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여인

로이 리히텐슈타인, 〈잠자는 여인〉, 캔버스에 유화, 마그나 물감 / 91.5×91.5cm

〈잠자는 여인〉은 삼성그룹 비자금 수사 사건으로 화제를 모은 〈행복한 눈물〉을 닮았다. 인쇄물 망점인 벤데이 닷이 숭숭 찍힌 것이나 붉고 통통한 입술의 전형적 미인을 그린 점 등 전형적인 로이 리히텐슈타인 스타일이다. 이 두 그림은 제작 연대도 리히텐슈타인의 최전성기인 1964년으로 같고, 크기도 비슷하다. 〈잠자는 여인〉이 당시 작가 최고가 기록을 세우며 4488만 달러(470억 9000만 원)에 낙찰됐으니, 〈행복한 눈물〉은 지금 얼마나 값이 나갈까? 2002년 당시 환율로 86억 5000만 원인 715만 9000달러였는데, 지금은 그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비쌀 것이다.

워홀이 1960년대 미국이라는 시대와 장소를 작품에 반영했듯, 리히텐슈타인 역시 그 시대를 그대로 반영했다. 만화를 그대로 베낀 것 같지만 사실 리히텐슈타인은 만화의 컷 중에 여자 얼굴 부분만 도려 내 포커스를 주었다. 그것도 머리 부분이 약간 잘리게 그려서 오히려 얼굴과 머리카락이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리히텐슈타인이 관심 있던 것은 그가 인용한 만화 컷 그 자체가 아니라, 거기 들어 있는 여자들의 전형적인 예쁜 얼굴이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좋은 여자’와 ‘예쁜 여자’의 공식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현대 사회를 시치미 뚝 떼고 그대로 보여 주면서, 이를 통해 가벼움을 지향하는 현대인의 속성을 공격하기도 한다.

리히텐슈타인은 여자뿐 아니라 남자 캐릭터도 많이 그렸다. 그가 그린 여자가 모두 ‘예쁜 척’을 하고 있다면, 남자들은 다 ‘멋있는 척’을 하고 있다. 1960년대 미국에서 남자와 여자에게 요구되던 전형적인 ‘모범 스타일’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요구하는 ‘완벽한 남자’와 ‘완벽한 여자’ 스타일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문제를 제기한다.

싸구려 만화를 고급 예술의 소재로 쓴 점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1960년대 미국 팝 아트는 기성 대중문화 이미지를 고급 미술 단계로 끌어올림으로써 미술의 ‘고상함’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리고 이를 한눈으로 보여 주는 게 워홀과 리히텐슈타인이다. 리히텐슈타인이 즐겨 그리던 통통하고 붉은 입술에 짙은 눈썹과 풍성한 머릿발을 자랑하는 여자 얼굴 캐릭터는 미국인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흘러간 옛날 문화’다. 우리는 박수근 그림 속 소녀의 ‘간난이’ 머리를 보고 옛날 생각을 하지만, 미국인들은 리히텐슈타인 그림 속 촌스러운 미인과 벤데이 닷을 보고 옛날 생각을 한다.

이 작품은 1960년대 미국 현대 미술 전문 갤러리로 유명하던 로스앤젤레스의 페러스 갤러리에서 그림이 완성된 해인 1964년에 전시됐고, 전시가 끝난 뒤 갤러리가 직접 이 작품을 구입해 소장했다. 페러스 갤러리는 워홀이 첫 개인전을 연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 후 컬렉터인 필 거시에게 팔았고, 필 거시 부부는 이 그림을 평생 소장했다. 이들이 모두 세상을 뜬 뒤에야 경매에 나왔다.

소더비 측은 이 작품을 팔 때, 이 작품이 앞으로 리히텐슈타인 재단이 발간할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e)에 포함될 것이라는 점을 명시했다. ‘카탈로그 레조네’는 어떤 한 작가의 작품을 모두 기록하는 도록으로, 작품의 진위와 가치를 판정할 때 기준이 된다. 카탈로그 레조네가 있는 작가의 경우 그 작가의 작품이 시장에 나오면 먼저 카탈로그 레조네를 확인해 보는 게 순서다. 다시 말해, 어떤 작가의 카탈로그 레조네에 들어 있는 작품을 사면 대체로 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