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삼국 전쟁

조조 · 유비 · 손권의 천하 통일을 향한 대접전

중국의 삼국 전쟁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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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환관과 외척 간의 권력 투쟁으로 무너지는 후한(後漢)
  2. 황건적의 난과 조조, 유비의 첫 등장
  3. 전국 각지에서 등장한 여러 영웅
  4. 패권을 잡은 조조와 위의 건국
  5. 촉 · 오 동맹의 결실, 적벽 대전
  6. 적벽 대전 이후 삼국의 관계

환관과 외척 간의 권력 투쟁으로 무너지는 후한(後漢)

한(漢)나라는 기원전 202년 유방이 제국의 문을 연 뒤, 무제(기원전 141~기원전 87년 재위)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그 뒤 계속되는 흉노(몽골 고원에서 활동하던 기마 민족)와의 전쟁으로 나라가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서기 8년에 재상이었던 왕망이 황제의 자리를 빼앗아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신(新)으로 바꾸었다. 그는 개혁을 통해 유교적 이상 국가를 건설하려 하였으나 녹림(綠林)의 난(왕광, 왕봉 등이 녹림산에서 일으킨 난), 적미(赤眉)의 난(농민 반란으로 눈썹을 붉게 물들인 무리들이 일으켰다 하여 붙여진 이름) 등으로 인해 멸망하고 말았다.

이때 유수가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왕망과 적미를 물리치면서, 왕족들과 호족들의 지원을 받아 혼란스러운 상황을 모두 정리하였다. 마침내 25년, 한 왕실의 후손이었던 그가 황제(광무제)에 올랐다. 이때부터를 역사에서는 후한(後漢, 25~225년. 왕망의 정권을 경계로 전한과 구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라 한다.

황제에 오른 광무제는 선정을 베풀어 다시 한 왕조가 번성할 수 있는 튼튼한 기반을 만들었다. 그 결과 여러 학문이 집대성되고, 세계 최초로 종이를 만들어 냈으며, 혼천의와 같은 발명품이 나오는 등 문화적으로 크게 발전했다.

하지만 제4대 화제(89~105년 재위) 이후, 15세 이전의 어린 황제들이 즉위하여 태후와 그 일가들이 실권을 잡으면서 왕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린 황제들은 성인이 되어 직접 집권하기 위하여 환관들과 손을 잡고 외척 세력을 내쫓으려 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어린 황제가 즉위 하게 되면서 외척들이 실권을 휘어잡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 당시 외척 세력은 자신들을 ‘청류(淸流)’ 라고 부른 대신, 환관 세력을 ‘탁류(濁流)’ 라고 몰아붙였다. 166년, 11대 환제(146~167년 재위) 때에는 태학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환관 타도를 외치자, 환관들은 유생 이응과 진번 등이 파당을 만들어 조정을 비방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관련 인물 200여 명이 체포되었고, 그들에게 평생 관리가 되지 못하는 종신 금고령이 내려졌다. 이것이 바로 제1차 ‘당고(黨錮)의 화(禍)’이다. 이후 10여 년 동안 당고(환관에게 빌붙지 않으려던 사대부의 관직을 빼앗고 벼슬길을 막은것(禁錮)을 가리킴)는 계속되었다.

이렇게 외척과 환관들이 세력 다툼을 하는 동안 조정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지방의 대지주들은 지방의 관직을 독점하고,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았다. 배고픔과 횡포를 참지 못한 백성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망쳐, 도적 떼가 되거나 무리를 지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황건적의 난과 조조, 유비의 첫 등장

이 무렵 어려움에 빠진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이 바로 장각이었다. 태평도(太平道)라는 신흥 종교를 앞세운 장각은 “창천(후한을 뜻함)은 이미 죽고, 황천(태평도에서 모시는 신)이 일어난다. 갑자년에 천하가 길하리라.”는 노래를 퍼뜨리면서 수십만에 이르는 사람들을 모아 황건적(머리에 노란 띠를 두른 도적들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을 조직하였다. 그는 ‘한(漢)왕조 타도’를 내세워 반란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정보가 새어나가자, 원래 계획보다 앞당겨 184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힘이 약했던 한나라 정부는 황건적을 토벌하기 위해 각 지방에 군사를 모집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자 지방 호족들은 황제의 명령을 받는다는 구실로, 병사들을 모아 사병으로 훈련시켜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황건적 토벌은 조조와 유비가 첫 등장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기도위(한의 관직 이름)였던 조조는 관군이 황건적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졌을 때, 지원병을 이끌고 달려갔다. 그리고 황실 종친(임금의 친족)이었던 유비는 의형제를 맺은 관우, 장비와 함께 황건적 토벌에 나섰다.

