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전쟁

영토를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

백 년 전쟁

요약 테이블
발생 1340년
종결 1453년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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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랑스 왕보다 더 많은 프랑스 땅을 가진 영국 왕
  2. 프랑스 왕위 계승을 둘러싼 대립
  3. 제1기 : 크레시 · 푸아티에 전투와 브레트니 조약
  4. 제2기 : 오랜 휴전과 조약으로 맺어진 결혼
  5. 제3기 :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승세를 잡은 프랑스
  6. 116년 만에 마침내 막을 내리다

프랑스 왕보다 더 많은 프랑스 땅을 가진 영국 왕

1066년 영국(당시의 이름은 잉글랜드이나 이하 영국으로 명칭을 통일하기로 함)에 노르만 왕조가 들어섰다. 노르만 왕조를 세운 윌리엄 1세각주1) 는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국각주2) 의 주인이었다. 이때부터 프랑스에 영국 영토가 생겼다. 그 뒤 앙주(지금의 프랑스 서부 멘에루아르 주에 위치했던 중세 백작 령)의 백작인 헨리 플랜태저넷(헨리 2세)이 플랜태저넷 왕조를 열었다.

1154년 영국의 스티븐 왕이 죽자, 21세로 영국 왕으로 즉위한 헨리 2세(사자왕 리처드 1세와 <대헌장>을 반포한 존 왕의 아버지)는 프랑스 루이 7세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아키텐(보르도 지방의 옛 이름)의 공작 엘레오노르와 결혼했다. 이로써 헨리 2세는 프랑스 내의 푸아투, 기엔, 가스코뉴를 가졌으며,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싸워 브르타뉴를 차지하였다. 그 결과 영국은 프랑스 내에 노르망디와 앙주, 푸아투, 기엔, 가스코뉴, 브르타뉴 등 프랑스 국토의 서부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처럼 영국 왕이 다스리는 지역이 프랑스 왕보다도 더 많을 정도에 이르자, 프랑스 왕은 늘 불편한 마음이었다.

늘 대립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1337년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와 함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 이것이 단일 전쟁으로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길었던 ‘백 년 전쟁(1337~1453년)’이다.

프랑스 왕위 계승을 둘러싼 대립

1328년 프랑스에서 카페 왕조(987년 서프랑크 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이 끊긴 후 제후들 가운데 선출된 위그 카페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문을 연 왕조)의 샤를 4세가 후계자도 없이 죽었다. 그러자 그의 사촌이었던 발루아 백작이 삼부회각주3) 의 결정으로 필리프 6세로 즉위하면서 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이때 필리프 6세의 왕위 계승권에 문제를 삼은 이가 있으니, 바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였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샤를 4세의 누이(영국 으로 시집간 이사벨라 공주)이므로 발로아 백작보다 더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 했다. 에드워드 3세의 주장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더 큰 목적은 이번 기회에 프랑스를 차지하고 영국으로 통합하려는 의도였다.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의 주장이 프랑스를 무시하는 행동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프랑스에 있는 영국 왕의 봉토(봉건 사회에서 제후나 기사가 영주에게 봉사하는 대가로 얻는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프랑스 왕으로서의 권위를 높이기로 했다. 그 무렵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를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필리프 6세는 영국의 힘을 약하게 만들려고 스코틀랜드를 지원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에드워드 3세는 1329년에 필리프 6세가 충성 서약(서유럽 중세 봉건 사회에서 가신이 주군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서약하는 것)의 내용을 고치라고 요구했을 때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프랑스 경제를 혼란스럽게 하려고 행동에 나섰다. 그 당시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 지대였던 플랑드르 지방으로 수출해 왔던 영국산 양모의 수출을 금지시킨 것이다. 이때 돈 많은 플랑드르 상인들은 프랑스 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에드워드 3세를 찾아가 돈을 대면서 프랑스와의 싸움을 부추겼다.

화가 난 필리프 6세는 1337년에 영국 왕의 봉토였던 아키텐 공작령(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인 기엔·가스코뉴 지방. 지금의 보르도 지방이 그 중심지)을 몰수하고, 노르망디 해안에 군대를 보내 영국을 위협했다.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정식으로 도전장을 보내고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에드워드 3세는 병사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다음과 같은 3가지 결투 방법을 제안했다.

• 첫째, 국왕끼리 직접 대결하여 결투하거나 몇 명의 대표를 뽑아 국왕 대신 결투하기
• 둘째, 굶주린 사자 앞에 나서서 살아남은 자가 승리하기
• 셋째, 아픈 환자를 빨리 고치는 사람이 승리하기

그러나 이 제안은 필리프 6세가 결투에 응하지 않아 무산되었다.

제1기 : 크레시 · 푸아티에 전투와 브레트니 조약

1340년 영국과 플랑드르의 연합 함대가 라인 강 하구에 있는 항구에서 프랑스 해군을 저지하려다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가 백 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프랑스는 전투에서 패했고, 영국 해협(도버 해협이 들어 있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 좁은 해협)의 재해권(군사력으로 바다를 지배하는 권리)을 잃었다. 그래서 백 년 전쟁은 11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프랑스 땅에서만 전투를 벌였다.

