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칸트

비판철학의 정수를 선보이다

요약 테이블
출생 1724년
사망 1804년
국적 독일
대표작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목차

접기
  1. 학교 수업은 '소년 노예제도'다
  2. 내게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뿐이다
  3. 돈은 미모나 매력보다 오래간다!
  4. 《순수이성비판》으로 일약 스타가 되다
  5. 걸어다니는 시계
  6. 수탉을 피해 이사하다
  7. 마지막 한마디, 좋다!
  8. 철학 속으로

독일 계몽기의 비판 정신을 대표함과 동시에 독일 고전 철학의 출발점을 이루는 철학자. 목사의 권유로 경건주의 학교에 입학하는데,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나는 학교생활을 '소년 노예제도'라고 비판했다. 다른 대학에서 교수직 제의가 들어와도 거절하다가 여러 번 지원한 바 있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교수직에 취임한다. 기형적인 가슴을 가지고도 80세까지 장수했는데, 금욕적이고 규칙적인 생활 덕분으로 보인다. 이웃 사람들이 그의 산책 시간을 보고 시계를 맞출 정도로 철저한 규칙 생활을 했다. 결혼 기회를 두 번 놓쳤으나, 제자들에게는 결혼을 권유하며 '여자란 미모보다 지참금이 중요하다'고 충고했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출간하며 비판철학의 정점에 이르렀다.

칸트
칸트

학교 수업은 '소년 노예제도'다

칸트는 1724년 동프로이센(현재의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각주1) 에서 11남매 가운데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친 부모 모두 루터교 경건파의 독실한 신자였다. 마구사인 아버지는 가난하여 30세가 넘어서야 결혼했다. 어머니는 교육을 많이 받지는 못했으나, 타고난 인품과 지성 때문에 유명했다. 좀처럼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는 칸트도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서는 극구 찬양했으며, 특히 어머니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어머니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는 내 마음에 최초로 선의 씨앗을 심어주셨다."

8세에 칸트는 어떤 마음씨 좋은 목사의 눈에 띄어 그 목사가 운영하던 경건주의 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매일 아침 예배로 시작되는 일과와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끝나는 수업 등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칸트는 이를 일종의 '소년 노예제도'라고 부르며 엄청난 혐오감을 나타냈다. 이 때문에 그는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어 결국 평생 동안 교회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근본적인 신앙은 지켜나갔으며, 이곳에서의 학교 성적 역시 항상 수석이었다.

16세에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신학생으로 입학했다. 신학 과정을 들으며 때때로 설교도 했지만, 주로 흥미를 느낀 것은 수학과 물리학이었다. 대학에 다니는 내내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못해 학생 활동이나 취미 활동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나마 유일한 즐거움은 당구를 치는 것이었다. 그는 친구들과 열심히 당구를 쳤고, 또 재주도 있어서 내기에서 돈을 따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구둣방을 경영하는 큰아버지의 도움과 성적이 뒤떨어진 동급생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아르바이트 등으로 겨우 대학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졸업하고 나서 학자의 길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죽자 우선 생활비를 마련하는 일이 급했다. 그는 어느 시골의 귀족 집안에 가정교사로 9년 동안 있었다. 그러나 그 스스로 "세상에서 나만큼 나쁜 가정교사는 없을 것이다"고 고백한 걸 보면 그리 훌륭한 가정교사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이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준다거나 때때로 벌을 주어야 하는 '뛰어난 기술'은 철학자에게 없었던 셈이다

친구의 도움으로 간신히 학위를 마친 칸트는 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가르쳐야 할 과목은 수학과 물리학, 철학의 주요 분야는 물론이고 역학, 광물학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했다. 거기에다 일주일에 20시간씩 강의를 해야 하는 중노동에 그는 때때로 한숨을 내쉬곤 했다.

"나는 날마다 교탁의 귀퉁이에 앉아서 무거운 망치를 두들기는 것과 비슷한 강의들을 단조로운 박자로 계속 진행해나갔다."

내게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뿐이다

칸트는 수차례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교수직을 지원했으나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를랑겐 대학과 예나 대학에서 교수 초빙 제안이 왔을 때 이를 거절한다. 또 베를린 대학에서는 다른 곳에 비해 많은 특권을 주면서까지 그를 시학 교수로 초빙하려 했으나, 그는 이것마저 거절했다.