전국 각지에서 등장한 여러 영웅

184년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이 죽자, 황건적의 난은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황건적 토벌에 앞장섰던 장수들은 이것을 기회로 중앙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189년에 영제(168~189년 재위)가 죽고, 영제의 아들 변(소제)이 황제로 즉위했다. 이때 소제의 외척인 하진이 실권을 장악하자 원소(하북 출신 호족)가 하진에게 환관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진이 이 일을 미루고 있는 동안 궁지에 몰린 환관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 역사에서는 이를 ‘십상시의 난(189년. 시 가장 힘 있는 환관 10명이 주도한 난)’이라고 한다.

하진이 죽자, 원소는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뤄양으로 들어가 2천여 명에 달하는 환관들을 모두 죽였다. 그 당시 소제는 동생 협과 함께 도망쳐 궁을 빠져 나오기는 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다시 궁으로 돌아오는데, 동탁의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렇게 황제 형제를 모시고 궁으로 돌아온 동탁은 소제를 폐하고 동생 협을 황제로 세웠다. 새로 황제에 오른 협이 바로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189~220년 재위)이다. 동탁은 스스로 승상이 되었다가 이어 상국(황제를 대신하는 재상)이 되었다. 이렇게 정권을 잡은 동탁은 나라를 제멋대로 다스렸다.

이러한 동탁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원소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군웅들이 연합하였다. 190년 1월에 결성된 연합군이 한구 관 동쪽에서 모였는데, 이들을 관동군이라 불렀다. 이 소식을 들은 동탁은 뤄양에 있으면 고립당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그해 2월에 헌제를 모시고 장안(중국 산시 성 시안 시의 옛 이름)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때 뤄양의 모든 것을 불사르고 황제의 능까지도 파헤쳐, 뤄양은 완전히 초토화되고 말았다.

이미 폐허가 된 뤄양에 들어간 연합군은 명분이 없어져 자연 해산 되었다. 그러나 저마다 군사를 일으켜 동탁을 친다는 구실로 패권 다툼을 하면서 군웅할거 시대가 시작되었다.

패권을 잡은 조조와 위의 건국

장안으로 간 동탁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제멋대로 굴다가, 192년 왕윤과 여포의 계략에 살해당했다. 동탁이 죽자 헌제는 196년에 폐허가 되어버린 뤄양으로 돌아와, 환관이 살던 초라한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 무렵 192년부터 황건적의 잔당을 처리하고 세력을 키우던 조조는 여포를 비롯한 크고 작은 군벌(군인을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황하 중·상류 지역을 차지했다. 그 뒤 헌제를 쉬창(중국 허난 성 중심에 있는 도시)으로 모시고 갔다. 이것으로 황제를 옆에 둔 조조는 군웅 가운데 가장 힘 있는 세력이 되었다.

한편 관동군의 맹주(동맹을 맺은 개인이나 단체 가운데서 가장 중심 되는 인물이나 단체)였던 원소는 황하 중·하류 이북 지방의 군벌과 호족들을 물리치고, 그 지역 최대 세력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군사를 움직여 조조를 위협하였다.

마침내 200년에 조조는 75만 대군을 이끌고 관도로 출정한 원소와 황하 근처 관도(중국 허난 성 부근)에 서 맞대결을 펼쳤다. 원소 군의 선봉장이었던 안량과 문추가 그 당시 조조 군에 있던 관운장에게 목이 베어 원소 군의 사기가 떨어졌다. 그런데도 원소는 군사의 수가 많은 것만 믿고, 장군 저수와 군사 허유의 계책을 듣지 않았다. 결국 허유는 조조에게로 넘어갔다.

원소 군과 대치한 지도 반년이 지나 군량이 부족한 상태여서 철수를 고민하던 조조는 허유의 충고로 원소의 군량과 물자가 있는 곳을 기습하여 모두 불태워 버렸다. 승기를 잡은 조조 군은 총공격을 실시하여 원소 군을 크게 무찔렀다. 2년 뒤 원소가 병으로 죽자, 잠시 저항하던 원소의 군대는 조조에게 모두 패하고 말았다. 이것으로 조조는 중국의 반을 차지한 최고의 실권자가 되었다.