1345년 에드워드 3세는 맏아들 흑태자 에드워드(갑옷 색깔이 검은 색이라서 붙은 별명)와 함께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이듬해 크레시에서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 군과 정면 대결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중무장을 한 봉건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는 전력에 있어서 자기네가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랑스 군대는 신무기인 큰 활을 가진 보병대(장궁대라고 불림)로 맞선 영국군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크게 패하고 말았다.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칼레로 진격하여, 칼레 시민들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1347년에 그곳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당시 유럽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 페스트각주4) 의 유행과 엄청난 전쟁 비용으로 인한 재정 곤란으로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잠시 중단되었다.

1355년 영국의 흑태자가 남프랑스를 공격하여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 사이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6세가 죽고 아들 장 2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1356년 흑태자는 영국군과 가스코뉴 군을 이끌고 중부 프랑스를 기습 공격하였지만, 수적으로 밀려 장 2세 군대의 추격을 받았다. 영국군은 푸아티에(프랑스 중서부 푸와투 샤랑트 지방의 주요 도시)로 방향을 바꿨다. 9월 17일, 두 나라 군대는 접전을 벌였지만, 일요일인 다음 날 잠시 휴전을 하게 되었다. 그 사이 영국군은 푸아티에 남쪽 누엘레 근처 모페르튀 강 근처에 은신한 채, 프랑스 군을 맞아 크게 승리하면서 프랑스 왕 장 2세를 생포하였다.

흑태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고, 계속해서 1359년에 다시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1358년에 북프랑스에서 농민 반란인 자크리의 난이 일어났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더 이상 영국과 맞서 싸울 힘이 없었다. 결국 프랑스는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평화 회담을 요청했다.

1360년 영국은 브레티니에서 프랑스 대표와 회의를 하고, 칼레에 포로로 잡혀 있던 장 2세의 서명을 받아 브레티니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영국은 푸아티에를 비롯한 프랑스 안에 있는 봉토를 차지했다. 대신 영국은 프랑스 왕위와 왕국의 이름 및 권리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하였다. 이때 프랑스는 장 2세의 석방을 위해 300만 크라운(영국의 옛날 화폐 단위)을 지불하고, 아키텐 지방과 칼레 시 등을 영국에게 할양(국토의 한 부분을 떼어 다른 나라에 줌)하였다.

칼레의 시민
칼레의 시민

로댕의 ‘칼레의 시민’과 백 년 전쟁
백 년 전쟁 초기, 프랑스 칼레의 시민들은 영국군의 공격에 완강히 저항했다. 그들은 11개월 동안 버텼지만, 결국 1347년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때 화가 난 에드워드 3세가 칼레 시민들을 모두 몰살시키겠다고 하자, 칼레 시의 대표는 에드워드 3세에게 도시와 시민들은 구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영국 왕은 칼레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대신, 칼레 시에서 가장 명망 있는 대표 6명이 교수형에 사용될 밧줄을 목에 걸고 맨발로 영국군 진영에 도시의 열쇠를 건넨 뒤 교수당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때 칼레에서 최고 부자인 유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가장 먼저 자원했다. 그러자 부유하고 존경받던 시민 장 데르가 나서고, 이어 사업가 자크 드 위쌍, 그의 사촌 피에르 드 위쌍, 장 드 피엥스, 앙드리에 당드리가 따라 나섰다. 그런데 모두 7명이었기 때문에 한 사람은 빠져야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일 아침 제일 늦게 오는 사람을 빼기로 결정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여섯 명이 모였는데, 가장 먼저 지원한 생 피에르만 나오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자원한 사람들의 용기가 약해지지 않도록 칼레의 명예를 위해 스스로 먼저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이들이 처형되려던 순간,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임신 소식을 알리며 자비를 베풀라는 왕비의 편지를 받고는 그 용감한 시민 6명을 살려 주었다.

그로부터 550년이 지난 1895년, 칼레 시는 이들의 용기와 헌신을 기리기 위해 생 피에르의 조각상을 로댕에게 의뢰했다. 이 조각상은 1893년 6월 3일 제막되었는데, 로댕이 1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 바로 ‘칼레의 시민’이다.

1914년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크 카이저는 로댕의 ‘칼레의 시민’을 보고 영감을 얻어, 이 조각상에 담긴 이야기를 희곡으로 발표하였다.

제2기 : 오랜 휴전과 조약으로 맺어진 결혼

1364년 프랑스에서는 장 2세의 아들 샤를 5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오르면서 브레티니 조약의 내용을 수정하기 위해 왕권과 군사력을 강화했다. 샤를 5세는 아키텐의 귀족들이 영국에 반항하도록 부추겼는데, 이 일로 두 나라 사이는 악화되어 다시 전쟁에 휘말렸다.