고향에서 조용히 자신의 철학을 완성하고자 했던 칸트에게 기회가 온 것은 바로 다른 대학의 초청이 오고 난 후부터였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이제야 그를 붙잡아놓으려 한 것이다. 왕의 교수 임명장에는 학생들을 열성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전제 아래, '당신의 근면함과 탁월함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이 철학에서 이룩한 학문적인 성과 때문에 당신을 교수로 초빙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15년 동안의 강사 생활 끝에 철학 교수가 된 칸트는 연구에 전념했다. 그런 중에도 수입을 늘리기 위해 공개강좌를 자주 열었는데, 그 인기가 대단했다. 군인, 귀족, 상인 등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복도까지 들어차기도 했다. 그는 정해진 휴가 이외에 강의를 휴강하거나 늦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강의에 충실했으며, 명확하고도 흥미롭게 이끌어 나갔다. 그는 강의 노트를 가지고 들어가는 대신 교과서 여백이나 쪽지에 메모를 해서 강의를 했다. 그는 강의 도중 옆길로 새는 일이 잦았으며, 그것을 깨달으면 곧 "그것은 그렇고"라는 말로 중단하고 다시 되돌아가곤 했다. 젊은 시절 그가 강의에 열중하던 모습이 헤르더각주2) 의 한 서간문에 실려 있다.

"발랄한 시절의 칸트는 젊은이만이 지닐 수 있는 경쾌함을 띠고 있었고, 사색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그의 넓은 이마에는 명랑한 희열이 사라지지 않았으며, 그의 입술을 타고 쏟아지는 심원한 사상의 달변에는 해학과 재치와 변덕 같은 것이 떠날 줄 몰랐다. 한마디로 그의 교훈적인 강의는 큰 즐거움의 통로였다. 그는 학생들을 스스로 사유하도록 일깨워주었고, 그들의 사색을 기분 좋게 이끌어주었다."

돈은 미모나 매력보다 오래간다!

생활이 안정되자 칸트는 결혼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두 번의 결혼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두 여인은 차례로 칸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한 여자는 칸트가 청혼하는데 너무 뜸을 들이자 먼 곳으로 이사를 가버렸고, 한 여자는 칸트보다 한 발 앞서 약혼을 하자는 솔직한 남자를 택해 떠나버렸다. 이 일에 대해 칸트는 "결혼한 남자보다 독신자가 더 오랫동안 원기왕성하다"라는 말로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거나, "결혼한 사람들의 험해진 모습은 그들이 걸머진 굴레가 힘들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말로 약간 심통을 부리기도 했다.

이후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지만 여자를 찬미하고, 결혼하지 않는 젊은 제자들에게도 결혼할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아내를 선택할 때는 현모양처의 자격 이외에 '정열적인 애정보다도 냉철한 이성에 따르며, 미모보다 지참금을 생각하라!'고 충고했다. 돈은 미모나 매력보다 오래 가며 생활에 도움을 주고 유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복한 것이 아내의 덕분이라는 생각 때문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찰 것이라고 했다.

그럼 위대한 철학자의 경제생활은 어땠을까? 그는 젊은 강사 시절에 수입이 너무 적어 끼니를 거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에도 병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매월 20타아르의 돈을 저축해놓고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차츰 돈을 모아나갔다. 이와 같은 검소와 절약으로 만년에는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칸트는 2만 타아르나 되는 많은 유산을 남기고 죽었는데, 60세에야 비로소 낡은 집을 하나 샀다. 방 안에는 책상과 책꽂이 이외에 책장 두 개가 있었고, 벽에는 루소의 초상화 한 점이 걸려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가난했지만 일생 동안 누구한테도 돈을 빌린 일이 없어서 언제나 사람들의 방문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순수이성비판》으로 일약 스타가 되다

교수가 된 지 11년 동안 아무 글도 발표하지 않으며 연구에 전념한 칸트는 1781년 드디어 《순수이성비판》을 발간했다. 이 책으로 그는 갑자기 유명해졌다. 칸트의 철학은 유행처럼 되어서 그의 저서가 귀부인들의 안방에도 스며들었고, 이발사들이 그의 용어를 사용한다는 기록까지 나왔다. 서양철학사를 통틀어 《순수이성비판》처럼 단 한 권의 책이 그처럼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어쨌거나 《순수이성비판》 이후로 쏟아진 저서들을 통해 체계화된 그의 비판철학은 대부분의 대학에서 강의되었다. 쾨니히스베르크를 새로운 철학의 성지로 여긴 젊은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그들은 마치 신탁을 구하듯이 칸트에게서 온갖 문제에 대한 답을 얻으려 했다. 이런 존경을 받으면서도 칸트는 자신의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어긴 적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외부 지역에서 요청하는 강연은 끝내 사양했다. 칸트는 평생 동안 쾨니히스베르크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칸트의 생활은 아주 평온한 편이었다. 프로이센 문교부 장관과의 알력을 제외하고는 외적인 사건도 그렇게 많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 문교부 장관은 칸트가 종교에 대해 너무 합리적인 태도로 서술했다고 화를 낸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칸트는 "만일 어떤 사람의 말이 모두 참이라 할지라도, 모든 진리를 공공연하게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며 한 발 양보했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 종교적 주제에 대한 강의나 저술 활동을 금지당하고 말았다.

