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표기 언어 The dream , Le Rêve
요약 테이블
제작시기 1932년
가격 $155,000,000(1626억 2000만 원)각주1)
작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파블로 피카소, 〈꿈〉, 캔버스에 유화 / 130×97cm
파블로 피카소, 〈꿈〉, 캔버스에 유화 / 130×97cm
“지금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이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 파블로 피카소

“마리-테레즈 월터의 외모는 놀라웠다. 그녀가 파블로(피카소)에게 조형적인 영감을 준 여자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고대 그리스 스타일로 아주 매력적이었다. ······ 볼륨이 있고 선이 뚜렷한 그녀의 몸은 완벽했으며, 한 점의 빼어난 조각 같았다. ······ 그녀는 모델로서 아주 훌륭했다.”

파블로 피카소의 스물여덟 살 연하 애인 마리-테레즈 월터에 대해 이런 찬사를 날린 사람은 다름 아닌 피카소의 또 다른 연인인 프랑수아즈 질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소르본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화가와 작가로 활동한 프랑수아즈 질로는 1964년에 발간해 크게 화제를 불러 일으킨 책 《피카소와의 나날들(Life with Picasso)》에 피카소의 과거 애인이던 마리-테레즈 월터에 대해 자세히 묘사했다.

피카소가 프랑수아즈 질로를 만난 것은 마리-테레즈 월터와 결별하고 그다음 연인인 도라 마르와도 헤어진 1944년이었다. 프랑수아즈 질로는 10여 년간 피카소와 함께하며 두 아이를 낳았다. 정말 특이하게도, 피카소는 프랑수아즈 질로와 함께 살 때에도 옛날 애인인 마리-테레즈 월터에게서 거의 매일 편지를 받았고, 심지어 그 편지를 프랑수아즈 질로에게 읽어 주곤 했다. 그런데 프랑수아즈 질로가 마리-테레즈 월터를 직접 만난 본 뒤 그녀의 외모 및 그녀가 피카소의 예술에 미친 영향을 분석해 이런 찬사를 남긴 것이다. 대체 마리-테레즈 월터가 얼마나 매력적인 여성이었기에 피카소의 훗날 여성까지도 질투가 아닌 감탄을 할 수 있었을까?

피카소 그림이라고 다 비싼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마리-테레즈 월터를 그린 그림은 거의 예외 없이 다 비싸다. 피카소는 1931년 12월에서 1932년 3월 사이에 신들린 듯이 마리-테레즈 월터를 그려 댔다. 이 짧은 기간에 최소한 스물여덟 점을 그렸으며 대부분 아주 좋은 작품으로 남았다. 피카소의 특별한 여인이던 마리-테레즈 월터는 대체 누구인가?

피카소는 만 마흔다섯 살이던 1927년 당시 열일곱 살이던 소녀 마리-테레즈 월터를 파리의 유명 백화점인 갤러리 라파예트 앞에서 만났다. 그리고 이후 9년 동안 이 소녀와 비밀스러우면서도 정신없는 사랑에 빠졌다. 마리-테레즈 월터를 처음 만났을 때 피카소는 이미 유명한 화가였지만 완전한 중년 나이에 접어들었고 아내인 올가와도 사이가 아주 나쁜 상태였다. 마리-테레즈 월터는 이런 피카소에게 현실 도피처가 되어 주었다. 이 그림에서처럼 피카소는 마리-테레즈 월터를 언제나 둥글둥글 순한 곡선으로 그렸다. 그녀는 순종적인 여자였고, 별다른 관심사 없이 스포츠만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발레리나이던 아내 올가에 비하면 예술적 수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당시 피카소는 명성을 누리면서도 정신적으로 지쳐 가고 있었고, 아내와의 관계는 권태기를 넘어 파탄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런 피카소에게 어리고 순종적인 마리-테레즈 월터는 구원의 여신 같았을 것이다.

마리-테레즈 월터는 피카소의 그림에 자주 등장했고 그의 딸도 낳았지만, 피카소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에는 더 큰 관심을 끌었다. 마리-테레즈 월터는 피카소가 죽기 1년 전인 1972년에야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이자 미술사학자인 리디아 개즈먼과 인터뷰를 하며 처음으로 피카소와의 관계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녀는 피카소를 처음 만났을 때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어려울 만큼 부끄러웠다고 한다. 실제로 마리-테레즈 월터의 10대 때 사진을 보면 철없고 수줍음 많은 전형적인 소녀 모습이다.