1369년에 영국군이 쳐들어오자, 샤를 5세는 프랑스가 영국보다 전력이 약한 점을 생각해 영국군과 국지전(일부 지역에서만 싸우는 전투)을 벌이며 지방 도시를 하나씩 빼앗기 시작하였다. 이때 흑태자의 동생 랭커스터 공작인 존(헨리 4세의 아버지)이 이끄는 군대와 싸워 승리를 하였고, 바다에서도 프랑스 해군이 승리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는 브레티니 조약으로 인해 영국에 빼앗겼던 영토의 대부분을 되찾았으며, 1375년에는 영국과 다시 협정을 맺었다.

그 뒤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1377년에 죽었는데, 장남인 흑태자는 아버지보다 먼저 병으로 이미 죽었다. 그래서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 2세가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영국 왕이 되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로 1380년에 샤를 5세가 죽고, 그의 아들 샤를 6세가 열세 살에 즉위했다. 두 나라 모두 왕의 나이가 어리고, 1381년에는 영국에서 와트 타일러의 난각주5) 이 일어나 리처드 2세에 대한 귀족들의 도전적인 반항이 겹쳤다. 그 바람에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자연스럽게 멈추게 되었다.

1399년에 영국 리처드 2세는 숙부이자 랭커스터 공작인 존이 죽자 그의 영지를 빼앗았다. 이에 존의 아들 볼링부룩은 리처드 2세를 쫓아내고 헨리 4세(랭커스터 왕조의 시조)로 왕위에 올랐다. 헨리 4세는 곧바로 프랑스와의 전쟁을 다시 시작하려 했지만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웨일즈의 반란이 일어나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지 못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샤를 6세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져, 부르고뉴 파와 아르마나크 파의 귀족들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을 하는 바람에 내란이 일어났다.

헨리 4세에 이어 왕에 오른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내분을 이용하여 부르고뉴 파와 손을 잡았다. 1415년에 군사를 이끌고 노르망디로 상륙한 그는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 군과 싸워 크게 승리한 뒤, 북프랑스를 장악하고 1420년에 프랑스와 트루와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하여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인정받았다.

제3기 :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승세를 잡은 프랑스

1442년 영국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연이어 죽자, 영국과 부르고뉴파에 의해 나이 어린 헨리 6세가 두 나라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아르마나크 파가 그를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샤를 7세를 따로 프랑스 왕위에 올렸다.

그러자 영국은 1428년 오를레앙(프랑스 중부, 루아르 강의 오른쪽 기슭에 있는 도시)을 포위하여 샤를 7세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1429년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소녀 잔 다르크가 흰 옷에 흰 갑옷을 입고 등장하여, 프랑스 군이 영국군을 물리칠 수 있도록 앞장서서 싸웠다. 그 결과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샤를 7세는 정식으로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다음 해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 파에 붙잡혀 영국군에 넘겨졌고, 1431년에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전세(전쟁이나 경기 따위의 기세)는 프랑스 쪽으로 기운 상태에서, 오랫동안 대립하고 있던 부르고뉴 파와 아르마나크 파도 화해를 했다. 오랜만에 안정을 찾은 프랑스는 잔 다르크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영국군과 맞서 싸우다, 1444년에 툴(프랑스 북동부에 있는 도시)에서 조약을 맺고 휴전에 들어갔다.

잔 다르크
잔 다르크

116년 만에 마침내 막을 내리다

여전히 영국이 프랑스 안의 노르망디·칼레를 비롯한 여러 영토를 소유하고 있자, 샤를 7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영국이 지배하는 여러 도시들을 공격하였다. 1450년에 이르러서는 영국군으로부터 노르망디 전체를 빼앗았다. 노르망디를 빼앗긴 영국에서는 왕위 계승 문제로 30년 동안 장미 전쟁각주6) 이 벌어졌다. 샤를 7세는 영국의 혼란을 틈타 프랑스 안의 영국군을 공격하여 1453년에는 기엔과 보르도, 가스코뉴 지방도 모두 탈환하였다.

결국 영국은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안의 모든 영토를 잃게 되었다. 1475년에야 두 나라 사이에 강화(싸우던 두 편이 싸움을 그치고 평화로운 상태가 됨)가 이루어졌지만, 백 년 전쟁은 영국군의 본거지인 보르도가 프랑스 군에게 점령당한 1453년에 실제적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116년 동안 프랑스 안의 영토를 둘러싸고 벌인 백 년 전쟁은 농토를 황폐화시키고, 봉건 기사 세력을 무너뜨렸다. 이는 중세 봉건 사회가 문을 닫고 중앙 집권화로 인한 절대 왕정이 서는 바탕이 되었다. 또 농노 해방의 길이 열리는 계기가 되었고, 부르주아 계급(중세 유럽에서 성직자와 귀족에 대하여 제3계급을 형성한 중산 계급의 시민)을 등장하게 만들었다는 큰 의의를 지닌 전쟁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