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과 벌레 그림을 잘 그린 명수들

풀과 벌레 그림을 잘 그린 명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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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관찰하면 평범한 것도 새롭게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돈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돈은 자주 쓰기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본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쓰는 지폐에는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천원 권 지폐에는 퇴계 이황 선생, 오천 원에는 율곡 이이 선생, 만 원에는 세종대왕, 오만 원에는 신사임당의 초상이 있다. 신사임당은 율곡 선생의 어머니니까 한국의 지폐에 모자(母子)가 나란히 들어간 셈이다.

그런데 이들 지폐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위인의 얼굴만 그려진 것은 아니다. 이분들과 관련이 깊은 것들도 함께 그려져 있다. 예를 들어, 천원 권 퇴계 선생 옆에는 한국 유학의 기초를 놓으신 분답게 유학의 본산인 명륜당이 그려져 있다. 율곡 선생 옆에는 그가 태어난 강릉 오죽헌이 그려져 있다. 세종대왕과 함께 그려진 것은 용비어천가의 글귀와 함께 왕을 상징하는 그림인 〈일월오봉도〉다.

이처럼 모두 각각의 인물과 관련이 깊은 건물이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오만 원권 신사임당 옆에는 포도 가지와 가지 넝쿨이 그려져 있다. 다른 지폐들의 경우로 보면, 이런 식물들이 신사임당을 상징한다는 말이 된다.

사임당은 다방면으로 재능이 아주 뛰어났다. 율곡 선생처럼 자식을 훌륭하게 키운 것은 물론, 시를 잘 지었고 글씨도 잘 썼다. 또 그림에도 타고난 솜씨가 있어 사임당이 그린 산수화가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특히 작은 식물이나 풀벌레를 그린 그림인 초충도(草蟲圖)를 잘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신사임당 이전에는 이처럼 꽃과 풀에 곁들여 곤충이나 작은 동물을 그린 그림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신사임당이 그린 이후에 크게 인기를 끌고 유행하면서 여러 화가들이 초충도에 도전해 이름을 날리게 됐다. 그런 점에서 신사임당은 조선 시대 초충도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이 그린 초충도를 보면 수박과 생쥐 외에도 많은 식물과 곤충, 작은 동물들이 등장한다. 쇠똥구리와 땅강아지, 잠자리, 사마귀, 하늘소 같은 곤충이나 개똥벌레와 매미, 메뚜기도 등장한다. 작은 동물로는 개구리와 생쥐, 두꺼비, 심지어 고슴도치도 그렸다.

〈수박과 생쥐〉 신사임당, 16세기, 종이에 채색, 34.0x28.3cm, 국립중앙박물관
〈수박과 생쥐〉 신사임당, 16세기, 종이에 채색, 34.0x28.3cm, 국립중앙박물관

인기가 높았던 만큼 후세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았는데 실제로 이렇게 세밀하게 풀벌레를 그리는 화가들이 신사임당 이후에도 여럿 등장했다. 이런 풀벌레를 그리기 위해서는 섬세한 솜씨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관찰력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런 그림을 보면 대개 아주 세밀하고 정확하다.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정선도 아름다운 초충도로 유명했다. 어렸을 때 정선에게 그림을 배운 심사정도 초충도를 잘 그렸다. 마찬가지로 진경산수화의 대가였던 심사정이 초충도를 잘 그렸다는 점은 조금 의외일 수 있지만, 실제 경치를 그림으로 그려내기 위해 관찰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산수 화가가 초충도도 잘 그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오이밭의 개구리〉 정선, 제작연도 미상, 비단에 채색, 20.8x30.5cm, 간송미술관
〈오이밭의 개구리〉 정선, 제작연도 미상, 비단에 채색, 20.8x30.5cm, 간송미술관

신사임당과 정선이 그린 그림을 보면 뒤로는 꽃이 그려지고 땅바닥에는 생쥐, 개똥벌레, 사마귀가 그려졌다는 점이 비슷하다. 이런 것을 보면 심사임당과 정선이 그린 초충도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두 분이 살았던 시대가 너무 멀리 떨어져서 그 관계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정작 정선에게서 그림을 배운 심사정이 그린 초충도에는 조금 다른 면이 보인다. 새로운 스타일이 등장한다. 무엇보다 곤충들이 땅바닥에 있지 않다. 여치가 바위 위에 올라 앉아 있다. 그가 그린 다른 초충도를 보아도 이 그림처럼 꽃 위에 나비가 날고 있거나 잠자리가 날아드는 등, 곤충이 땅바닥에 있지 않다. 한편, 바위는 신사임당이나 정선 그림에는 보이지 않았다.

〈괴석과 풀벌레〉 심사정, 18세기, 종이에 채색, 28.1x21.6cm, 서울대학교박물관
〈괴석과 풀벌레〉 심사정, 18세기, 종이에 채색, 28.1x21.6cm, 서울대학교박물관

이런 것을 보면 옛 그림의 초충도는 그 갈래가 하나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갈래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갈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연구된 것이 없다. 단지 최근에 발표된 초충도가 그려진 이유를 밝힌 몇 가지 연구 결과가 있다.

먼저, 작은 벌레나 동물들조차 대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초충도를 그렸을 거라는 해석이 있다.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사계절이 때맞추어 바뀌듯이 자연은 보이지 않는 이치나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여겼다. 사람도 그와 같은 이치에 순응해 산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유교 사상 속에도 잘 녹아 있는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찮은 벌레나 짐승들도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그렸다.

또 다른 하나는 시를 잘 지으려고 초충도를 활용했다는 추측이다. 옛날에 교양인이나 지식인으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를 잘 지어야 했다. 시를 잘 짓기 위해서는 자연 만물을 잘 알아야 하는데 그 연장선에서 자연의 미물인 벌레나 곤충의 생태까지 잘 알아두면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초충도가 길상화처럼 어떤 좋은 의미를 상징하여 그려졌다고 해석하는 주장이 있다. 예를 들어 개구리는 아이를 상징하고, 벌은 높은 지위, 사마귀는 악을 쫓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화조화가 그랬던 것처럼 초충도에 그려진 곤충, 벌레들 역시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뜻이나 상징이 많이 잊혀 버렸다. 그래서 오늘날에 그 의미를 밝힐 수 없게 된 것이 더 많아졌다. 초충도는 의미에 따른 해석을 하기보다는, 자연 속에 더불어 살아가는 귀엽고 작은 벌레와 곤충들의 생동감을 느끼는 그림으로서 더 사랑받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