홀어머니 손에 자란 마리-테레즈 월터에게 피카소는 아버지 같은 존재로 다가갔다. 피카소는 자신의 아들 파올로와 함께 마리-테레즈 월터를 서커스와 놀이동산 등에도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피카소는 자신의 본색을 그리 오래 숨기지 않았다. 마리-테레즈 월터를 스튜디오에 데리고 다닌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관계를 시작했다고 한다. 피카소는 그러면서도 그녀의 존재를 숨긴 채 아내와 이혼도 하지 않고 ‘두 집 살림’을 했다. 그래서 때때로 마리-테레즈 월터는 피카소 그림에서 기타, 물병, 과일 접시와 같은 상징적인 물건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다 마리-테레즈 월터를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마구 그린 시기가 바로 1931~1932년이다. 〈꿈〉이 그려진 연도가 1932년이라는 사실 또한 밑줄 쫙 긋고 보아야 한다. 피카소가 그린 마리-테레즈 월터의 그림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 여섯 번 나오는데, 모두 1932년에 그려진 것이다. 특히 마리-테레즈 월터는 잠꾸러기였기 때문에 피카소는 그녀의 잠자는 모습을 즐겨 그렸다. 피카소는 원래 ‘잠자는 미녀’라는 소재에 일종의 환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누드와 푸른 잎사귀와 흉상〉(1932)과 〈검은 팔걸이의자에 누워 있는 누드〉 (1932)를 비롯해 유명한 그림들인 〈금발의 여인〉(1931), 〈잠〉(1932), 〈누워 있는 여인〉(1932), 〈꿈꾸는 사람〉(1932) 등이 모두 마리-테레즈 월터가 잠자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마리-테레즈 월터의 잠자는 모습을 그린 그림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꿈〉이 가장 유명하다. 의자에서 잠든 마리-테레즈 월터를 정면에서 클로즈업해 그린 것이라 몸매의 부드러운 곡선이 아주 잘 드러나고, 단꿈에 젖은 달콤한 모습은 워낙 강렬해서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울 정도다. 어느 유명 작가의 이름을 들었을 때 많은 사람이 머릿속에 떠올리는 그림이라면 비싸게 팔리기 쉽다. 피카소의 〈꿈〉은 그런 점에서 비싼 그림이 될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

그럼 이제 피카소가 누구인지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2009년에 미술 전문가들의 투표를 통해 ‘20세기 이후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작가 200명’ 리스트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1위는 당연히 피카소였다. 거래 가격이 알려진 미술 작품에서 가장 비싼 그림 백 점 가운데 열다섯 점이 피카소의 그림이다. 그중 네 점은 최상위 20위 안에 들어 있다. 이런 수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비싼 화가’ 하면 누구나 피카소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피카소 그림은 대체 왜 그렇게 비싼 걸까? 물론 미술사적인 이유가 제일 크다. 미술뿐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 사람을 계기로 한 분야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 대중음악의 신화 마이클 잭슨이 역사적 인물인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미술 작가도 마찬가지다. 서양 미술은 피카소가 있기 전과 후가 확연히 다르고, 그런 이유에서 피카소는 서양 미술사상 가장 중요한 작가다. 르네상스 미술이 절정이던 15세기 이후 400여 년 동안 서양 미술에서는 원근법과 단일 시점(Single Viewpoint)이 너무나 당연한 원칙이었다. 멀리 있는 것은 작아 보이고 가까이 있는 것은 커 보여야 하며, 화가가 바라보는 시점에서 본 대로 일관되게 그려야 현실을 잘 표현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피카소는 그런 규칙에 따라 그리는 것만이 세상을 잘 표현하는 게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는 원근법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여러 시점에서 바라본 모습을 한 화면에 넣어 그렸다. 그래서 사물이나 사람이 이상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당시 현실을 잘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20세기 초반 유럽 사회는 이미 전통과 결별을 선언하며 변화와 혼돈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두 번의 세계 대전까지 겪으며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망가져 가고 있었다. 그런 세상에서 겉으로 보이는 현실의 외형을 그럴듯하게 그려 내는 것만이 예술이 될 수는 없었다. 피카소는 여기에 확신이 있었고, 그래서 세상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