칸트의 대표적 비판서
《순수이성비판》(1781) → 《실천이성비판》(1788) → 《판단력비판》(1790)

걸어다니는 시계

16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키에 기형적인 가슴을 가진 허약한 체질의 칸트가 어떻게 철학자의 상징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스스로 세운 규칙을 고수하며 건강을 유지함으로써 필생의 과업을 위해 한결같이 정신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나무랄 데 없는 건강을 누리면서, 당시 독일인의 평균수명을 두 배나 뛰어넘는 80세까지 장수했다.

노인이 된 칸트의 하루 일과는 매우 엄격하게 짜여 있었다. 그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매일 아침 정각 5시에 일어났다. 하인은 정확하게 4시 45분에 주인을 깨우는데, 주인이 일어나기 전에는 절대로 침대를 떠나지 않았다. 칸트가 잠이 덜 깬 얼마 동안은 하인에게 자기를 좀 조용히 놓아두라고 부탁하기도 하지만, 그럴 경우에라도 반드시 깨워야 한다는 단호한 명령을 받아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하인은 그가 시간에 맞추어 일어날 수 있도록 계속 흔들어 깨웠다. 규칙적인 시간표에 따라서 그 다음에는 서재에서 공부를 하고 이어서 강의를 한다. 학술 논문을 작성하기 위한 자신의 연구 시간은 주로 오전으로 정해두었다.

점심 식사 때에는 거의 손님을 맞이하는데, 이들 대부분은 학자가 아닌 사회인들이었다. 그는 이 시간에 철학을 제외한 다양한 주제를 놓고 손님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오후에 그는 어김없이 산책을 떠나는데, 이에 대해서 어떤 전기 작가는 이렇게 썼다.

"회색 연미복을 걸친 칸트가 스페인제 지팡이를 들고 대문을 나서서 그를 추념하는 뜻에서 '철학자의 길'이라고 불리는 보리수가 늘어선 길을 산책하는 것을 보고, 이웃 사람들은 그때가 바로 오후 3시 30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사계절 중 어느 때나 똑같은 산책로를 여덟 번 아래위로 거닐었다. 날씨가 흐리거나 먹구름이 끼어 곧 비가 내릴 듯하면, 하인이 큰 우산을 팔 밑에 끼고 그의 뒤를 총총걸음으로 쫓아갔다."

그는 노령으로 산책이 힘들어질 때까지 한 번도 규칙적인 산책을 거른 적이 없었다. 루소의 《에밀》을 읽는데 열중하느라 며칠 집에서 나오지 않은 때를 빼고는. 그리하여 이웃에 살던 사람들은 칸트의 거동을 보고 시곗바늘을 맞출 정도였다고 한다. 산책에서 돌아온 칸트는 다시 연구에 몰두하다가 밤 10시에 정확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규칙적인 습관 이외에 칸트의 건강과 장수에 큰 도움이 된 비결은 금욕적인 식생활이었다. 그는 아침 식사를 단 두 잔의 차와 파이프 담배 한 대 만으로 대신했으며, 저녁 식사는 아예 없애버렸다. 차 역시 아주 적은 찻잎에서 우려낸 그야말로 묽은 차였으며, 파이프 담배는 식욕 감퇴제로 이용했다. 그는 커피를 매우 좋아했으나 커피 기름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알고는 철저하게 피했다. 특히 모임에서 커피 냄새가 그를 끈질기게 자극할 때에도 대단한 자제력을 발휘했다.

또한 칸트는 아무리 심한 병에 걸렸을지라도 하루에 약 두 알 이상을 절대로 먹지 않는다는 규칙을 지켰다. 이와 관련하여 칸트는 병을 피하기 위해 너무 많은 약을 복용하다가 죽은 어떤 사람의 묘비에 새겨진 글을 즐겨 언급했다.

"무명씨는 건강했다. 그러나 그는 더 건강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여기에 누워 있다."

수탉을 피해 이사하다

칸트의 성격은 꼼꼼하고 소심한 데다, 꽤 까다로운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주위 환경도 그의 하루 일과처럼 매우 정확하게 정리 정돈되어 있어야 했다. 그는 가위나 주머니칼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빗나가 있거나 의자 하나라도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했다. 강의 중에도 어떤 학생이 이상한 복장을 하고 앉아 있으면 거기에 신경을 쓰느라 제대로 강의하지 못할 정도였다.

