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의 특기였던 신선 그림

김홍도의 특기였던 신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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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보면 유명 운동선수나 인기 연예인의 과거를 알고 있는 선생님이 나와 인터뷰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소질이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지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무얼 해도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뭐 이런 이야기가 흔히 등장한다. 예전의 유명한 화가에게도 이런 숨은 이야기가 있을 법한데 세월이 많이 흘러서인지 전하는 이야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천재 화가 김홍도에게도 실제로 담임 선생님 같은 분이 계셨다. 강세황이라는 문인 화가는 김홍도가 어렸을 때 그림을 가르쳐 준 스승이었다. 이분이 김홍도에 대해 '생각해 보면, 우리 홍도는…….' 하면서 남겨 놓은 이야기가 있다. 김홍도가 단원(檀園)이란 호를 지을 때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스승인 강세황에게 글 한 편 지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가 김홍도에 관한 옛일을 떠올리며 적어 놓았던 글귀가 남아 있다. 거기에서 강세황은 "단원의 신선 그림은 후세에 길이 이름이 전해질만 하다."라고 김홍도를 크게 칭찬했다.

스승인 강세황이 볼 때 단원은 인물, 산수, 꽃, 새, 벌레 등 못 그리는 그림이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신선 그림을 제일 잘 그렸다고 생각했다. 잘 그리기도 했지만 많이 그리기도 했다. 김홍도는 신선 그림을 그릴 때면 자기도 모르게 신이 절로 났다는데 얼마나 신이 났는지를 보여 주는 왕실 기록까지 남아 있다.

왕이 김홍도에게 신선 그림을 그리라고 하자 그는 "알겠습니다." 하고 그림 그릴 준비를 했다. 내시에게 먹물 그릇을 옆에 들고 서 있으라 하고, 모자를 벗은 뒤에 너풀거리는 소매 자락을 단단히 잡아매고 폭풍우가 몰아치듯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붓을 휘둘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 뒤 불과 몇 시간 만에 잔치에 초대받아 바다의 파도 위를 걸어 가는 신선들의 그림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자신이 좋아하거나 잘 그리는 분야가 아니면 이렇게 신명 나서 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 기록 속에 나오는 김홍도 그림은 오늘날 전하고 있지 않지만 대신 그가 그린 다른 신선 그림이 전해진다.

〈군선도〉(부분) 김홍도, 1776년, 종이에 수묵, 132.8x575.8cm, 삼성미술관 리움
〈군선도〉(부분) 김홍도, 1776년, 종이에 수묵, 132.8x575.8cm, 삼성미술관 리움

국보로 지정돼 있는 김홍도의 〈군선도〉는 그가 32살 때 그린 그림이다. 신선들이 허공에 떠 있듯이 아무런 배경 없이 여러 명 등장해 무리를 지어 걸어가고 있다. 단원이 신선 그림을 많이 그린 것은 그가 이 방면에 재주가 뛰어난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에 신선 그림을 그려 달라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가 살았던 18세기 후반에는 신선 이야기가 크게 유행했다. 그림뿐 아니라 신선에 대한 책도 많이 나와서 무척 인기를 끌었다.

어째서 18세기에 신선 이야기와 신선 그림이 유행하게 된 것인지 알아보자. 18세기 후반이 되면 사회가 발전하면서 경제적으로도 매우 풍요로워졌다. 사람들은 그런 행복한 삶이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를 바랐다. 건강에 신경을 쓴 것은 물론 오래 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수백 년씩 장수했다는 신선을 부러워하며 신선을 그린 그림을 찾았다. 김홍도는 바로 그런 때에 신선을 잘 그리는 화가로 주목받으며 큰 인기를 누렸고, 자신의 솜씨를 맘껏 발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유명한 화가라 하더라도 그 실력 발휘는 시대적인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