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마르크스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요약 테이블
출생 1818년
사망 1883년
국적 독일
대표작 《자본론》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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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2. 출석률 제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다
  3. 소네트와 발라드를 쓴 낭만 신사
  4. 차라리 내쫓아주길 바라다
  5. 마르크스의 윤리 의식을 의심하다
  6. 철학 속으로

독일의 정치학자·경제학자. 공산주의의 창시자.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 헤겔의 관념론을 유물론적 바탕 위에 바로 세우려 했다. 변호사인 아버지의 뒤를 잇고자 법학부에 입학하지만 철학과 역사에 더 관심을 가졌다. 모범적 학생과는 거리가 멀어 학생감옥소에 들어간 적도 있으나, 출석에 상관없이 예나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수직을 염원했으나 프로이센 정부는 좌파 성향인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결혼 후 망명 생활이 시작되는데,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 '집주인이 차라리 쫓아내주길 바란다'고 쓸 정도로 생활이 궁핍했다.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 문구는 엥겔스와 공동 집필한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구절인데, 이때 이미 공산주의의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르크스
마르크스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마르크스는 부릅뜬 눈에 조금은 겁먹은 듯하고 순박해 보이는 표정으로 영국 런던의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혀 있다. 마르크스만큼 우리에게 여러 모습으로 다가온 인물도 없을 것이다. 급진적 혁명가에서 공산주의의 창시자, 급기야는 사라져가는 몽상가에 이르기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멋있는 수염을 연상시키는 그의 외모와 인간성에 대해 러시아 친구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숱이 많은 검은 머리카락, 털로 뒤덮인 손, 단추가 잘못 채워진 웃옷 등 그의 외모와 행동은 아주 이상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그런 대로 존경할 만한 남자의 풍모를 가졌다. 그의 행동은 부드러우면서도 과감했으며 또 자신에 차 있었다. 그의 태도는 모든 예절과 너무나 상반된 것이어서 조금은 거만하게 보였고, 때로는 약간의 경멸감마저 띠고 있었다. 그는 어떠한 반대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분위기를 풍기며 명령조로만 말했다.……내 앞에는 민주주의 독재자의 화신이 서 있었다."

출석률 제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다

마르크스는 독일의 라인 지방 트리어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대인이었지만 기독교로 개종했고 계몽주의에 심취한 당시 독일의 전형적인 지식인이었다. 그가 개종한 뒤 법률가로서 안정된 생활을 했기에 마르크스 역시 대학생이 될 수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본 대학 법학부에 진학했으나, 법학보다는 철학과 역사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 당시에는 이른바 배웠다는 사람들이 대부분 철학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헤겔의 사상이 절대적인 권위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리 모범적인 학생이 아니었다. 싸우다가 다치는가 하면, 고성방가와 음주로 학생감옥소각주1) 에 들어가기도 했다. 금지된 무기를 갖고 있다가 고발당했으며, 흥청망청한 돈 씀씀이로 빚도 졌다.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두 학기 동안 학업을 이어갔으나 이곳에서의 생활도 별반 다르지 않아 아버지의 기대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결국 마르크스는 아버지에게 '학문의 모든 분야를 어정쩡하게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면서 침침한 석유 등잔 아래서 애매모호한 야심을 품고 학자 차림으로 망나니짓을 하는 놈, 예의라고는 털끝만큼도 모르는 제멋대로 된 녀석'이라는 욕을 먹는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23세에 한 시간도 출석한 적이 없는 예나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마르크스는 헤겔 학도의 모임인 박사클럽의 회원이 되어 그곳에서 밤낮없이 토론에 열중하는데, 친구들은 그를 두고 '사상의 창고'라거나 '이념의 황소대가리'라고 불렀다. 그는 교수가 되려고 하지만 대부분의 헤겔좌파들처럼 그 역시 보수주의적인 프로이센 정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프로이센 국가란 단지 역사 발전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고 보는 헤겔좌파에 속해 있었으니, 정부의 눈에는 그 역시 혁명적 변혁을 주장하는 반국가적 행위자로 비쳤을 것이다.

교수직 진출을 포기한 마르크스는 〈라인 신문〉의 편집장을 맡아 진보적인 논설을 싣기 시작했다. 특히 정치와 경제 문제에 대해 대담하고 자유로운 정신으로 신문을 편집했다. 마르크스는 이때 공산주의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이 자리 역시 정치적 이유로 프로이센 정부의 발행금지 명령과 신흥자본가들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물러나야 했다.

소네트와 발라드를 쓴 낭만 신사

그 후 마르크스는 오랫동안 사귄 약혼녀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서둘러 결혼했다. 이 여성에 대한 평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매우 다르다. '미모와 교양과 재능을 함께 지닌 소녀'라는 우호적인 평가가 있는가 하면, '멋진 약혼자를 버리고 마르크스와 결혼했다는 독설'도 있다.

그 과정이야 어쨌든, 마르크스와 예니는 서로가 상대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결혼에 골인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마르크스에게는 뮤즈의 신이 강림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는 57편의 소네트(짧은 시로 이루어진 노래)와 발라드(짧은 서사시)를 써서 그녀에게 전달했다. 약혼한 7년 동안 그들은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이 서간은 세계 서간(편지) 문학 사상 빼놓을 수 없는 열정적인 명문으로 남았다. 결혼한 뒤에도 이들은 일생 동안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어떤 용건이었든 거기에는 반드시 사랑의 확인이 덧붙여져 있었다.

