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암동 자하미술관 가는 길

부암동 자하미술관 가는 길

무계정사 옆 인왕산 미술관

요약 테이블
소재지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362-21
휴관일 매주 월요일 휴관
가는 법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간선버스 7022, 1020, 0212번 환승. 부암동 주민센터 하차. 주민센터 끼고 좌회전. 무계정사 터 지나 우회전 약 300미터
사이트 http://www.zahamuseum.com
이용 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

목차

접기
  1. 내 마음 속 우리 동네
  2.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골목길
  3. 부암동의 몽유도원
부암동 자하미술관 가는 길
부암동 자하미술관 가는 길

부암동은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낡고 바랬다. 그러므로 매혹한다. 무계정사길에는 그 정취가 오롯하다. 아직은 여전한 부암동의 길모퉁이. 그 걸음의 끝자락이 자하미술관이다. 미술관은 고매한 예술보다 장엄한 자연으로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내 마음 속 우리 동네

부암동을 좋아한다. 그 빛바랜 색감이 만드는 낡은 정서가 좋다. 걸음을 뗄 때마다 들고나는 길바닥의 두툼한 시간이 사랑스럽다. 서울에는 많은 동네가 있고 저마다의 색깔을 갖지만 내게는 어느 곳보다 부암동의 은빛이 명징하다. 마음에 갈무리한 ‘우리 동네’가 있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겠지. 다니다보니 단골 카페도, 잠깐씩 쉬었다 갈 수 있는 친구집도 있다. 그래도 길은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슬며시 내 눈앞에 다가선다. 아직 처음인 곳이 있다니, 놀랄 양이면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머물렀노라 타박한다. 겹겹으로 쌓인 시간의 숨은 그림이겠지. 마음에 비가 내리는 날에 찾아드는 길도 생겼다. 바람 부는 날이면, 그립고 그리운 날이면 떠돌다 마주하는 너른 풍광에 스르륵 마음이 녹는 내 심정의 쉼터.

인왕산의 턱밑에 뿌리내린 자하미술관은 ‘서울에서 가장 높은 미술관’이라는 수식이 마음을 끌었다. 드라마 「떼루아」의 촬영지라 했다. 극중 안지선(유선 분)의 집이었다. 2008년 6월에 개관했지만 그해 겨울 드라마 촬영으로 휴관했다. 드라마에서는 화려한 인테리어로 치장한 큰 방이었다. 두 발이 미술관에 닿고서야 드라마가 보여주지 못한 비경이 숨 쉰다는 걸 알았다. 부암동에서는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촬영지인 북악산의 ‘산모퉁이’와 대척점을 이루지만 그보다 훨씬 고요하다.

길의 마지막에 성처럼 자리한 자하미술관도 좋지만 무엇보다 가는 길이 마음에 든다. 안평대군 이용(李瑢) 집터(무계정사 터)로 가는 무계정사길은 호젓하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이 꿈에 본 무릉도원과 닮았다 해 정자를 지은 장소다. 그 꿈속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낸 것이 안견의 「몽유도원도」였다. 「운수 좋은 날」 「무영탑」 등을 쓴 소설가 현진건의 집도 그 곁에 있었다. 지금은 사람의 출입을 막아선 빈터만 남았다. 종로구청은 그 터에 공영주차장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주민들의 반대가 심하다. 그럴 만하다. 자하미술관 가는 길은 그 터를 지나며 거친 오르막으로 접어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골목길

안평대군 집터에 이르는 길은 두 갈래다.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파스타가 맛있다는 ‘오월’을 끼고 왼쪽의 내리막으로 접어들거나, 보은마트 옆 골목을 오른다. 두 길은 그 사이의 집들을 에둘러 안평대군 집터에서 만난다. 대부분 오월을 낀 내리막을 택한다. 곧 디자인 카페 ‘앤스 나무’가 나온다. 스타일리스트 안선미가 운영한다. 야생화찻집 ‘들꽃향기’도 나타난다. 찻집이라지만 꽃집과도 닮았다. 빨간 벽돌의 ‘수도방앗간’도 동네 터줏대감이다. 소담스러워 길과 잘 어우러진다. 새것과 옛것이 좁은 길에 어울린다.