중요한 것은 피카소가 시작한 ‘새로운 미술’이 피카소 혼자만의 시도로 그친 게 아니라는 점이다. 피카소가 시작한 새로운 미술, 특히 그가 1907년 무렵부터 시작한 ‘입체파(Cubism)’ 미술은 당대 유럽 미술계 전체를 흔들었다. 그리고 이후 서양 미술과 전 세계 미술이 과거와 결별하고 변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튀는 행동을 해서 혼자 날뛴 것에 그치면 ‘광인’에 불과하지만,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궁극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역할을 하면 ‘역사적인 사람’이 된다.

〈꿈〉이 1억 5500만 달러(1626억 2000만 원)에 팔린 데는 피카소가 서양 미술사상 제일 중요한 작가라는 점과 마리-테레즈 월터를 그렸다는 사실 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사실 피카소의 입체파 경향을 보여 주는 작품은 1907~1919년에 그려졌으니, 1932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정작 입체파 선구자로서 피카소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연이 있기에 이 그림이 이렇게까지 비싸게 팔렸을까?

무엇보다도 이 그림에는 세계 미술 시장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얽혀 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호텔계의 내로라하는 갑부 스티브 윈이 이 그림을 팔꿈치로 쳐서 훼손한 사건이다. 이 그림은 원래 뉴욕의 사업가이자 유명 컬렉터이던 빅터 간즈 부부가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1941년에 7000달러(734만 원)를 주고 이 그림을 구입해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 빅터 간즈는 1987년에, 그의 아내 샐리 간즈는 1997년에 세상을 떴다. 그 후 후손들이 이 그림을 경매에 내놓아 4840만 달러(508억 원)에 낙찰됐다. 당시 구매자는 오스트리아의 금융 갑부인 볼프강 플뢰틀로 알려져 있다.

1997년 이후 세계 미술 시장에 호황이 이어지며 피카소의 그림 값도 크게 올랐다. 그러던 중 2001년에 스티브 윈이 6000만 달러(629억 5000만 원)를 주고서 이 그림을 볼프강 플뢰틀에게서 샀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스티브 윈은 이 그림을 사서 자신의 회사가 운영하는 ‘윈 라스베이거스 리조트’에 걸어 두었다. 스티브 윈이 세계적 미술 컬렉터라 그의 리조트는 웬만한 미술관 못지않은 명화 컬렉션으로 원래 유명하다.

스티브 윈은 2012년 기준으로 순 자산이 29억 달러(3조 원)로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갑부 순위에서 491위에 올랐다. 491위라는 순위가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가진 돈의 상당 부분을 비싼 그림을 사 모으는 데 쓰고 있어서 미국 미술 전문지 《아트뉴스》가 선정하는 세계 컬렉터 200위 안에 매년 어김없이 들어간다. 라스베이거스에 리조트를 여럿 소유하고 있으며, 2006년부터는 마카오에도 호텔을 지어 동서양을 오가며 카지노 업계를 주무르고 있다.

반 고흐의 〈밀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촌부〉와 렘브란트의 〈양손을 허리에 대고 있는 남자〉도 스티브 윈이 구입한 것이다(이 그림은 오토 나우만 갤러리를 통해 나중에 다시 미술 시장에 나왔다). 그 밖에도 스티브 윈은 세잔, 고갱, 마티스, 마네 등 프랑스 인상파와 유럽 근대 미술의 대가들 작품을 여러 점 소장하고 있다. 다른 골수 컬렉터들과 달리 그는 한 작품을 오래 소장하기보다는 그림을 자주 사고팔며 이익을 남겨 화제가 되었다.

아무튼 이런 스티브 윈이 2006년에 중대 발표를 했다. 〈꿈〉을 뉴욕의 헤지펀드 사업가이자 유명 컬렉터인 스티븐 코언에게 1억 3900만 달러(1458억 원)에 팔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인들을 불러 놓고 이 사실을 공개하며 마지막으로 그림을 보여 주다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만 자신의 팔꿈치로 이 그림을 치고 말았다. 마리-테레즈 월터의 왼쪽 팔뚝에 뚜렷하게 눈에 띄는 구멍이 뚫렸다.