차라리 내쫓아주길 바라다

결혼 후 마르크스는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가난과 불행으로 가득 찬 한 철학자의 망명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파리에서 친구 루게 가족과 함께 일종의 공산주의적인 공동체 생활을 했다. 융통성 없는 그의 성격 때문에 곧 갈라서지만 말이다.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에 의해 프랑스에서도 추방당한 마르크스는 벨기에의 브뤼셀로 가서 회원 17명으로 제1차 세계 공산당을 창당한다.

그 후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공산당 선언〉을 통해 공산주의의 대략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책의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 구절이 문제가 되어 다시 추방당했다. 결국 그는 마지막 종착지 런던으로 떠나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극도로 가난한 생활을 견뎌내야 했다. 잡지 창간은 실패했고, 무섭게 불어나는 가족들과 경제적 궁핍이 그의 목을 짓눌렀다. 가구를 저당 잡히고 차압당하는가 하면, 한번은 옷이 전당포에 잡혀 있어서 외출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병마(病魔)는 끊일 새 없이 그의 가족을 찾아들었고, 자녀들 중 불과 몇몇 아이만이 돌을 겨우 넘겼다. 부인 예니는 절망에 빠져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느니 나와 아이들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빚으로 압박을 받다가 마침내 파산 선고까지 하려 했다.

다행히 평생 동안 그의 충실한 벗이었던 엥겔스각주2) 가 이 최악의 사태를 막아주었다. 부유한 섬유공장주의 아들인 엥겔스가 그를 경제적·정신적으로 후원하지 않았다면, 마르크스의 삶은 보다 일찍 비극적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엥겔스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그동안 집세를 내지 못해 오히려 집주인이 쫓아내주기를 바랐고, 제대로 끼니를 이을 수도 없으며, 딸과 하인의 약값조차 대지 못한다고 슬퍼했다.

마르크스의 윤리 의식을 의심하다

마르크스의 윤리 의식을 흠집내기 위해 가끔 거론되는 사건이 있다. 엥겔스가 아내를 잃고 커다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마르크스가 위로의 말보다 구걸의 내용이 훨씬 긴 편지를 보냈고, 이 일로 둘 사이가 서먹해졌다가 다시 화해했다는 이야기다. 다른 소문은 마르크스가 하녀와 연애 소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는 하녀를 임신시켰으며(1851년), 이때 예니의 고통은 일생 중 극에 달했다. 더구나 마르크스는 이 사실을 아내에게 속이기 위해 하녀의 상대역을 엥겔스라고 했으며, 죽음에 임박해서야 엥겔스가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너무 악의적이어서 의심스럽고, 실제보다 내용이 과장된 것 같긴 하나 이 연애 사건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을 뒤로 하고 마르크스는 이를 악물고 연구를 계속한다. 그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저술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인간해방'이라는 신념과 함께 엥겔스와 딸, 아내, 충직한 하녀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1865년부터는 필생의 대작인 《자본론》을 집필하기 시작해 3년 후 제1권을 출판했다. 자본주의의 전체 윤곽을 밝히고 자신의 유물론 사상을 집대성한 《자본론》의 2권과 3권은 그가 죽은 후에 엥겔스에 의해 출판되었다.

1881년 아내 예니를 잃고 2년 후에는 끔찍이도 사랑하던 딸마저 죽고 말았다. 그는 이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결국 1883년 3월 14일 망명지 런던에서 숨을 거두었다.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의 한 심장이 멈춘 것이다. 엥겔스는 추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대자는 많았으나 개인적인 적(敵)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이름은 수백 년이 지나도 살아 있을 것이며, 그의 저작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그 추도사를 어떤 의미로든 지금 현실로 경험하고 있다.

철학 속으로

마르크스 철학의 이론적 원천에 대해서는 흔히들 세 가지로 말한다. 철학적으로는 헤겔의 변증법적 사상과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결합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을 만들어냈고, 경제학적으로는 영국 고전경제학에서 노동가치설과 잉여가치설 사상을 배웠으며, 정치학적으로는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게서 무계급사회라는 이상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유물론자로서의 마르크스는 인류 역사를 생산력과 생산 관계를 중심으로 한 변증법적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되어 온 것으로 파악했다. 원시 공동사회로부터 고대 노예경제, 중세 봉건사회, 근세 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은 모두 생산력(원료나 도구, 기계, 노동자의 숙련도, 노동경험 등)의 변화에 따른 필연적인 생산 관계(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변화시켜 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영국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악들을 목격한 마르크스는 오직 자본주의 사회가 붕괴해야만 인간해방이 가능하다고 확신했으며, 이러한 그의 사상은 결국 혁명 이론으로 표출되었다. 현재까지 이르는 동안의 인류 역사가 그러했듯이 앞으로 자본주의를 넘어 사회주의로, 그리고 이상사회인 공산주의로 이행해나가는 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필연인데, 다만 그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에 의한 혁명이 필요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이 주장은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세계사적 과정과는 동떨어진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제고함으로써 어느 시대에나 있기 마련인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부단히 대항해나갈 것을 강조한 그의 정신만은 유효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