한번은 그의 이웃집에서 키우는 수탉이 어찌나 울어대든지 그 수탉을 사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수탉의 주인은 어떻게 수탉이 현자를 방해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칸트는 그 수탉 때문에 이사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새로 옮겨간 집은 시의 감옥 옆에 있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수감자들이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찬송가를 불러야 했다. 이곳 수감자들은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지독하게 큰 목소리로 찬송가를 불러댔다. 칸트는 그 도시의 시장에게 화를 내며 불평을 토로했다.

"나는 수감자들이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마치 그들의 영혼이 구제받지 못하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불러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나 마음이 상했던지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까지 이 일을 언급하고 있다.

칸트를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은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규칙적인 생활 리듬이 깨지는 일이었다. 한 귀족이 칸트를 마차 산책에 초대한 적이 있었는데, 이 산책이 너무 길어지고 말았다. 결국 그는 밤 10시경에 불안과 불만으로 뒤범벅이 되어 귀가했다. 그는 이 작은 체험을 통해 새로운 생활 규칙 하나를 정하는데, 그것은 '어느 누구의 마차 산책에도 절대로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연구 활동에 지장이 있는 일은 가급적 삼갔다. 두 번이나 총장에 취임했으나 임기 만료 전에 사임했다. 제자들에게는 '음악에 깊이 빠져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데, 음악을 다소나마 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고, 따라서 학문을 쌓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 연극이나 그림을 감상하는 일도 거의 없었으며 여행이나 댄스, 사냥이나 운동도 전혀 할 줄 몰랐다. 그가 즐겼던 취미 생활이라고 하면 산책이 유일한 것이었다.

마지막 한마디, 좋다!

그의 정신력으로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쇠하여 마침내 1804년 2월 12일, 80세의 나이로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 이 위대한 인물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기 위해 신분의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많은 사람이 칸트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하인이 입술에 흘려주는 포도주를 잠깐 맛보고 "Es ist gut(좋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

언제나 조용하기만 하던 쾨니히스베르크 시와 대학과 주민들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거창한 절차를 마련했다. 간소한 장례식을 원했던 칸트의 뜻과는 반대로 성대한 장례식이 베풀어진 것이다. 시내의 모든 교회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종(弔鐘, 죽은 사람을 슬퍼하는 뜻으로 치는 종)이 일제히 울려 퍼지는 가운데 발인되었다. 수천 명의 행렬이 그 뒤를 따랐고, 마침내 그의 유해는 대학 묘지에 안치되었다. 셸링은 애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신봉자나 반대자를 막론하고 그에게 덮어씌우는 모든 엉터리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의 위대한 모습은 미래의 전 철학 세계를 통해 두루 빛날 것이다."

칸트의 생애는 전형적인 독일학자의 생활, 즉 꼼꼼하고 규칙적인 데다 약간은 기괴하고 이상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 작은 인물이 철학사도 인정하는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룩해놓았다. 그의 사상이 발표된 뒤에는 어느 누구도 이전과 똑같은 의미의 철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철학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철학 속으로

처음에는 라이프니츠-볼프의 합리주의를 연구했다. 그러나 영국 경험론의 영향을 받아 영혼, 세계, 신, 자유 등에 관한 합리주의적 형이상학에 의심을 품고 학문적인 인식의 범위를 경험 세계에만 한정하고자 했다. 칸트는 우리 인간의 인식 줄기를 세 가지로 들었다.

먼저 감성(感性)인데, 이것은 밖의 대상이 우리에게 작용함으로써 일어나는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어떤 능력을 말한다. 이 감성에 의해 우리는 외부의 대상을 받아들인다.

이 받아들여진 재료를 버무려 종합하는 능력이 오성(悟性)이다. 시간과 공간의 직관 형식에 의해 주어진 인식의 재료를 우리의 감성이 수용했지만, 참다운 인식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오성에 의해 사유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참다운 인식은 감성의 수용성과 오성의 자발성이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이성(理性)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물자체계, 예지계)까지 알려고 든다. 여기에서 우리의 이론이성은 이율배반, 즉 철학(특히 칸트철학)에서 똑같이 정당하게 보이는 두 개의 원리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영혼과 세계, 신에 대한 선험적 가상(일종의 착각)이 생기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가령 영혼이 불멸하는지 하지 않는지, 세계가 무한한지 유한한지,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며, 우리는 그것들을 현실적으로 경험(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이론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실천적·도덕적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우리의 순수이성(이론이성)은 영혼이 불멸하는지 신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실천이성의 입장에서) 도덕을 위해서는 영혼도 불멸해야 하고 신도 존재해야 한다. 여기에서 영혼과 신의 존재가 요청되는 바, 이 점에서 순수이성에 대한 실천이성의 우위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인식론, 윤리학 외에 칸트에게는 자연과학적인 업적도 많다. 특히 만년에 쓴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는 정통 기독교 사상으로부터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당시 프로이센 정부로부터 금지당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