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대사 그림은 왜 인기가 많았을까?

달마대사 그림은 왜 인기가 많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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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돼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불교가 전해진 과정을 보면 스님을 포함해 많은 사람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인도를 오갔다. 손오공으로 유명한 삼장법사도 불법을 구하러 중국에서 인도로 간 분이다. 그런데 삼장법사보다 훨씬 앞서서 인도 불교를 전파하려고 중국에 온 스님 중에 달마대사라는 분이 있었다. 달마대사는 원래 인도 남부에 있던 팔라바라는 왕국의 왕자였는데 중국에 건너 와서 새로운 불교를 전파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새로운 불교란 '선종'을 말한다. 이전까지의 불교가 왕이나 귀족들을 위한 것이었던 것과 달리, 선종은 사람이면 누구나 본래 타고난 마음을 잘 터득하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한 불교다. 달마대사의 이런 가르침은 귀족 종교를 쳐다보기만 하던 보통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으면서 널리 전파됐다. 달마대사는 그래서 중국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손꼽히게 됐다. 또 유명한 만큼 여러 가지 일화도 많이 생겨났다.

그런 일화 중 하나로 '달마대사가 신발을 품에 안고 인도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활동한 때는 삼국 시대 무렵이었다. 당시 중국의 북쪽에는 북위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곳에 송운이라는 관리가 있었는데, 인도에 사신으로 갔다 오면서 인도와 중국 사이에 있는 파미르 고원을 넘게 되었다. 험한 산길을 가던 그는 그곳에서 짚신 한 짝을 가슴에 품고 걸어오는 스님 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이상하게 여겨 스님의 얼굴을 자세히 봤는데, 중국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달마대사인 것이다.

송운이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대사님, 어디 가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서쪽으로 가는 걸세."라고 대답했다. 달마대사가 서쪽으로 간다고 한 것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고국에 돌아가면 자네 임금은 벌써 돌아가셨을 걸세."라고 말했는데, 송운이 북위에 돌아와 보니 달마대사의 말대로 임금이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임금이 황제가 돼 있었다.

송운은 황제에게 가서 달마대사를 만나 나누었던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왕은 "무슨 얘기를 하느냐. 달마대사는 죽어서 이미 장례를 치렀다."라며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송운이 계속해서 겪은 일을 말하자 황제는 반신반의하면서 대사의 무덤을 조사해 보라고 시켰다. 그래서 무덤을 파 보았더니 달마대사의 시신은 온데간데없었고, 짚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달마대사의 신비로운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 누군가가 꾸며낸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역사 속의 인물이 위대한 업적을 남기면, 사람들은 그 인물이 신비로운 능력을 가졌다고 믿으며 존경심을 더 키웠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인물의 초상을 그림으로 그려 오래 기억하고자 했다. 달마대사의 그림 역시 그러한 이유에서 많이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달마대사 그림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얼굴이다. 달마대사는 원래 인도 남쪽 지방 출신인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갈고리처럼 생겼다. 또 눈썹은 매우 짙고 수염도 수북하게 많았다. 그래서 달마대사는 보통 그러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귀에 커다란 귀걸이를 하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다는 특징도 있다. 무엇이든 꿰뚫어보려는 듯 눈매는 아주 매섭고, 눈은 아주 커다랗다. 두 손은 가지런히 가슴 위에 모아져 있는 게 독특한 모습이다.

이런 외모적인 특징 이외에도 화가 입장에서는 달마대사를 그리는 데에 염두할 점이 있었다. 신비로운 능력을 지닌 달마대사였던 만큼 그림에 그 느낌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옛 화가들이 달마대사를 그릴 때에는 좀 색다른 방식으로 그렸다. 꼼꼼하게 그리는 대신 먹을 듬뿍 찍어 '휙' 하고 재빨리 그렸다. 이렇게 군더더기 없이 그리는 것이 그림에 강한 힘을 느끼게 하면서 '일체의 허식을 버리라'는 달마대사의 정신과도 일치한다고 본 것이다.

달마대사를 잘 그렸던 사람으로 김명국이란 화가가 있다. 그가 그린 〈달마도〉를 보면 달마대사가 실제로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명화의 힘인데, 바로 김명국의 〈달마도〉가 그렇다. 그가 그린 달마대사는 순식간에 그려졌지만 위에서 말한 특징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 얼마나 빨리 그렸는지 붓질을 몇 번 했는지 그림에서 세어 볼 수 있을 정도다. 김명국은 그림처럼 성격도 매우 호탕하고 거침이 없었다고 한다. 또 술을 무척 좋아했는데 술을 마신 뒤에 그린 그림일수록 더 볼만했다고 전해진다.

〈달마도〉 김명국, 17세기, 종이에 수묵, 83.0x57.0cm, 국립중앙박물관
〈달마도〉 김명국, 17세기, 종이에 수묵, 83.0x57.0cm, 국립중앙박물관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은 여러 차례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면서 그림을 잘 그리는 화원도 함께 보냈다. 김명국 역시 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다녀온 경험이 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일본을 다녀왔다. 일본에서 '김명국을 꼭 다시 보내 달라'고 부탁해 왔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선종이 널리 퍼져 있어서 김명국이 그린 달마도를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가 일본에 갔을 때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그림 요청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김명국이 그린 달마도는 힘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딘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친근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그래서 더 인기가 높았는지도 모른다. 일본 사람들이 김명국의 달마도를 많이 찾았던 이유에는 개인적인 취향도 있었겠지만 달마대사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교훈을 얻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뛰어난 학식이나 힘든 수행 과정이 없더라도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한 달마대사의 가르침을 달마 그림을 통해서 늘 되새기고자 한 것이다.

옛 그림 가운데 역사상 유명한 인물이나 위인들의 그림을 많이 그리고 또 많이 감상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김명국이 그린 달마대사 그림이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더 인기였던 건 우리가 유교 사회인데 반해 일본은 불교 사회였기 때문이다. 유교 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선 달마대사 대신에 유명한 문인이나 지식인들의 그림을 많이 걸어 놓고 감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