촉 · 오 동맹의 결실, 적벽 대전

삼국의 주역 중 가장 늦게 출발한 사람은 촉한(蜀漢, 촉이라 함)을 세운 유비였다. 전한(前漢) 경제의 후손이었던 유비는 관우·장비와 ‘도원결의’를 한 뒤, 황건적의 토벌에 참가하여 안희 지방의 현위(현감 밑의 군사 담당 관리)가 되었다. 그 뒤 그는 쉬저우(중국 장쑤 성의 북서쪽에 있는 도시)의 도겸을 도와 조조와 싸웠고, 도겸이 죽자 쉬저우를 차지하였다.

196년 원술을 토벌하기 위해 조조와 연합하여 싸우다 여포 군에게 쉬저우를 빼앗기고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당시 황제였던 헌제가 조조를 없애 달라는 부탁을 유비에게 했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유비는 원소에게 도망쳐 의지했다. 그러나 관도 전투에서 원소가 패하자 형주(중국 후베이 성 남쪽에 있는 지방, 지금의 장링 현)의 유표에게로가 객장(자기 구역이 아닌 다른 관할 구역에 와 싸우는 장수)이 되어 지내던 중 다시 관우와 장비를 만나게 되었다.

208년 유비가 관우, 장비와 함께 융중으로 가 삼고 초려한 끝에 제갈공명을 군사로 얻었다. 그때 제갈공명은 유비에게 ‘삼분지계’각주1) 를 내놓았다. 이 때 유비의 나이는 47세였고, 공명은 그보다 스무 살이나 아래였다.

그 무렵 손 견(동탁을 치기 위해 원소와 함께 연합군으로서 뤄양에 제일 먼저 입성한 장군)의 둘째 아들 손권이 아버지와 형 손책이 쌓아 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군사 주유의 보좌를 받아 강남의 패권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때 유비는 제갈공명을 맞아들여 형주에서 기반을 닦고 있었다. 그런데 형주 목사 유표가 죽은 후 조조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형주를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유표의 아들 유종은 재빨리 조조에게 항복을 하였다. 이 일로 유비 군은 조조 군과 유표 군에게 협공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유비는 군사적 요충지이면서 중요한 보급 기지인 강릉으로 퇴각하였지만, 장판파(중국 후베이 성 근처)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결국 유비는 아내와 자식까지 버리고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이 때 정세를 지켜보고 있던 손권은 유비가 보낸 제갈공명의 설명을 듣고 유비와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주유가 이끄는 3만의 군사를 출전시키게 되었다. 2만의 유비 군을 포함하여 모두 5만이 된 연합군은 적벽(‘츠비’를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 후베이 성 지위 현 양쯔 강 연안)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18만에 이르는 조조 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대부분이 북방 출신인 조조 군은 물 위에서의 전투에 약해 뱃멀미로 고생하자, 배를 모두 고리로 연결하여 육지와 같이 흔들림이 없게 만들었다. 이 때 주유의 부하 장수 황개가 거짓으로 항복하겠다는 계책을 써서 접근한 뒤, 불화살을 쏘아 조조군의 배를 불살랐다. 계속 되는 화공(火功)으로 군대를 재정비하지 못한 조조 군은 크게 패하여 쉬창으로 도망쳤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적벽 대전(208년)’ 이다.

촉한 건국에 많은 공로를 세운 관우
촉한 건국에 많은 공로를 세운 관우

적벽 대전 이후 삼국의 관계

적벽에서 패한 조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중(중국 산시 성 서남쪽, 한수이 강 북쪽 기슭에 있는 지방)을 공격했다. 유비는 방통(제갈공명과 함께 당대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얻은 지략가)의 계책에 따라 형주 땅에 공명과 관우를 남겨 두고 양쯔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214년에 익주(지금의 쓰촨)를 손에 넣음으로써 한중왕(漢中王)이 되었다.

조조는 헌제를 황제로 세운 이후 216년에 위왕이 되어 위(魏) 왕조를 열었지만, 마지막까지 ‘후한의 충신’ 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황제로 즉위하지는 않았다. 220년 조조가 죽은 지 9개월 뒤, 아들 조비가 헌제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음으로써 위 왕조를 열었다. 이것으로 196년을 이어왔던 후한(後漢)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조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221년에 유비도 황제로 즉위하고,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漢:蜀漢)이라 하였다. 손권도 221년에 오왕(吳王)에 오른 뒤, 229년에 황제로 등극하였다.

위(魏)·촉(蜀)·오(吳)가 이렇게 천하를 나누어 가진 이때가 바로 중국의 삼국 시대(三國時代)이다.

삼국 시대
삼국 시대