 조망과 형태를 강요하는 요즈음, 이렇게 다양한 공간과 시간 사이에서 고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햇살이 따사롭다. 오늘은 그 따사로운 햇살을 따라가 보아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