이렇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림이 또 있을까? 세계 미술 시장의 두 거물 스티브 윈과 스티븐 코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판매 직전에 그림이 찢어져 거래가 취소된 경력 때문에 이 그림은 더 유명해졌다. 그런데 2013년 3월 미국 언론들이 이 그림이 7년 만에 원래 사기로 한 스티븐 코언에게 팔렸다고 보도했다. 그것도 2006년 당시보다 훨씬 비싼 값으로 말이다. 정말 빅뉴스였다. 이 뉴스에는 스티브 윈과 스티븐 코언 외에 또 한 사람의 거물이 등장했다. 두 사람의 거래를 중개한 뉴욕 아쿠아벨라 갤러리의 대표이자 딜러인 윌리엄 아쿠아벨라다. 윌리엄 아쿠아벨라 아버지가 세운 아쿠아벨라 갤러리는 이들의 출신국인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과 19~20세기 유럽 미술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갤러리로 이름이 높다. 현재 이 갤러리를 운영하는 윌리엄 아쿠아벨라는 스티브 윈과 스티븐 코언의 아트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여러 사람의 눈에 익은 피카소의 대표적인 그림인 데다, 세계 미술 시장의 거물인 스티브 윈과 스티븐 코언이 거래의 주인공이고, 한 번 찢어졌다 수리당하는 극적인 사연까지 얽혔으니, 이 그림은 이래저래 역사에 남을 그림이다.

입체파(Cubism)
20세기 초반 파리에서 피카소의 미술 작품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근대 서양 미술의 변화를 가져온 가장 중요한 흐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물을 마치 평면 도형을 쪼개 붙인 듯 평면적으로 그리고, 원근법을 무시하며, 단일 시점 대신 다시점을 이용해 사물을 사방팔방에서 본 시점대로 평면 위에 한꺼번에 그렸다.

입체파 스타일의 미술은 처음에는 피카소와 브라크 등 두 작가 중심이었다. 초기의 입체파는 사실상 이들의 ‘투 멘 쇼(Two Men Show)’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 파리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물론이고 유럽의 다른 지역 작가들도 입체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입체파는 과거 미술과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고 20세기 서양 미술의 궤도를 바꾼 가장 중요한 경향으로 평가받는다. 사실 피카소 이전에도 세잔이 이미 세상을 단순한 기하학적 요소들로 쪼개서 보는 식의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입체파는 세잔의 이런 새로운 시각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입체파’라는 말은 마티스가 브라크의 작품을 보고 미술 평론가 루이 보셀에게 “작은 정육면체(큐브, Cube)들로 그린 것 같다”라고 말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루이 보셀은 평론에서 ‘정육면체적 기형(Cubic Oddities)’이라는 표현을 썼고, 이를 계기로 이런 스타일의 화풍을 ‘큐비즘’이라 부르게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큐비즘’이 ‘입체파’로 번역됐다.

입체파의 시초가 된 그림은 보통 피카소가 1907년에 그린 〈아비뇽의 여인들〉이 꼽힌다. 입체파의 경향을 더 세분화할 때는 입체파 초기인 1907~1911년의 경향을 ‘분석적 입체파(Analytic Cubism)’, 1912년 이후부터 각종 오브제와 종이를 붙여 만든 입체파 작품을 ‘종합적 입체파(Synthetic Cubism)’로 구분해 부른다.

참고

・ · 원화 환산 환율은 외환은행에서 제공하는 2014년 1월 1일~6월 30일의 평균환율(고시 회차 최종, 매매 기준 환율)을 따랐습니다.

참고문헌

  • ・ Françoise Gilot & Carlton Lake, Life with Picasso, McGraw-Hill Book Company, 1964, pp.231-242
  • ・ Michael Fitzgerald, ‘A Question of Identity’, Picasso’s Marie-Thérèse, Acquavella, 2008, pp.11-12, p.16
  • ・ John Richardson, A Life of Picasso:The Triumphant Years 1917~1932, 2007, p.329
  • ・ ‘Wynn Sells van Gogh, and Gauguin’, Artnews, 2005년 12월, p.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