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시간과 상대적 시간

절대적 시간과 상대적 시간

상상력의 끝없는 욕망, 무한한 시간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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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상에는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한다
  2. 크로노스
  3. 카이로스

세상에는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한다

시간에 대한 상상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시간이란 과연 무엇일까?"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는 일단 시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5시이며 1시간 후 퇴근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우리의 기준에서 시간은 절대적인 것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정해진대로 움직이는 개념으로 굳어 있다. 왜 군대에서도 얘기하지 않는가.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의 시계는 간다"라고.

하지만 우리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간의 움직임은, 어쩌면 단지 시계에 적힌 숫자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의 실체는 시계의 숫자를 넘어서 훨씬 더 거대하고 추상적이며 상상적이다. 사실 시간이란 것은 우주가 생긴 이래 계속 흐르고 있었으며, 시계의 숫자가 만들어낸 그 시간은 그 오랜 시간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시간은 시계라는 기계로 측정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그렇게 분절된 형태로 규정될 수 없는 대상이다.

아인슈타인이 시간의 상대성 이론을 내놓으면서 기존의 근대적 시간의 패러다임을 해체한 이후 우리는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시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과 주관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시간의 상대성을 쉽게 풀이했다.

뜨거운 냄비에 손을 얹는다고 해보자. 단 몇 초만 얹고 있어도 그 시간은 너무나도 길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사랑하는 아름다운 연인과 같이 있을 때에는, 몇 시간이라는 시간조차도 너무나 짧게 느껴질 것이다. 물론 이것이 상대성 이론의 실질적인 내용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농담과도 같은 비유이지만, 이처럼 시간이라는 것은 그것의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인 시간에 대한 상상이 20세기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고대인들은 이미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신화에는 이상하게도 시간의 신으로 두 명이 등장한다. 한 명은 '크로노스(Chronos)'이고, 또 한 명은 기회의 신이라고도 불리는 '카이로스(Kairos)'이다. 왜 시간이라는 같은 대상에 신은 두 명이 있는 것일까? 이는 그들이 시간을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크로노스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태초신 중 한 명으로, 사실 신화에 따르면 크로노스는 총 두 명 이 있었다. 하나는 시간의 신인 흐로노스(Chrons)이며, 하나는 농경의 신인 크로노스(Kronos)이다. 음유시인들의 전승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태초에는 오로지 흐로노스, 즉 시간의 신만 존재했다. 여기서 시간이란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불로불사의 힘을 지닌 것이었다. 흐로노스는 맑은 공기 아이테르와 어두운 심연 카스마를 낳았으며, 또한 우주의 알을 낳았는데 여기서 태어난 것이 빛의 신 파네스로 그는 오르페우스 신앙에서의 우주신 프로토고노스와 동일시된다.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시간으로부터 공기와 어둠, 우주가 태어났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상상은 그만큼 시간이 세상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이라고 인식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한 명의 크로노스는 그보다 훨씬 이후에 등장한 신으로, 신들의 왕인 제우스와 그의 형제들은 모두 크로노스와 그의 부인 레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크로노스는 농경을 상징하는 신으로 낫을 들고 있는데, 신화에 따르면 그는 어머니 가이아의 명에 따라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거세하고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았다. 이때 가이아는 크로노스 또한 아버지 우라노스와 마찬가지의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 예언했고, 여기서 크로노스의 끔찍한 습성이 발생한다. 그는 이 예언이 실행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아이들을 낳자마자 잡아먹었다고 하는데, 이런 끔찍한 크로노스의 모습은 고야의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라는 그림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크로노스의 자식들 중 제우스는 몰래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제우스는 크로노스의 배를 갈라 형제들을 꺼내고 신들의 왕이 되었다.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후 전승 과정에서 일어난 문제이다. 흐로노스와 크로노스는 별개의 신이었지만, 전승 과정에서 이름이 비슷한 두 신을 사람들이 혼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두 신의 이름이 라틴어상의 발음에서 거의 같았기 때문에, 결국 이 두 신은 별개의 다른 신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서구에서 두 번째 크로노스의 행위들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게 되었다.

먼저 우주의 탄생에서, 시간 자체인 크로노스가 우라노스를 몰아내고 신들의 왕이 되면서 세상이 시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만물은 생로병사의 고통을 안게 되었고, 시간에 따라 생기고 또 없어지는 존재가 되었다. 또한 크로노스의 끔찍한 습성은 '시간이 모든 것을 집어 삼킨다'라는 의미로 새롭게 해석되었으며, 올림포스의 신들은 시간을 이겨 불생불멸의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승 과정에서 본래 절대적인 존재였으며 세계 자체였던 시간은 신들에 의해서 파괴되었지만, 크로노스는 여전히 태초의 시간의 신으로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시간은 여전히 세계의 지배적 원리로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

카이로스

카이로스
카이로스

상대적인 시간의 신이자 기회의 신이 라고도 불리는 카이로스는 제우스의 아들인데, 그는 무척 재미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우선 그의 머리를 보면 앞머리는 무성한데, 뒷머리는 머리털이 하나도 없는 대머리이다. 그리고 그의 양 발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때로 그는 날개가 달린 공 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리고 손에는 저울과 칼을 들고 있다. 카이로스 동상 앞의 에피그램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고, 나를 발견했을 때는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고,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나를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이다.
저울을 틀고 있는 이유는
기회가 앞에 있을 때는 저울을 꺼내 정확히 판단하라는 의미이며,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는 이유는
칼같이 결단하라는 의미이다.
나의 이름은 ‘기회'이다.
인용문
상대적 시간의 신 카이로스의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 즉 기회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앞머리를 무성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알아본 사람은 금방 움켜잡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지나고 나면 다신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 즉 기회는 놓치면 좀처럼 다시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게다가 발에 날개를 달고 있으니 잡으려야 잡을 수 없다. '이때가 기회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평소와는 달리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놓쳐버린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기회가 앞에 있을 때는 정확히 판단해야 하며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칼과 같이 빠르게 결단해야 한다. 카이로스의 모습은 이런 시간의 속성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크로노스는 절대적인 시간의 신이다. 즉 그는 우리와 무관한 시간, 달력에 맞춰 넘어가고 시계의 침과 함께 흘러가는 시간을 지배한다. 이 절대적인 시간은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흘러가 우리를 늙게 하고 끝내 죽게 하는 시간이다.

반면 카이로스는 상대적인 시간의 신이다. 이 시간은 목적을 가진 사람에게 포착되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을 나타낸다. 게으른 사람에게 1분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진 사람에게 1분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중대한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카이로스의 시간은 기회의 시간이며 결단의 시간이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관리할 수 없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늘일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주관적인 시간이므로 같은 양의 물리적 시간이라도 사용함에 따라 두 배 혹은 세 배까지도 늘릴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그 순간을 놓쳐버린다면 찰나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인류의 발전 또한 이 추상적이고 상상적인 시간을 쪼개어 물질화시키고 절대화하면서 발전해온 것이 아닌가. 상상하는 인간은 절대적 시간을 거슬러 시간을 임의로 해체 구성하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시간 상상력을 펼치면서 자유를 만끽하는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