부암동만의 오롯한 옛 정서를 탐하기에는 외려 샛강처럼 열린 보은마트 옆 골목이 낫다. 내 심상의 길도 이리 통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골목이다. 뚜벅뚜벅 무심한 발소리만 울릴 만큼 조용하다. 잿빛 담을 따라 담쟁이가 자라고 성큼한 소나무가 벽을 넘어 길을 엿본다. 그 호기심을 어찌 할까. 그늘 져 지워진 햇볕은 또 어찌 할까. 완고한 아버지의 꽉 다문 입술처럼 무뚝뚝한 길은 수염처럼 까슬까슬한 이끼마저 자란다. 그 모퉁이의 끝자락이 안평대군 집터로 들어서는 쪽문이다. 입구에는 너른 그늘을 드린 고목이 문지기처럼 지키고 선다. 그 위의 높은 단에 한옥 한 채가 머문다. 빈터는 사유지로 출입을 막았지만 자연스레 넘나든다. 안평대군의 집터이자 현진건의 옛 집터다. 터는 스산하나 터 위에 자란 들꽃은 곱기만 하다.

안평대군 집터를 지나자 윤응렬 별서다. 대한제국 법무대신을 지낸 윤응렬의 별장으로 1906년에 완공했다. 민속자료 제12호로 지정된 한옥이다. 안채는 탐할 수 없어도 겉모습은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앞선 오른쪽 골목에는 길 따라 노송이 아치처럼 누웠다. 그 모습이 또 이채롭다. 윤응렬 별서를 돌면 길은 한층 더 가파르다. 거친 숨이 그림자처럼 뒤따른다. 격렬하고 가쁘다. 땀방울이 송골송골하다. 길가로 삐죽한 구절초 흰 꽃자락이 시원한 바람처럼 다가선다. 자하미술관으로 향하는 마지막 고비다.

전망 좋은 미술관은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쉽사리 열어주지 않는다. 지쳐 돌아서기 알맞을 만큼의 경사다. 하지만 그것이 부암동이다. 사람 사는 동네다. 부암동이 삼청동처럼 카페와 레스토랑의 거리로 변하지 않을 거라 믿는 이들은 산으로 숨어드는 그 지세에 기대를 건다. 그러므로 가치를 되씹게 한다. 역설적이게도 자하미술관은 그 길의 꼭대기에서 사람을 밀어내고 끌어당긴다.

부암동의 몽유도원

한 땀 한 땀의 걸음이 모여 자하미술관에 이른다. 길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인왕산이 막아선다. 자하미술관은 지하 같은 1층을 품은 4층 건물이다. 45평의 1층 1전시실 위에 25평의 건물이 올라선 형국이다. 1층 주전시실은 높고 화사하다. 천장에 유리로 창을 내 채광이 좋다. 1층 옆으로는 2층으로 향하는 바깥의 벽돌계단이 있다. 2층 2전시실 바깥의 남은 부지에는 좁은 길을 품고 잔디가 자란다. 2층 전시실은 주택처럼 동선을 설계했다. 층고는 낮지만 현관과 각 방을 연결하는 개개의 전시실이 흥미롭다. 서재 같은 휴게실에는 앤티크 가구도 고풍스럽다. 무엇보다 바깥으로 난 전면 유리창이 일대의 산세를 한눈에 펼쳐놓는다.

미술애호가 강종권 관장이 직접 설립하고 설계한 구조다. 이윤보다는 문화의 공유가 주된 목적이다. 작품의 전시도 상업성보다는 장래성과 실험성에 비중을 둔다. 숨을 고르듯 전시실의 작품을 감상한다. 작품과 풍경이 번갈아 다가선다. 그리고 2층의 바깥을 아우르는 탐스런 잔디밭이란!

자하미술관은 가파른 길을 올라와 2층 잔디밭 앞에서 한숨 같은 날숨을 뱉어낼 때야 비로소 기꺼움으로 찾아든다. 봄바람처럼 따스한 풍경이 끼쳐들자 몸과 마음은 당혹스럽고 그러므로 위로를 받는다. 피할 겨를이 없는 개방의 시계(視界)다. 시원스럽기보다 후련하다. 마음의 짐들이 단숨에 홀가분해진다.

이상하게도 자하미술관에서는 사람이 만든 작품보다 자연이 그려낸 풍광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다. 그림 앞에서 정신은 또렷하지만 자연 앞에 서면 넋을 잃는다. 잔디 위의 망중한이다. 북악산의 가파른 산세가, 너울대는 북한산의 비봉능선이 마주한다. 묵언의 수행처럼 무언의 대화가 공기 중에 떠다닌다.

이곳에서는 시선도 길을 잃는다. 방목하듯 마음도 널부러진다. 무엇을 더 바랄까. 무계정사에서 띄워 보낸 안평대군의 마음이 반세기를 넘어와 이내 가슴에 무성한 빛으로 어린다. 내게는 마음이 쉬어가는 이곳이 몽유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