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은 누가 그렸을까?

옛 그림은 누가 그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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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가 그린 풍속화첩 속에는 우리가 잘 아는 〈씨름〉을 포함해 모두 25점의 그림이 들어 있다. 그중에는 〈씨름〉처럼 널리 알려진 것도 있지만 별로 유명하지 않은 그림도 있다.

그중 하나로 〈시주〉라는 그림이 있다. 스님들이 길가에서 점괘 판을 펼쳐 놓고, 지나가는 여인에게 점을 보기를 권했던 당시 풍속을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이것과 비슷한 장면을 그린 또 다른 〈시주〉 그림이 있다. 이것은 김홍도가 그린 것이 아니라 김홍도의 그림 〈시주〉를 옆에 두고 누군가가 그대로 베껴 그린 것이다. 김홍도의 그림보다 솜씨가 떨어지고, 단순하게 먹으로만 그렸다.

〈시주〉 김홍도, 18세기, 종이에 채색, 28.0x24.0cm, 국립중앙박물관
〈시주〉 김홍도, 18세기, 종이에 채색, 28.0x24.0cm, 국립중앙박물관
〈시주〉 밑그림, 작자 미상, 18세기, 종이에 수묵, 17.0x30.0cm, 개인 소장
〈시주〉 밑그림, 작자 미상, 18세기, 종이에 수묵, 17.0x30.0cm, 개인 소장

이런 밑그림은 흔히 원본 그림 위에 기름종이를 올리고, 먹으로 윤곽을 그리는 게 보통이다. 왜 이런 그림을 그렸느냐 하면 나중에 비슷한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 본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와서 김홍도의 〈시주〉 같은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면 이 밑그림을 꺼내서 종이 밑에 깔고 그대로 윤곽을 따라 그리고 적당히 채색을 하면, 비슷한 그림이 완성된다. 이렇게 원래 그림의 본이 되는 그림을 밑그림, 혹은 화본(畵本) 또는 초본(草本)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 화가들이 어떻게 그림 공부를 했고, 솜씨는 어떻게 갈고 닦았는지를 보여 주는 열쇠가 되는 그림이었다.

조선 시대에 화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그림을 그려 먹고 살았던 전문적인 직업 화가였고, 다른 부류는 취미로 그림을 그린 사람들이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타고난 소질이 있지만, 직업과는 상관없는 아마추어 화가들이었다.

직업 화가 중에는 관청의 도화서에 소속되어 나라에 필요한 모든 그림을 그렸던 화원이 있었다. 조선 시대 초기에 도화서(처음에는 '도화원'이었던 것이 명칭이 바뀜)가 설치되면서 화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이 처음에는 20명이었지만 조선 시대 후기가 되면 30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도화서에는 이들 화원 외에 '화학생'이라고 하는 그림 배우는 학생 15명 정도가 소속돼 있었다고 한다.

도화서의 화원들이 그리는 그림은 주로 왕실에서 필요한 초상화 같은 기록화였다. 물론 산수화나 화조화처럼 감상을 위한 그림도 그렸지만 궁중을 장식을 하기 위한 그림인 장식화나 인물이나 사건을 기록하는 기록화에 비하면 훨씬 적었다.

조선 시대에는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은 아니지만 그림을 시장에 내다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던 직업 화가들도 있었다. 조선 시대 후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하는데 이들 중에는 화원 이상의 그림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 무렵에 이런 직업 화가들이 대거 등장했던 까닭은 조선 시대 후기에 그림 감상이 널리 유행하면서 그림을 소유하려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정리하자면, 조선 시대에 직업적으로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한 화가 중에는 나라의 관청인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이 있는가 하면, 그와 무관하게 일반인 그림 애호가를 상대로 시장에서 그림을 판 화가가 있었다.

반면, 아마추어 화가는 매우 다양했다. 조선 시대에는 필기구가 붓밖엔 없었다. 그래서 학문을 하는 선비들도 짬이 나면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흔했다. 게다가 옛날에는 글씨와 그림은 뿌리가 하나라고 해서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선비의 높은 교양 수준을 나타내는 기준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래서 많은 문인과 학자가 그림을 그렸다. 이들을 문인 화가 또는 사대부 화가라고 부른다. 문인 화가 외에도 왕을 비롯해 왕족 화가, 스님 화가, 부인 화가, 기생 화가도 있었다. 그림을 잘 그린 왕으로는 임진왜란 때의 선조 임금과 18세기 조선의 문화 부흥기를 이끈 정조대왕이 있다. 부인 화가로는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도 널리 알려진 신사임당이 있다.

직업 화가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그림 교육을 받느냐 하는 문제였다. 대부분의 화원은 어릴 때부터 도화서에 들어가 선배 화원의 지도를 받으며 그림 공부를 했는데 이때 교과서로 쓰인 것이 바로 화본이었다. 화본대로 그림을 그려 보면서 실력과 솜씨를 닦았다. 도화서뿐 아니라 대대로 화원이 나왔던 화원 집안에서도 화본을 가지고 자식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하지만 직업적으로 그림을 접하지 않거나 화원 집안에 태어나지 않은 아마추어 문인 화가들은 이런 화본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기억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또 일부는 자신이 본 것을 수첩 같은 것에 그려 모아 자신만의 화본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조선 시대 후기가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중국에서 출판 기술이 발전하면서 많은 책이 나오게 됐는데, 그중에는 유명한 옛 그림을 목판에 새겨서 책으로 만든 화보집이 많았다. 예를 들면 《고씨화보》, 《당시화보》와 같은 책인데 모두 중국에서 전해졌다. 그중에는 첨단 기술을 활용해 컬러로 만들어진 것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컬러 화보집으로 《개자원화전》이 있다.

《개자원화전》의 한 페이지
《개자원화전》의 한 페이지

이 책은 아름다운 채색 판화를 엮어 만든 것으로 당대에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내용 또한 매우 혁신적이었는데 단순히 이름난 그림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나무면 나무, 바위면 바위, 인물이면 인물을 그리는 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어서 누구나 이 책만 있으면 혼자서 얼마든지 그림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개자원화전》뿐 아니라 조선 후기에 이런 화보집이 전해지면서 그림을 그리는 계층에 큰 변화가 생겨났다. 화보집이 나오기 전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 대부분이 도화서 소속의 화원이었다면, 화보집이 나온 후로는 문인 화가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다. 화본이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화보 속에 있는 명화를 모방해서 그림을 그려 볼 수 있고, 또 사물이나 사람을 묘사하는 법을 쉽게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을 휘어잡은 3대 화가
조선 시대 3대 화가로 일반적으로 안견, 김홍도, 장승업을 꼽는다. 안견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사랑을 받았던 화가이자 〈몽유도원도〉를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김홍도는 말할 것도 없이 18세기를 대표하는 풍속화와 화조화의 대가이다. 김홍도보다 100년 정도 늦게 태어난 장승업도 3대 화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그는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지 않았지만 한 번 본 것은 모두 똑같이 그려 낼 정도로 그림 천재였다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3대 화가를 꼽으면서 이들 중 한 사람을 빼고,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을 넣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